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15시 17분 56초, 57초, 58초.
무사히 사흘이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느낌. 첫날의 어수선한 분위기완 달리 조금은 안정된 듯 보이는 사령실 내부. 2013년은 지금 오후 3시. 우리도 비슷한 시간. 오후라 그런가 나른하다. 더군다나 모니터로 보이는 한국은 맑은 날씨. 보는 것만으로도 졸리다.
요즘 입에 졸리단 말을 달고 사는 것 같네. 무의식적으로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이내 빈 컵이란 것을 깨닫고 다시 내렸다. 맛대가리 하나 없는 자판기 커피. 쉬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확인하니 5분도 채 안 남았다. 이따 나가자마자 커피나 마셔야지. 슬쩍 콧등을 긁다가 화면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창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 표지훈. 간단한 신상 정보가 올라와 있다.
표지훈. 키 180cm. 몸무게 65kg. 사는 곳 서울시. 다른 쪽엔 위성 지도가 올라와 있다. 동그란 빨간 점을 '표지훈'이라는 글자가 둥둥 떠다니며 쫓고 있고. 다행히 아직까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위성지도에 쿡 박힌 빨간 점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과연 저 녀석, 지금 뭐하고 있을까. 2013년 당시 전 세계의 CCTV영상을 수신해 볼 순 있지만, 표지훈의 방에 CCTV가 달려 있을 리 만무하다. 지금 집에 있는 건 확실한데. 뭐, 공부라도 하고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나한테도 과제가 하나 있었지. 얼마 전에 이민혁이 준 예보 그래프. 위에 보고 안 했으니 조용히 알아봐 달라는 까다로운 부탁을 떠올리며 픽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민혁은 요새 예보 그래프 때문에 바쁘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보이질 않는다. 뭐지. 뭘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낙오자 발생 전후로 달라진 예보 그래프. 낙오자. 낙오자…. 불만 가득하던 표지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하기 힘들다. 낙오되면 어떤 기분이려나, 대체.
낙오되었다라.
쉬는 시간. 고작 15분이긴 하다만 휴게실에서 커피를 뽑고 잠시 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한참을 앉아 있어 뻣뻣이 굳은 몸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이내 사령실을 빠져나와 휴게실로 향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 어느새 나타난 박경이 뒤에서 '워'하며 놀래키는 시늉을 한다. 유치한 놈. 재밌냐? 내 반응에 실망했다는 듯 투덜거리며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낸 박경이다. 내 커피가 나오고 박경도 자판기에 동전을 넣은 뒤 버튼을 꾹 누른다.
"잠은 좀 잤냐?"
"아마도?"
"뭐야, 그게."
"어차피 내일 비번이라 상관없는데."
그 말에 박경이 푸하하 웃는다. 와, 잠 안 자면 죽는다던 우지호 어디갔냐? 그 말에 나는 작게 한 번 웃으며 '얼어 죽음'이라고 답하고는 커피를 홀짝였다. 박경도 커피를 들지만 종이컵에 쉽게 입을 대지 못하고 움찔거리며 몇 번이고 으, 뜨거하며 미간을 좁혀댔다. 어린애냐. 내가 킥 웃으며 말하자 날 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만 알 바는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고개를 돌렸고 그런 내 눈에 들어온 건 벽에 붙은 그림 한 점. 빛덩어리를 추상적으로 나타낸 그림이다, 라고들 하는데. 뭐. 가만히 그 그림을 바라보다가 커피를 한 번 홀짝였다.
"안 어울리지 않냐. 이런 곳에 그림?"
박경이 내 시선을 따라 그림을 보다가 킥킥 웃고 나는 글쎄? 하면서도 그림을 빤히 쳐다보았다. 누가 그렸을까. 그린 사람의 이름조차 나와 있지 않은 그림. 굉장히 오래됐다고 들었다. 20년 전 건물이 완공되고 나서 총장이 자신의 집에서 직접 가져온 그림. 누가 언제 그렸을지 모를 아주 오래된 그림이라 했더랬지. 시간 기술을 이용해 처음 그려졌을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한 그림은 굉장히 깔끔했다. 커다란 캔버스 위, 별다른 색 없이 그저 흰 빛 덩어리. 연하고 오묘한 색의 실오라기가 올라오는 빛덩어리의 그림은 그동안 고글을 끼고 봐온 그 거대한 빛덩이라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저걸 그린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그렸을까. 몇백 년 전이면, 아마 지금 복구하고 있는 시간이랑 비슷할 텐데."
"별 의미 없이 그렸겠지."
"그렇겠지?"
그 때 사람들이 시간이 뭔지 알 리가 없지. 서글서글 웃으며 이야기하는 박경을 바라보다가 종이컵을 고쳐 잡았다. 처음엔 마냥 뜨겁던 컵은 이제 점점 식어 따뜻하게 느껴지고 있다. 가만히 커피에서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 말야.
"시간이 좀 무섭단 생각을 한다."
내 말에 박경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 그동안 시간 복구할 땐 별 생각 없었거든."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이 마냥 가볍진 않단 걸 알았다는 듯 박경이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하지만 난 그 부담스러운 눈 대신 그림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꼭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었어, 지금까진. 화면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그 사람들의 일상 하나하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떤 생각을 하는 지도 알 수가 없었잖아."
그랬지. 박경이 수긍하며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여전히 뜨거운지 으뜨!하곤 입에서 컵을 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조금 웃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표지훈 걜 만나니까 실감이 나더라. 저 화면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내겐 그저 오래 전에 죽었을,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정작 내 앞에서 살아 숨 쉬는 그때의 사람을 보니까 실감이 났어. 시간이란 게 절대 단순한 게 아니란 걸."
"이봐요, 우지호 씨. 지금까지 굉장히 불성실한 태도로 일하셨네?"
박경이 장난스레 말했고, 나는 갑자기 긴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어 킥킥 웃었다. 불성실은 무슨, 실감이 안 나서 그랬지. 박경이 흠, 하고 그림을 빤히 바라보더니 편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 못하겠더라. 진짜 너무 먼 사람들이니까. 그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에서 낙오된다는 거. 몇백 년은 차이가 나는 곳의 사람이 내 앞에서 숨 쉬고 있고 서로 대화를 할 수 있고. 그 사람 말고도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화면 너머로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어."
"흠."
"인간에 의해 시간이 움직인단 게, 참."
어떨진 몰라도 좀 씁쓸하단 생각도 들어서. 내 말에 박경이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를 홀짝였다. 살짝 움찔하며 얼굴을 찡그리긴 했지만 마시는 데엔 성공. 입가에서 종이컵을 뗀 박경이 입술을 한 번 핥더니 입을 열었다.
"시간을 무사히 흐르게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어."
"누가, 뭐. 이 일 싫댔냐?"
"아니 뭐. 그런 거 아니더라도. 사실 인간이 시간을 움직인단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일임에 틀림 없지.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위험해져."
나도 알아. 안다니까. 괜히 투덜거리며 남은 커피를 모두 마셨다. 식도가 순간 따뜻해지는 기분. 이게 몸엔 좋지 않다고 하던데. 괜히 다른 생각을 하며 종이컵을 수거함에 넣다가 휴게실 밖 복도에서 다급히 뛰어가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어."
"왜?"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박경에게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난 방금 남자가 사라진 복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야, 왜. 아니라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옮겼다. 야, 같이 가! 단숨에 커피를 들이킨 박경이 읏뜨뜨하며 괴상한 소리와 함께 뒤를 쫓아왔고 나는 그런 박경을 모른 척 계속 걸었다. 같이 가자니까. 투덜거리며 뒤에서 다가온 박경이 내 어깨를 붙잡고, 나는 웃다가 이내 아까 그 뒷모습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내렸다.
방금 그거. 이민혁인데.
쉬는 시간이 끝나지 않았지만 다시 사령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쪽잠을 자는 사람도 있고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나름 쉬는 시간이라고, 조금 한산한 느낌이 든다. 그런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 구석을 차지한 위성지도. 여전히 아까 그 자리인 붉은 점. 문득, 이민혁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래프가 변동이 심하고 오류 일어날 가능성도 원래에 비해 두 배 이상 높게 나오고.
이대로라면 하루에 한 번 오류가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어요.
왜 갑자기 이게 생각난 거지. 갑자기 불안한 기분이 들어 초조하게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락펴락하다가 고개를 들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붉은 점. 위성지도. 수많은 화면들과 그 속의 사람들. 이게 뭐지. 잠깐만. 이민혁이 한 말은 계속 떠오르고, 아까 급히 뛰어가던 이민혁의 뒷모습까지 겹쳐진다.
설마, 아닐 거야.
쉬는 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모든 화면이 마비되었다. 갑자기 요란하게 멈추며 에러창을 띄우는 시스템.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려대고 버저가 붉게 빛이 난다. 쪽잠을 자던 사람들도 경보음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고 막 사령실로 들어오던 사람들도 놀라며 제자리로 뛰어간다.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쓰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발히 움직이고 있던 화면 속 사람들은 모두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마냥 움직이지 않는다.
"오류 발생!"
"현재 시각 8월 4일 15시 35분 49초. 시간이 멈췄습니다. 원인 불명의 오류!"
화면 속 붉은 점만이 홀로 외롭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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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하나 더 생겼네 냅둬야지 아래로 가세여 ^^/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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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료 생겼네요 신기하당 요즘 생각하는 게 글이 너무 답답한 감이 있어서 아예 좀 뜸하더라도 한꺼번에 여러편씩 올릴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건 제가 끈질기게 못 쓸 것 같더라구여 근데 뭔가 글이 너무 뻔하고 심심해...예상은 했지만 레알 쓰면서도 심심해요...막 다른 고민은 없는데 이게 너무 걸려...봐주시는 분들께서 재미없어 하실까봐ㅠㅠ 맘 같아선 이거 말고도 쓰고 싶은 게 여러 개 있어서 그것들 쓸까 싶지만 그것도 내가 쓰면 재미없을거야 난 이거나 써야지 사실 8월 쓰는 이유=제가 원하는 장면이랑 번외 쓰고 싶어서 근데 그것들도 심심해 걍 소소한 게 보고싶었나봐여 그래서 이런 똥글이 나왔나봐 왤케 잡솔이 기냐구여? 배고파서요 근데 뜬금없는데 타임 컨트롤 오거니제이션이면 시간 제어 기구인데 기구면 소장이 아니라 총장아니에여? 그래서 수정했어요 어려운 건 어려운 거야 쉬운 글은 없지만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