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님."
경이 머그컵을 건넸다. 태일이 '아'하고 머그컵을 조심스레 받아 살짝 손에 쥐었다. 적당히 따뜻한 온도의 컵을 바라보고 있던 태일이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강하게 휘날리는 눈 너머로 보이는 침엽수림. 경이 태일 옆의 의자에 털썩 앉아 자신의 손에 쥔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다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 태일을 보며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경. 박사님, 왜 그래요? 이태일? 이태이일.
"조용히 좀 해."
태일이 짜증스럽게 말하자 그제야 조용히 커피만 홀짝이는 경. 한참을 창 밖을 바라보다가 힐끗, 옆을 보니 조금 기가 죽은 듯 하다. 삐졌냐? 태일이 툭툭 치자 "됐네요"하고 말하는 경. 삐졌구나? 태일이 작게 한숨을 내뱉고 경의 머리를 툭툭 쳤다. 어린 아이가 신기한 동물을 쿡쿡 찌르는 것 처럼 검지 손가락만 들고 경의 머리를 쿡쿡. 삐졌냐? 삐졌어? 삐졌냐고! 이번엔 경이 신경질을 냈다. 아, 박사님! 그러자 태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잠시 바라본 창 밖은 새햐얬다.
미래괴담 외전
2061년. 지금은 2061년이다. 그리고 이 곳 러시아는 겨울. 두꺼운 점퍼 안에 가둔 몸이 조금은 갑갑하다. 4년 전 쯤, 한국에 있었던 연구소에선 항상 얇은 옷차림이었는데. 태일이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손으로 툭툭 쳤다. 담배를 끊은 이후에도 입가로 손을 가져가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고 항상 무의식 중에 입술을 만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린 손에 다시 주머니로 손을 넣은 태일.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공기에 잠시 몸을 떤 태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작년, 러시아 연구소에서 연락을 받고 경과 함께 온 낯선 나라. 한 때 광활한 지역에 걸쳐 서식하던 시베리아의 북방 침엽수림대. 오래전 사라져 현재는 원래의 10%정도만 남아있다. 연구소에서 태일을 부른 이유는 이런 이유였다. 4년 전, 2057년부터 미미하게 뻗어오는 에너지. 이 에너지에 대해 알아내야 한다는 것. 태일은 조용히 입술을 쓸었다. 러시아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다. 전세계 어디가 되건 자연이 남아있는 곳은 전부 에너지 반응이 있다고 하니. 일년 전에는 한국 X구역의 구름이 걷히는 일까지 일어났다. 뭔진 몰라도 큰 변화가 생기려 하는 것은 아닐까.
태일에게 2057년은, 모든 기억은 뭉텅 잘라먹고 '우지호'만 기억나는 해다. 또다시 치고 올라오는 우지호의 생각에 잠시 걸음을 멈춘 태일. 냉기가 감도는 복도. 멍하니 복도에 서있던 태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무거운 걸음을 옮겨 문을 열자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던 연구원 몇 명의 눈이 잠시 모아졌다가 다시 화면으로 돌아간다. 태일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가 앉은 태일이 또다시 한숨을 푹 내뱉고, 어느새 뒤로 다가온 경이 태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태일이 고개를 들자 히죽 웃는 경. 커피 마실래요?
"나 방금 막 휴게실 나온건데."
"뭐 어때요. 어차피 어제 일도 많이 했으니까 그냥 가요."
태일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고 경은 그런 태일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감고 웃었다. 태일은 잠시 이 팔을 어떻게해야 잘 부러뜨렸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을 하다가, 이내 그냥 힘을 풀고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구원들은 그런 두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자신들의 일에 집중하고 있다. 문을 열고 나온 복도의 찬 공기에 태일이 다시 몸을 웅크렸다.
휴게실. 태일은 조용히 휴게실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고 경은 자판기로 다가갔다. 눈이 날리던 며칠 전과 달리 차분하게 눈송이가 내려앉고 있는 창 밖의 풍경.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옆으로 경이 다가와 종이컵을 건네며 털썩 의자에 앉았다.
"다음 주에 탐사 나가는 거 알죠."
"알아."
후룩.
"뭣하러 그렇게 나가는건지 몰라. 귀찮아 죽겠어요. 얼어죽을 일 있나. 나가봤자 찾는 것도 없고 변하는 것도 없는데."
그럼 네 놈이 안 귀찮은 게 뭐냐. 숨 쉬는 건 안 귀찮아? 태일이 비아냥거리자 경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숨 참는 게 더 귀찮아서 숨 쉬는 거에요. 어쩐지 일리가 있는 말에 태일은 할 말을 잃었다.
"날씨 좋네요."
경의 말에 태일이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옆에 있던 러시아 연구원이 웃으며 경에게 장난을 걸었고, 경은 잠시 멍하니 그런 연구원을 바라보다가 이내 함께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태일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추운 날씨. 일주일 내내 오던 눈은 그친지 오래였다. 맑기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태일이 후, 하고 입김을 낸 뒤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런 태일을 본 경이 '같이 가요!'하고 얘기하고 있던 연구원을 내팽개치고 태일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파란 하늘 아래 무리지어 돌아다니던 사람들의 발은 눈 속에 파묻히며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다리 아파. 태일이 투덜거리며 한 손으로 가방 끈을 꼭 붙잡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느껴지던 묘한 기분.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러시아에 오고 나서 이어지던 단조로운 일상. 그런데, 대체 뭐가 있다고.
"잠깐 쉴까요, 이제."
누군가가 제안하고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 저마다 자리에 주저앉고, 몇몇은 보온병을 꺼내들고. 경이 기지개를 펴며 태일 쪽으로 다가왔다. 뭐해요. 안 쉬어요?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태일이 한 손을 들어 올린 채, 시선은 침엽수림 어딘가로 고정시켰다. 경이 왜 그래요?하고 묻는 순간, 태일의 눈이 커졌다.
순록이다.
태일의 낮은 중얼거림에 경의 눈도 커지고, 이내 시선을 태일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옮긴다. 가문비 나무들 너머로 작게 보이는 무언가. 천천히 걸어와 고개를 낮추는가 싶더니 휙 들어올려 이 쪽을 바라보는 것은 틀림없이 순록이었다. 태일이 부들부들 떨며 희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순록이 나타났어요. 그 말에 휴식을 취하고 있던 연구원들이 고개를 들고, 어디선가 낮은 탄성이 들려온다. 순록은 사람들 쪽을 바라보다가 휙, 나무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쫓아가!"
그 말과 동시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순록이 있던 자리까지 달려갔지만 당연히 사라진지 오래. 눈 위에 찍혀있는 발자국을 쫓아가기 시작한다. 멸종 위기 동물로 지정된 이후루도 꾸준히 개체 수가 줄어들어, 시베리아에서는 20년 전 이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순록. 그 순록이 지금 이 곳 타이가 지역에 나타났다. 태일은 누군가가 가슴을 억세게 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순록을 쫓았다.
"박사님, 박사님! 정신 차려요! 이태일!"
누군가가 뺨을 치고 있다. 태일이 인상을 쓰며 신음을 흘리자 '일어나요, 일어나'하고 다급하게 태일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는 남자. 태일이 눈을 뜨니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이 보인다. 뭐지. 지금 여긴 어디지. 경이 '일어났다'하고 한숨을 푹 내쉰다.
"정신이 좀 들어요?"
"여기, 가 어디야."
"어디긴요. 기억 안 나요?"
글쎄. 날 것도 같고 안 날 것도 같고.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 태일. 함께 있던 열 명의 연구원들은 다 어디갔는지 경과 자신만이 남은 모습에 의아한 모습이다. 그런 모습에 경은 또 한숨을 푹. 진짜 기억 안 나요? 바보네, 진짜. 그러면서도 설명을 해주는 경이다.
"눈사태 나서 다 흩어졌잖아요."
"뭐? 눈사태?"
"그래서 피하다가 박사님 경사에서 미끄러지셔서 기절하신 거에요."
그 말에 태일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어쩐지 온 몸이 뻐근하더라니. 멍이라도 든 건지 욱신거리는 다리 쪽을 조심스럽게 만지던 태일이 고개를 들었다. 통신 시도 해봤어? 여기서 죽치고 있을 수도 없잖아. 그 말에 경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아니요. 통신 장비 다 고장났어요. 아까 박사님 굴러 떨어질 때 튕겨 나갔는데. 아, 알았어. 그만 말해. 기분이 팍 상한 태일이 손을 휘휘 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어쩌지.
"태일아."
"어디서 반말이야."
"해 지기 전에 잘 곳부터 마련해요. 오늘 돌아가기는 글렀어."
그 말에 조용히 타오르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태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을 파 작게 설동을 만들고 그 안에서 하루를 지내고. 나침반도 뭣도 없는 상황에서 길을 찾아 돌아가기란 힘든 일이었다. 눈사태 덕분에 흩어진 연구원들과는 연락할 방법도 없었고 그나마 희망을 걸었던 발자국들은 밤 사이 내린 눈에 가려졌다. 태일과 경은 둘이서 침엽수림을 헤메야 했다. 얼마 남아있지 않던 식량은 야껴 먹는다고 아껴 먹었지만 다 떨어져 버렸고, 눈을 끓인 물로 배를 채워야 했다.
"강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을텐데. 물고기라도 잡게."
"꿈 깨요. 지금 남아있는 침엽수림에 강은 없어요."
"너 갈 수록 말투가 싸가지 없어진다."
태일이 투덜거리던 그 때, 경이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덕분에 혼자 나서 걷고 있는 꼴이 된 태일이 뒤를 홱 돌아 '뭔데!'하고 신경질을 팍. 경이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저 너머를 가리켰다. 저거 봐요. 이에 태일이 눈을 가늘게 뜨고 경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뭔가 반짝인다.
"설마. 강?"
"설마요."
하지만 가까이 갔을 때 보인 것은 단단히 얼어있는 꽤 큰 크기의 강이었다. 멍하니 얼어있는 수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발을 디딘 태일. 단단한 얼음은 '턱'소리를 낼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얼굴을 때리는 찬 공기에 잠시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서 있던 태일이 자세를 낮춰 장갑을 낀 손으로 꽁꽁 언 강을 만졌다. 꽁꽁 얼어서 웬만해선 깨질 것 같지 않다. 태일이 서로 달라 붙어있던 입술을 떼었다. 박경.
"현재 남은 침엽수림은, 2000년도와 비교해서 그 전체의 10%뿐이 안 돼. 맞지."
"네."
"그리고 그 침엽수림에 강은 없어. 덕분에 타이가에서 살던 동물들도 살기 힘들어진 환경이 되서 꽤 많은 동물이 멸종 위기 개체로 지정되었어."
"그렇죠."
"근데 이 강은 뭐지."
"글쎄요."
경도 태일도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넓은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 근처에 다시 설동을 만들고, 그 안에 웅크려서 있었다. 태일은 초조하게 장갑을 벗은 손의 손톱을 계속해서 깨작거렸고 경은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나, 태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박경. 왜요.
"나 잘래."
"주무세요."
태일이 천천히 침낭으로 몸을 구겨넣고, 눈을 감아버렸다. 물을 마시던 경의 모습이 사라지고 완전한 어둠만이 남았다. 캄캄해. 태일이 작게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웅크렸다. 여전히 눈 앞에선 강이 어른거렸다. 도대체, 왜지? 그 강은 어디서 튀어나온거지.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태일이 앓는 소리를 내자 경이 몸을 끌어 '괜찮아요?'하고 묻고 태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정말 그런거면?
남아있는 침엽수림에 강이 생긴 것이 아니라, 침엽수림이 강이 있는 곳까지 회복된 것이라면?
둘 중 현실성이 있는 것은 없었다. 밤새 뒤척이다가 결국 몸을 일으켜 짜증스럽게 침낭을 빠져나온 태일은 눈으로 막아둔 입구를 발로 차 뚫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찬 바람이 불어온다. 설동 안으로 바람이 들어가면, 글쎄.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을 박경은 좀 추울 것도 같은데. 어차피 금방 들어갈 거니까. 무심한 얼굴로 설동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본 태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극광?
보라빛의 오묘한 빛이 펼쳐진 하늘. 평소엔 하늘을 잘 보지 않아서 볼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왜 사람들이 그렇게 오로라 오로라 거리는지 알 것도 같았다. 예쁘네.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태일이 시선을 가문비 나무로 옮겼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순록까지. 잠깐, 순록? 태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태일이 잠시 그 자리에 굳어 있었고, 순록은 태일이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서 있을 뿐이다. 태일이 천천히 발을 내밀었다. 눈이 콰드득 밟히며 발 끝에서 부서지고, 점점 걸음이 급해지고 있다. 어느정도 가까이 갔을 때, 순록은 신비롭게 빛나는 하늘 아래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기다려!"
다급하게 소리를 내지르는 태일을 바라보던 순록은 푸륵,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쫓는 태일은 꼭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으, 기다려. 기다려, 제발. 가지 마. 흐엉, 가지 마. 뭔가를 쫓는 어린아이처럼 그만 눈물을 톡 터뜨린 태일이 한 쪽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신은 숨이 차오르게 뛰고 있지만 순록은 여유로웠다. 그런데도 잡히질 않는다.
"가지 마."
날 두고 가지 마.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강이 나왔다. 낮에 왔던 강은 밤이 되니 또 다른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부드럽게 빛나는 하늘. 얼어붙은 수면은 그 빛 때문일까 묘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태일이 잠시 멈춰서서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고, 눈물을 닦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것은 강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순록이었다.
순록이 천천히 걸어가 강의 가운데에 섰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순록의 털을 쓰다듬고 있는 아이 한 명. 순록이 잠시 아이의 손에 몸을 맡기는가 싶더니, 천천히 사라졌다. 공기 중으로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일의 시선은 순록이 있던 곳에서 그 옆에 있는 아이에게로 옮겨갔다. 무릎 위까지 오는 흰 옷을 입은 아이. 빛 아래에서 신비롭게 빛나는 머리칼. 순록을 쓰다듬느라 잠시 빠져나와 있는 흰 손목. 저건, 저건. 저 애는, 저 앤 분명히...
"우지호."
눈이 잔뜩 붙은 신발이 강 위를 디뎠다. 잠시 미끌,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태일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에게로. 점점 아이와 가까워지고 있었고, 태일의 걸음은 빨라지고 있었다. 몇 번이고 미끄러지던 태일은, 결국 아이에게 가까워졌을 때 털썩 넘어지고 말았다. 단단한 얼음으로 쾅, 부딪힌 무릎. 태일이 '아!'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파. 고통을 호소하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눈 앞으로 흰 손이 튀어나왔다. 고개를 든 태일의 눈 앞에, 오묘한 빛으로 빛나는 하늘을 배경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우지호, 너. 우지호."
태일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부들부들 떨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고, 중심을 잡은 뒤에야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지호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옛날과 다를 바 없이 그대로인 지호. 변한 것은 저 혼자인 듯 했다. 태일이 흐, 하고 흐느끼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태일."
"우지호, 우지호, 네가 왜. 네가 왜 여기에...으, 흐."
"다시 살려낼거야."
그 말에 태일이 눈물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지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되돌릴거야. 그러니까, 기다려줘. 다시 만나자."
태일은 잠시 멍하니 지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다릴게. 태일이 지호의 손을 힘을 주어 잡고, 이내 지호는 태일을 끌어 안고 등을 토닥였다. 꼭 아이를 달래듯. 가만히 지호를 안고 있던 태일이 이내 지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제는, 이제는 내가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어. 꿈처럼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태일은 눈을 감았다.
"이태일!"
경이 강 위로 뛰었다. 발이 주륵 미끄러졌지만 개의치 않고 강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올려다 보는 태일에게 달려간 경. 태일이 천천히 고개를 틀어 경을 마주하고,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푸하하. 박경. 박경, 저거 봐. 태일의 손가락이 하늘로 올라가고, 경의 눈도 하늘로 올라갔다. 오로라. 극광으로 인해 신비롭게 빛나는 하늘. 누군가 밤하늘에 살아있는 물감을 뿌린 것만 같다. 가만히 하늘을 보던 경도 천천히 자세를 낮추고, 어느새 태일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태일의 입에서 또다시 아이같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봐."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하는 눈.
"눈꽃이야."
"대체 그건 뭐였을까요. 아직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창 밖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연구소장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태일이 킥, 웃음을 흘렸다. 그런 태일에게 연구소장도 웃음을 보였다. 한국말, 잘 하시네요? 네. 예전에 복수전공했습니다. 약간은 어색한 듯 하지만 유창한 한국어. 연구소장은 침엽수림이 끝없이 뻗어져 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이태일 박사님. 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묘한 힘이 뭐였는지 아직도 알 수 없지만, 대체 왜 침엽수림이 완전히 회복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태일이 천천히 뒤로 발을 뺐다. 차가운 유리에서 손을 떼고 그대로 뒤로 물러난 태일이 웃으며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어 옆에 있는 의자에 걸었다. 어느새 고개를 돌려 그런 태일을 바라보고 있던 연구소장의 얼굴에 인자한 웃음이 떠올랐다.
"확실한 것은. 자연이 자정 능력을 잃었다는 것은 틀린 것 같군요."
거기까지였다. 태일과 연구소장은 악수를 했고, 연구소장은 잘 가라며 인사를 해주었다. 태일도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뒤 문을 열고 나왔고, 차가운 복도를 걸어가는 발걸음은 예전처럼 무겁지도 않았고 추위에 떨려오지도 않았다. 모두들 여유로운 듯 하면서도 따뜻한 자신의 자리를 떠날 생각을 않는 연구원들 덕분에 항상 자신의 차지였던 휴게실로 들어간 태일. 휴게실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 김이 올라오는 머그컵을 입에 대고 있는 남자. 태일이 옆에 앉자 눈으로 인사를 한다. 태일도 고개를 끄덕인 후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박경."
"네."
구조되고 난 태일과 경은 연구소에 도착하자마자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침엽수림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 말에 태일은 자신이 했던 생각이 맞다는 점에서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아마 이를 '우지호'가 이룬 것이라는 점이었겠지.
"한국 가자."
"..."
그 말에 경이 입술을 꾹 붙이고 있던 머그컵을 떼내였다. 무거울 법도 한데 그대로 손에 꼭 쥐고 있는 모양. 태일이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보고 싶은 사람도 많잖아. 그리고."
창 밖으론 여전히 눈꽃이 내리고 있다.
"다시 한 번, 서울 가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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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번외 요청해주셔서...저도 사실 쓰고는 싶었는데 본편에 방해가지 않을까 해서 안 쓰고 있었는데 그냥 썼어요 근데 역시 너무 급하게 써서 그런가 개똥;;화남;;;왤케 뚝뚝 끊어지지...괜히쓴듯여 그렇다고 합니다...아마 내일은 멜링이 가지 않을까 싶네여 느려터진 작가를 매우 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