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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행운의향로 

  

  

  

.01  

 막 학번을 단 새내기에게 이제야 머리카락이 조금 자란 복학생은 일종의 새로운 자극제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는 나보다 고작 두어 살 많았으면서 풍기는 분위기는 거의 십 년은 위였다. 같은 학번 동기들은 유달리 말이 없고 어른 냄새 나던 그를 '재미없는 아저씨' 취급하며 멀리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는 그가 좋았다. 하루는 그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에 커피를 두 캔 사서 그의 옆 자리에 앉았었는데, 그에게 주고자 했던 파란 캔커피 하나는 끝내 건네지지 못하고 친구에게 향하고 말았다.  

  

 그 뒤로 몇 주는 나 혼자 안달이 난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필기 좀 보여주세요. 점심 같이 드실래요? 주말에 시간 나세요? 홀로 수줍어하며 애써 질문했지만 그는 다가오지 말라는 아우라를 잔뜩 풍기며 나의 모든 질문에 단답으로 응했다. 싫어. 아니. 없어. 난 그가 날 암묵적으로 밀어내는 것만 같아 속상하면서도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밥 좀 사주세요. 싫어. 점심에 어디 가세요? 응. 저 영화표 생겼는데. 됐어. 그는 그만하라고 직접 말 하진 않았지만 연하남의 티 나는 대시를 은근히 부담스러워 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순히 눈치가 없었거나.  

  

 몇 번은 더 끈질기게 매달렸지만 하늘은 내 편이 아니었는지 그런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달이 다 가도록 그와의 관계는 단 한 뼘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부러 그의 옆자리를 피해 앉아보기도 하고 그의 앞에서 혼자 북치고 장구치며 질투도 유발해 봤지만 눈 하나 깜짝 않는 그에 오히려 난 강의에 더욱 집중할 수 없었다.   

  

.02  

  

[이민혁, 우태운, 최성아, 김유권 | 3조]  

  

 그러다 조별과제라는 걸 겪게 되었다. 처음의 횃불같던 오기는 사라지고 슬슬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쯤이었다. 나는 같은 줄에 쓰여진 그의 이름을 보고 뛸 듯이 기뻤다.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첫 회의에서조차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그였지만 난 일 주일을 그와 같이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 벅찼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할 자신이 생겼다. 그가 숟가락을 얹어 생길 공백까지 메꿀 수 있을 자신이. 물론 조장은 그가 하지 않았고, 과탑이었던 이민혁 선배가 맡았다.  

  

ㅡ오늘도 태운이 빠져?  

  

 내 예상대로 그는 조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난 내 몫을 다 끝내고도 그를 위해 그가 맡은 자료조사를 깔끔히 해냈다. 그는 편하게 밤을 보냈을 것이고, 나는 밤을 샜다. 후회는 하지 않았다. 조장 선배의 미심쩍은 물음에 프린트만 해왔노라 대답하느라 살짝 진땀을 빼기는 했다.  

  

 그리고 그는 끝내 정말 한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발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우리는 꽤 높은 점수를 얻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내가 만사를 제쳐두고 그를 위해 행했던 모든 일들이 무색하게 나는 그의 연락처를 제외하곤 얻은 게 없었다. 오히려 내가 있고싶었던, 있어야 했던 그의 옆 자리는 한 것이라고는 조장 선배가 수 시간을 걸쳐 수정해야 했던 허접한 피피티를 만든 여자아이가 차지하고 있었다.  

  

.03  

그녀는 보란 듯이 그의 손을 잡고 장난을 쳤다. 그의 무뚝뚝한 반응에는 나에게 보여주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유형의 관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따금 웃어 보이기도, 그녀를 간지럼 태우기도 했다. 몇 미터 앞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강의에 집중하는 것은 내겐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체념한 채 질투심에 휩싸여 그들이 손을 잡고 강의실을 나갈 때 까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는 수 밖에는 없었다.  

  

 며칠 간은 식사도 걸렀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는 것이 나조차도 한심하게 느껴졌으니 내 주변인들은 얼마나 더 했을까. 하지만 물만 먹어도 속이 더부룩했고 음식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거울을 잘 보지 않아 내 몰골이 어떠했는지는 잘 몰랐지만 내 앞에서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던 민혁 선배가 대뜸 밥을 사 주어야겠다며 끌고 나간 것으로 미루어보면 꽤나 끔찍했었나 보다.  

  

ㅡ곧 시험인데, 밥을 먹어야 잘 하지.  

  

 그는 근처 분식집에 자리를 잡고 거부하는 내 입 속으로 참치김밥 한 조각을 밀어넣었다. 밥알이 이에 닿을 때 마다 드는 구토감에 자연스레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부담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선배 때문에 앞으로 뱉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식사를 시작한 것은 내 손에 젓가락을 쥐어주고 난 다음이었다. 나에게는 철근같기만 한 한 쌍의 젓가락을 신나게 놀리며 떡볶이 국물에 순대를 찍어먹는 그는 나에게 계속 말을 걸며 내가 어서 밥을 먹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묵 국물을 떠 먹다가 내가 죄인마냥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것이 보기 불편했는지 그는 복스럽게 좀 먹으라며 내 앞으로 튀김 그릇을 밀어주었다. 튀김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뭐 묻었냐는 그의 물음이 유독 다정하게 들려 울컥 목이 메었다. 멀쩡한 척 하기 위해 억지로 쑤셔넣는데 하필이면 고른 것이 퍽퍽한 고구마 튀김이라 켁켁 잔기침을 토해내며 가슴을 두드렸다. 선배는 바로 물을 떠다주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마셨다.  

  

.04  

 내가 진짜 가까워지길 바랐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활기를 되찾았고, 그를 포함한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성적도 조금은 올렸다. 점심 같이 먹자. 자연스러운 선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그와 그녀를 살짝 흘겼는데 그가 내 쪽을 바라봐 주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 산책 겸 커피를 사들고 캠퍼스를 걸었다. 시시콜콜한 삶 얘기라던가 시덥잖은 농담들이 그렇게 재밌을 줄 몰랐는데, 선배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은 진심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한참을 걷다가 작은 정자 아랫쪽 벤치에 앉았다.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원샷한 선배는 장난스레 웃으며 내 손에 깍지를 꼈다. 어깨를 파드득 떠는 내가 귀엽다며 그가 차가운 손바닥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며칠 뒤 같은 과 학생들과 가졌던 술자리가 끝나고, 그는 내게 키스했다. 조심해서 마신다고 마셨던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앞장서서 술을 따른 선배가 멀쩡할 리 없었다. 그를 부축하고 돌아가다 다다른 그의 아파트 단지 앞에서 그는 나를 벽에 밀어붙이고 키스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바로 받아들였다.  

  

.05  

그의 집 주소를 몰랐던 나는 선배를 내 자취방으로 옮겼고 우린 당연히 다음날 같은 방에서 눈을 떴다. 연인 사이에는 이럴 때 무슨 말을 하더라? 같이 별 영양가 없는 내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ㅡ너 얼굴 완전 부었어.  

  

그 쪽도 만만찮거든요. 샐쭉 눈을 흘기며 입술을 비죽이자 탁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지쳐 쓰러졌는데도 그의 기억이 끊기지는 않았었는지 선배는 우리가 입술을 부딪혔던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쪽팔린다고 앓는 소리를 내며 큰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는데 피시식 바람 빠지듯 웃는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다정하게 느껴졌다. 일인용 침대에 성인 남자 둘이 누웠으니 안 좁고 배겼을 리 없겠지만,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날 우리가 일과를 시작한 것은 점심때가 다 되어서였다.  

  

우리가 입술박치기를 했다고 해서 내 일상이 크게 변했다거나 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집 방향이 같은 그의 차로 등하교를 하고 남들의 눈에 자연스럽게 비춰지는 선에서 일상적으로 데이트를 하며 여느 커플들처럼 투투를 챙겼다. 더 이상 오매불망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는 너무나 만족스러웠고, 어느 날 사라진 나의 염장을 세차게 질러대던 바퀴벌레 한 쌍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없는 승리감을 느꼈다.   

  

.06  

가까이 알고 지낸 지 오래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우리 둘의 관계가 처음부터 진했던 것은 더욱 더 아니었다. 선배가 그 말을 하기 위해 수 차례 연습하다못해 알코올의 힘을 빌리고 본능에 기대어 충동적으로 행했을 만큼 떨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만은 정말 아무것도 계획되지 않았고 예상할 수 없었던 시작이었기에 그와 함께 시작하는 모든 것들에 내 심장은 크게 방망이질쳤다.   

  

방학을 맞이하고 처음으로 나선 데이트였다. 카페 근처 길가 화단에서 제초 작업을 하는 아저씨에게서 눅눅한 풀즙 냄새가 풍겨왔다. 검은 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선배는 덥고 습한 날씨에 말수를 줄였다가 시원한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야 내가 입은 품 큰 민소매 셔츠가 귀엽다며 처음 입술을 떼었다. 원체 사람을 대하고 반응하는 것에 조금 서투른 내가 그를 찬찬히 뜯어보며 마주 칭찬할 거리를 찾는 동안 그는 벌써 주문을 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성격에 알맞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내 몫의 아이스 카페모카를 주문하고 돌아올 것이다.   

  

형은 밋밋한 검은색 셔츠만 입어도 멋있어요. 일상적인 옷인데 왜 그렇게 멋지게 어울려요? 딱 알맞은 대답은 꼭 알맞은 때가 지나서야 생각이 난다. 하지만 진동벨을 테이블에 올려 둔 그는 머뭇거리는 내가 답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카페에 흐르는 최신곡에 따라 고개를 까딱거리며 우린 그저 마주보고 빙그레 웃었다. 형이 최근 패스트푸드점 파트타임 자리를 얻었고, 내가 방 정리를 하다가 몇 개월 전 사 두었던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등의 평범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우리는 곧 다시 여름 한낮의 태양이 작열하는 거리로 나섰다.   

  

번화가의 잘 다듬어진 가게에서는 쿵쿵 빠른 템포의 음악들이 사람들을 유혹했다. 우리는 발길 닿는대로 걸어다니다 큰 유리창을 통해 안이 들여다보이는 신발가게에 들어갔다. 비슷한 디자인의 스니커즈를 구입하며 난 그의 발 사이즈가 내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린 길거리 간식도 나누어 먹었고, 휴대전화 케이스도 같은 종류로 맞추었다. 말랑말랑한 실리콘 재질의 새 케이스가 손끝으로 느껴졌다. 나는 민트색,그는 연보라색의 펭귄 모양이었다. 저녁에 있다는 가족 약속에도 그는 굳이 나를 집 앞까지 바래다 주고서야 그의 목적지로 향했고, 나는 멀어지는 그의 자동차 뒤에 대고 목소리를 높이며 손을 흔들었다. 아직 중천인 해가 빨리 졌으면 좋겠다.   

  

.07  

잔뜩 사 놓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식빵이 다 떨어져 난 대충 저녁을 때우고 집 근처 빵집에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제사가 늦어진다고 짧게 카톡을 남긴 선배는 바쁜지 그 이후로 대답이 없다.   

  

빵 봉지를 흔들며 걸어가던 나는 놀이터 벤치에 앉은 익숙한 인영에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혹시나 내 얼굴을 보았을까 싶어 후드 티 모자도 눌러 쓴 채로 걸어갔건만, 이내 그가 나를 알아보고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와 앞길을 막아서자 자연스레 꿀꺽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ㅡ오랫만이다. 나한테 말도 안 걸고 어떻게 버텼냐? 이민혁한테 들었어. 니가 내 자료도 조사해서 갖다줬다며.  

  

겨우 잊어가던 굴욕적인 과거를 그가 다시 들춰냈다. 그는 그를 째리듯 올려다보며 지나치려던 나의 팔을 잡고 강제로 그가 앉아있던 벤치에 앉힌 후 어깨동무하듯 팔로 나를 옥죄었다. 그저 걸쳐 놓은 수준이었지만 무거운 팔을 난 풀어내지 못했다. 휴대폰을 넣어두었던 주머니에서 웅웅 진동이 울려대는 동안 그는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ㅡ뭐해, 안 받고?  

  

형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뭐해? 다정한 물음에 아무렇지 않게, 나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걸 강조하듯 대답했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떨다 결국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가 얼마 피우지 않은 담배를 내 입 앞에 가져다 대었다. 입술 끝에 닿은 담배는 내가 숨을 들이쉴 때 마다 역한 연기를 끌어당겼고, 견디지 못하고 잔기침을 내뱉은 나를 보며 그는 낄낄거렸다. 울음을 참느라 광대뼈가 아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몇번 울먹이다가 간신히 그의 팔을 뿌리쳐냈다. 빵 봉지도 버려둔 채로 혹시나 그가 쫓아올까 하는 마음에 집까지 전력으로 달렸고, 문을 걸어잠그고 주저앉아 울다가 어디 아파? 짧게 온 형의 문자를 확인하고선 옷도 제대로 벗지 않고 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 특유의 웃음소리는 끊임없이 나를 비웃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  

  

급전개 죄송합니다...  

아 그리고...사실 원래 ~04까지는 저번주에 써놨던 건데 제가...(말을 잇지 못한다)ㅠㅠ..보고싶었어요  

시험이 몇주 앞으로 다가왔네요 모두 힘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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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흐앗..!!!!! 지금 배터리가 없어서 다시 읽으러 와애겟어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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