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이 있는 작품입니다. 아래 링크로 들어가 먼저 보고 오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 https://www.instiz.net/writing?no=3247790&page=2&k=%EC%86%8C%EC%84%B8%EC%A7%80%EB%B9%B5&stype=4&se=1 )
시즌 2 첫 화는 아래 링크로 들어가 주세요!
( https://www.instiz.net/writing?no=3515224&page=1&category=3 )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그때 네가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네가 찬란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네가 날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우린 후회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
#86 듣기론..
아주 오래전 바다에 살던 윤엄마를 뭍으로 나올 수 있게 도와준 홍아빠 덕에 둘은 원래 친했다고 들었다. 승철아저씨와 마녀언니랑은 오다가다 알게 된 사이라 들었다. 그땐 잘 지냈다고 항상 말씀하시던 홍아빠였으니 지금 이렇게 이상한 수를 꿈꾸는 마녀언니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거다.
"아.. 말해드릴 걸.. 이건 내 탓이야."
일찍 퇴근하고 들어온 홍아빠가 자책을 하며 머리를 감쌌다. 그런 홍아빠 탓이 아니라며 승철아저씨 탓으로 넘긴 윤엄마 또한 웃음기 없는 표정인 것으로 보아 사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둘이서만 이야길 하고 우리에게는 조금도 말해주지 않는 탓에 이해가 안 되는 와중에 석민이가 물었다.
"거기서 무슨 일 있었어?"
"응. 저번에 마녀가 저주 걸었을 때 지수가 또 오기 귀찮아서 깃털 3개 정도 뽑아주고 왔다고 했거든. 근데 그걸 마녀가 훔쳐갔대."
순간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그래봤자 별 일 아니겠거니 걱정 없던 승관이마저 멈춰버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던 거실엔 승관이가 마시던 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너도나도 소란스러워졌다.
"설마.. 아, 아니겠지."
"그걸, 그걸? 에이.. 아니겠지. 바람에 날려 굴러 떨어진 거겠지."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전화 좀 하고 올게."
지훈님이 휴대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고 남겨진 우리는 불안해하는 홍아빠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적어도 그 분은 우리를, 해치진 않을 거잖아. 괜찮아.."
"아니, 그걸, 뭐, 그냥 가져갔을 수도 있지! 그냥, 진짜 예뻐서! 그래, 예뻐서 가져갔을 수도 있지."
"맞아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사실 우리도 안다. 걱정할만한 일이 일어나긴 일어날 것이란 걸. 다만, 한 가지 믿을만한 구석은.. 승관이 말대로 적어도 우린 안전하다는 것. 그러나 승철아저씨네는 또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었다. 빛나는 깃털은 모든 금기된 물약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기초라고 한다. 금기된 물약을 만들려면 꼭 들어가야 하는 기본 중에 기본이라는 거다. 또 다른 기본 재료인 악마의 뿔 조각이 들어갈 텐데, 그렇게 되면 물약제조에 악마의 재능이 들어가게 돼 자칫 화를 불러올 수 있어서 중화시키기 위한 천사의 깃털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마녀들의 약초학이었다. 이것도, 사실 마녀언니가 알려준 거긴 한데.. 불안함은 걷잡을 수 없었다. 아니, 윤엄마가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에 우리의 불안감은 배가 되어 덮쳐왔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야. 여태까지 지수가 깃털을 안 준 이유가 뭔데. 혹시라도, 혹시라도 걔가 진짜로 승철이를 죽일까봐.. 언젠가 다시 살아나는 그 죽음이 아니라, 정말로, 다시는 볼 수 없게 죽일까봐.. 그게 걱정되는 거잖아."
"...아, 분홍색 물약.. 그거 만드는데 깃털이 필요한 거였어?"
"다른 것도 필요한 것 같은데.. 아마 그건 쉽게 구했겠지. 돈 주면 깃털 줄 거냐고 물어보더니 몇 년 후에 팔천만원 가까이 가져왔던 앤데.."
"그 정도야 뭐..."
"80년 전이야."
윤엄마의 말을 들으니 사단이 나긴 날 모양이었다. 그 시대에 팔천만원이면.. 아.. 막아야겠다. 이번엔 무조건 막아야겠다. 마녀언니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훈님께 듣자하니 마녀언니가 사랑하던 아이였다고 한다. 그런 아이를 언니 손으로 죽이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안 괴로울 리가 없다. 방법을 찾아보고 싶은데, 뭘 아는 게 있어야 방법을 찾지... 윤엄마나 홍아빠는 뭐라도 알지 않을까?
"그.. 이번엔 막아 봐요."
"우리라곤 안 해봤을까. 우리 말을 들을 애였으면 그때 들었어야했어. 그 아이가 처음 죽은 그날부터, 우린 말렸단 말이야."
홍아빠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아주 옛날부터 친했던 사이였으니 안했을 리가 만무하겠구나. 그럼.. 그들은 또 같은 날을 반복하겠네.. 또, 나의 친구가 죽고, 승철아저씨는 몇 년 간 집안에 갇혀 살다가 또, 친구를 찾겠지. 환생한 친구를 세 번째 맞이하는 나는 차라리 이젠 만나지 말까 싶다가도 막상 친구가 살아났다고 하면 달라진 얼굴과 성격에도 따뜻했던 그 향이 익숙해서 본능적으로 끌리는데.. 아저씨는 오죽할까..
"안 받아. 방금 껐나봐. 이젠 꺼져있다 그래."
아.. 애달프다. 반복되는 삶에 모든 것을 후회할 만도 한데 승철아저씨는 언제나 그럴 줄 알면서도 그 길을 또 걷는구나.
#87 다정한 게 최고야
우리끼리 백날 이야기를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마녀언니는 빛나는 깃털을 가져간 후였고 왜 그랬냐 찾아가서 따진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아주 만약 승철아저씨가 죽게 되면 지훈님께서 손을 써주기로,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고 보면, 마녀들을 통하면 우리같은 존재들도 죽을 수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지훈님도 마녀언니에게 그 물약을 부탁했던 거겠지.. 아, 문득 불안해졌다. 분명 아까 안심하라는 듯 웃어주긴 했지만.. 불안감은 금방 또 나를 잡아먹었다. 방에서 나와 지훈님 방으로 바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있던 지훈님과 바로 눈이 마주쳤고 난 뒤늦은 노크를 했다. 슬쩍 웃은 지훈님이 의자를 돌려 나를 보더니 물었다.
"무슨 일이야?"
"불안해서요.."
"뭐가? 또 걔가 죽을까봐? 내가 빼내줄게. 나 그 정도 능력은 돼."
"그게 가능해요?"
"응.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게 아니거든, 내가."
"아... 아, 근데 그게 불안한 게 아니에요. 아, 물론 그것도 불안하긴 한데.."
"응?"
"지훈님이, 지훈님이 또, 죽고 싶어 할까봐.. 영영 떠날까봐.."
아, 정말 그렇게 되면 내 모든 것이 공허해질 것 같았다. 몇 십 년을 돌고 돌아 힘들게 만난 사이인데, 그동안 마음고생도 너무 심했는데 갑자기 지훈님이 사라진다면, 그것만큼 버티기 힘든 게 있을까 싶다. 다신, 볼 수 없다는 거잖아. 정말, 다시는... 지훈님이 갑자기 일어나선 내 손을 잡았다. 놀라서 바라보니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눈빛으로 다정하게 말하시는 거였다.
"그럴 일 없어. 너 두고 내가 어디를 가."
다정한 지훈님은 정말 심장에 해롭다. 또 세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에 평화를 찾으려 눈을 감고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소리 나게 웃은 지훈님이 내 뒤에 문을 닫았고 그 소리에 또 놀라 지훈님을 보았다. 여전히도 잡고 계시는 그 손을 다정하게 쓸어준 지훈님이 날 끌었다. 지훈님이 침대에 걸터앉았고 잡고 있던 손을 당기는 바람에 나도 그 옆에 앉게 되었다. 영문을 몰라 지훈님을 바라보니 지훈님도 나를 바라보는 거였다. 어.. 잘생겼다. 정말.. 너무 잘생기셨다.
#88 그때의 우린
감탄하고 있는 나에게 지훈님은 아까의 그 다정한 말투로 말하셨다.
"내가 처음 그 분을 찾아간 건 딱 지금 너 나이였을 때였어."
"......"
"저승사자는 생각보다 더 많은 후회를 뒤집어쓰고 있거든. 그럴 수밖에 없었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후회로 시작하고 후회로 끝났거든."
"......"
"그러다 그 분을 알게 된 거야. 그 분이 독약을 가지고 있대. 바보같이 그땐 그걸로 죽을 수 있을지 알았어. 그래서 찾아가니 아까 말했듯 죽을 만큼 괴롭고 싶으면 사랑을 하라고 하더라고. 사랑이 힘들면 눌러 담으라고 하고."
"...그래서 사랑을 하셨나요?"
"아니. 눌러 담았어. 후회만 있는 그곳에서 사랑을 어떻게 하겠어. 그래서 계속 눌러 담았지. 눌러 담다 보니까 살아지더라고."
그때가 생각났는지 잠깐 눈을 감은 채 몸을 떤 지훈님이 갑자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셨다. 영문을 몰라 지훈님을 바라보니 그러다 나를 만났다고 한다.
"그 분이 갑자기 나에게 너를 잘 돌봐주라고 했어. 오랜만에 온 연락이 불안한 한편으론 의문이었지. 항상 네 친구만 돌봐주라고 했던 분인데 갑자기 너를 돌봐달라고 하니까."
"......"
"넌 그곳에서 나와 무엇을 했을 것 같아?"
어... 정말 죄송하게도 난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번에 물어보러 갔을 때 안 가르쳐 준다고 하셨으면서 오늘은 가르쳐줄 모양이었다. 너무 궁금했는데 잘됐다 싶어서 우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니 지훈님이 검지만 쫙 펼치더니 웃음기 섞인 말투로 이야기를 해주셨다.
"일단 첫 번째로 김민규에게 악담을 퍼부었어. 결국 민규 손에 죽어서 네 친구가 왔었거든."
"아..."
"두 번째로 너를 살리지 말고 네 친구를 살려달라고 나에게 애원했어."
"네?"
"세 번째로 그럼에도 넌 민규를 좋아한다고 했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일단 그 당시의 나는 민규에게 악담을 퍼부었었던 것부터 민규의 손에 내 친구가 죽어서 왔다는 것도... 아니 걔는...! 아, 이런 거였구나. 바로 이해가 되었다. 내 친구를 살린 건 이해가 됐다. 민규때문에 죽어서 온 것이니 내가 얼마나 미안했겠어.. 아니 근데, 그때의 나는 민규를 좋아했단 말이야? 내 친구를 죽인 민규를... 좋아했겠구나... 그렇지... 우리는, 찬란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했겠지. 민규와의 찬란했던 때가 재생되기 직전 지훈님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자신 말고 남을 살리라고 한 건 네가 처음이었어. 그 다름에서 난 사랑을 시작했나봐. 짝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진짜 죽을 만큼 괴롭더라고."
"아..."
"그 즈음에 다시 그 분을 찾아갔었어. 즉사의 물약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그래서 찾아갔더니 원래 사랑이 그렇대. 모든 게 후회로 남다가도 돌이켜 보면 추억이라 또 버틴대. 이제 못 버티겠다니까 50년 후에 다시 오라는 거야."
"......"
"50년 후에 깨달았지. 정말 돌이켜 보면 추억이라 또 버티는 구나. 너가 나에게 저승사자님이 아닌 지훈님으로 처음 부른 그 순간으로 하루, 아무것도 안 먹는 내가 걱정된다며 자신이 먹을 고기의 반 이상을 툭 잘라주는 너에 일주일, 너를 생각하며 만든 나의 노래를 좋다고 해주는 너에 한달, 악몽을 꿨다며 내 품으로 달려드는 너에 1년."
와... 지금 이 말을 하고 계신 게 지훈님이 맞는 거겠지? 다정하게도 쓸어주는 손 느낌이 너무 생생해 이게 현실이 맞다는 것을 아는데도 아득하기만 하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내가 지훈님을 좋아하기 전부터 지훈님은 나를 좋아하고 계셨구나.. 진짜, 지훈님이 너무 좋다.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를 해주는 지훈님이 너무 좋아서 지훈님 손을 놓고 그대로 끌어안았다. 당황한 듯 가만있던 지훈님도 나를 끌어안고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곧 지훈님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일 없어."
이제야 안심이 된다. 다행이다. 그럴 일 없어서. 마음이 놓이니 지금 내가 누구에게 안겨있는지 깨달았다. 예전에 상상조차 못할 일인데.. 지훈님이 또 새삼 좋아 꼭 끌어안는데 갑자기 사레들릴 만한 걸 물어보셨다.
"넌 김민규랑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네?"
"너가 기억하던 걔와의 추억은 죄다 찬란했다고 하니까 궁금해서. 뭐가 널 그렇게 기분 좋게 했을까 싶은 것도 있고.."
"아..."
그러게, 나 그를 어떻게 만나게 됐더라.
#89 어떻게 만나게 됐더라
아주 예전에 나는 인간을 먹는 것이 너무 겁이 났다. 다른 짐승들에 비해 느리기도 해서 가장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먹잇감이 인간이었으나 그들은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산짐승을 잡아먹기엔 나 자체가 산짐승보단 느리고 굼떠 도저히 사냥을 성공할 수가 없었다. 아, 이대로 굶어 죽겠구나 싶은 그때 나타난 것이 민규였다. 희미해지는 시야 사이로 민규가 보였고 눈을 떠보니 윤엄마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있는지도 모르겠고, 당시엔 윤엄마가 인간인 줄 알고 인간이 왜 날 간호하고 있는지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대충 손톱만 빼고 그를 위협했으나 그는 전혀 위협을 받지 않는 듯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말해드릴 걸.. 이건 내 탓이야."
일찍 퇴근하고 들어온 홍아빠가 자책을 하며 머리를 감쌌다. 그런 홍아빠 탓이 아니라며 승철아저씨 탓으로 넘긴 윤엄마 또한 웃음기 없는 표정인 것으로 보아 사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둘이서만 이야길 하고 우리에게는 조금도 말해주지 않는 탓에 이해가 안 되는 와중에 석민이가 물었다.
"거기서 무슨 일 있었어?"
"응. 저번에 마녀가 저주 걸었을 때 지수가 또 오기 귀찮아서 깃털 3개 정도 뽑아주고 왔다고 했거든. 근데 그걸 마녀가 훔쳐갔대."
순간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그래봤자 별 일 아니겠거니 걱정 없던 승관이마저 멈춰버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던 거실엔 승관이가 마시던 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너도나도 소란스러워졌다.
"설마.. 아, 아니겠지."
"그걸, 그걸? 에이.. 아니겠지. 바람에 날려 굴러 떨어진 거겠지."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전화 좀 하고 올게."
지훈님이 휴대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고 남겨진 우리는 불안해하는 홍아빠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적어도 그 분은 우리를, 해치진 않을 거잖아. 괜찮아.."
"아니, 그걸, 뭐, 그냥 가져갔을 수도 있지! 그냥, 진짜 예뻐서! 그래, 예뻐서 가져갔을 수도 있지."
"맞아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사실 우리도 안다. 걱정할만한 일이 일어나긴 일어날 것이란 걸. 다만, 한 가지 믿을만한 구석은.. 승관이 말대로 적어도 우린 안전하다는 것. 그러나 승철아저씨네는 또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었다. 빛나는 깃털은 모든 금기된 물약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기초라고 한다. 금기된 물약을 만들려면 꼭 들어가야 하는 기본 중에 기본이라는 거다. 또 다른 기본 재료인 악마의 뿔 조각이 들어갈 텐데, 그렇게 되면 물약제조에 악마의 재능이 들어가게 돼 자칫 화를 불러올 수 있어서 중화시키기 위한 천사의 깃털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마녀들의 약초학이었다. 이것도, 사실 마녀언니가 알려준 거긴 한데.. 불안함은 걷잡을 수 없었다. 아니, 윤엄마가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에 우리의 불안감은 배가 되어 덮쳐왔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야. 여태까지 지수가 깃털을 안 준 이유가 뭔데. 혹시라도, 혹시라도 걔가 진짜로 승철이를 죽일까봐.. 언젠가 다시 살아나는 그 죽음이 아니라, 정말로, 다시는 볼 수 없게 죽일까봐.. 그게 걱정되는 거잖아."
"...아, 분홍색 물약.. 그거 만드는데 깃털이 필요한 거였어?"
"다른 것도 필요한 것 같은데.. 아마 그건 쉽게 구했겠지. 돈 주면 깃털 줄 거냐고 물어보더니 몇 년 후에 팔천만원 가까이 가져왔던 앤데.."
"그 정도야 뭐..."
"80년 전이야."
윤엄마의 말을 들으니 사단이 나긴 날 모양이었다. 그 시대에 팔천만원이면.. 아.. 막아야겠다. 이번엔 무조건 막아야겠다. 마녀언니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훈님께 듣자하니 마녀언니가 사랑하던 아이였다고 한다. 그런 아이를 언니 손으로 죽이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안 괴로울 리가 없다. 방법을 찾아보고 싶은데, 뭘 아는 게 있어야 방법을 찾지... 윤엄마나 홍아빠는 뭐라도 알지 않을까?
"그.. 이번엔 막아 봐요."
"우리라곤 안 해봤을까. 우리 말을 들을 애였으면 그때 들었어야했어. 그 아이가 처음 죽은 그날부터, 우린 말렸단 말이야."
홍아빠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아주 옛날부터 친했던 사이였으니 안했을 리가 만무하겠구나. 그럼.. 그들은 또 같은 날을 반복하겠네.. 또, 나의 친구가 죽고, 승철아저씨는 몇 년 간 집안에 갇혀 살다가 또, 친구를 찾겠지. 환생한 친구를 세 번째 맞이하는 나는 차라리 이젠 만나지 말까 싶다가도 막상 친구가 살아났다고 하면 달라진 얼굴과 성격에도 따뜻했던 그 향이 익숙해서 본능적으로 끌리는데.. 아저씨는 오죽할까..
"안 받아. 방금 껐나봐. 이젠 꺼져있다 그래."
아.. 애달프다. 반복되는 삶에 모든 것을 후회할 만도 한데 승철아저씨는 언제나 그럴 줄 알면서도 그 길을 또 걷는구나.
#87 다정한 게 최고야
우리끼리 백날 이야기를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마녀언니는 빛나는 깃털을 가져간 후였고 왜 그랬냐 찾아가서 따진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아주 만약 승철아저씨가 죽게 되면 지훈님께서 손을 써주기로,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고 보면, 마녀들을 통하면 우리같은 존재들도 죽을 수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지훈님도 마녀언니에게 그 물약을 부탁했던 거겠지.. 아, 문득 불안해졌다. 분명 아까 안심하라는 듯 웃어주긴 했지만.. 불안감은 금방 또 나를 잡아먹었다. 방에서 나와 지훈님 방으로 바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있던 지훈님과 바로 눈이 마주쳤고 난 뒤늦은 노크를 했다. 슬쩍 웃은 지훈님이 의자를 돌려 나를 보더니 물었다.
"무슨 일이야?"
"불안해서요.."
"뭐가? 또 걔가 죽을까봐? 내가 빼내줄게. 나 그 정도 능력은 돼."
"그게 가능해요?"
"응.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게 아니거든, 내가."
"아... 아, 근데 그게 불안한 게 아니에요. 아, 물론 그것도 불안하긴 한데.."
"응?"
"지훈님이, 지훈님이 또, 죽고 싶어 할까봐.. 영영 떠날까봐.."
아, 정말 그렇게 되면 내 모든 것이 공허해질 것 같았다. 몇 십 년을 돌고 돌아 힘들게 만난 사이인데, 그동안 마음고생도 너무 심했는데 갑자기 지훈님이 사라진다면, 그것만큼 버티기 힘든 게 있을까 싶다. 다신, 볼 수 없다는 거잖아. 정말, 다시는... 지훈님이 갑자기 일어나선 내 손을 잡았다. 놀라서 바라보니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눈빛으로 다정하게 말하시는 거였다.
"그럴 일 없어. 너 두고 내가 어디를 가."
다정한 지훈님은 정말 심장에 해롭다. 또 세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에 평화를 찾으려 눈을 감고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소리 나게 웃은 지훈님이 내 뒤에 문을 닫았고 그 소리에 또 놀라 지훈님을 보았다. 여전히도 잡고 계시는 그 손을 다정하게 쓸어준 지훈님이 날 끌었다. 지훈님이 침대에 걸터앉았고 잡고 있던 손을 당기는 바람에 나도 그 옆에 앉게 되었다. 영문을 몰라 지훈님을 바라보니 지훈님도 나를 바라보는 거였다. 어.. 잘생겼다. 정말.. 너무 잘생기셨다.
#88 그때의 우린
감탄하고 있는 나에게 지훈님은 아까의 그 다정한 말투로 말하셨다.
"내가 처음 그 분을 찾아간 건 딱 지금 너 나이였을 때였어."
"......"
"저승사자는 생각보다 더 많은 후회를 뒤집어쓰고 있거든. 그럴 수밖에 없었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후회로 시작하고 후회로 끝났거든."
"......"
"그러다 그 분을 알게 된 거야. 그 분이 독약을 가지고 있대. 바보같이 그땐 그걸로 죽을 수 있을지 알았어. 그래서 찾아가니 아까 말했듯 죽을 만큼 괴롭고 싶으면 사랑을 하라고 하더라고. 사랑이 힘들면 눌러 담으라고 하고."
"...그래서 사랑을 하셨나요?"
"아니. 눌러 담았어. 후회만 있는 그곳에서 사랑을 어떻게 하겠어. 그래서 계속 눌러 담았지. 눌러 담다 보니까 살아지더라고."
그때가 생각났는지 잠깐 눈을 감은 채 몸을 떤 지훈님이 갑자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셨다. 영문을 몰라 지훈님을 바라보니 그러다 나를 만났다고 한다.
"그 분이 갑자기 나에게 너를 잘 돌봐주라고 했어. 오랜만에 온 연락이 불안한 한편으론 의문이었지. 항상 네 친구만 돌봐주라고 했던 분인데 갑자기 너를 돌봐달라고 하니까."
"......"
"넌 그곳에서 나와 무엇을 했을 것 같아?"
어... 정말 죄송하게도 난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번에 물어보러 갔을 때 안 가르쳐 준다고 하셨으면서 오늘은 가르쳐줄 모양이었다. 너무 궁금했는데 잘됐다 싶어서 우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니 지훈님이 검지만 쫙 펼치더니 웃음기 섞인 말투로 이야기를 해주셨다.
"일단 첫 번째로 김민규에게 악담을 퍼부었어. 결국 민규 손에 죽어서 네 친구가 왔었거든."
"아..."
"두 번째로 너를 살리지 말고 네 친구를 살려달라고 나에게 애원했어."
"네?"
"세 번째로 그럼에도 넌 민규를 좋아한다고 했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일단 그 당시의 나는 민규에게 악담을 퍼부었었던 것부터 민규의 손에 내 친구가 죽어서 왔다는 것도... 아니 걔는...! 아, 이런 거였구나. 바로 이해가 되었다. 내 친구를 살린 건 이해가 됐다. 민규때문에 죽어서 온 것이니 내가 얼마나 미안했겠어.. 아니 근데, 그때의 나는 민규를 좋아했단 말이야? 내 친구를 죽인 민규를... 좋아했겠구나... 그렇지... 우리는, 찬란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했겠지. 민규와의 찬란했던 때가 재생되기 직전 지훈님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자신 말고 남을 살리라고 한 건 네가 처음이었어. 그 다름에서 난 사랑을 시작했나봐. 짝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진짜 죽을 만큼 괴롭더라고."
"아..."
"그 즈음에 다시 그 분을 찾아갔었어. 즉사의 물약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그래서 찾아갔더니 원래 사랑이 그렇대. 모든 게 후회로 남다가도 돌이켜 보면 추억이라 또 버틴대. 이제 못 버티겠다니까 50년 후에 다시 오라는 거야."
"......"
"50년 후에 깨달았지. 정말 돌이켜 보면 추억이라 또 버티는 구나. 너가 나에게 저승사자님이 아닌 지훈님으로 처음 부른 그 순간으로 하루, 아무것도 안 먹는 내가 걱정된다며 자신이 먹을 고기의 반 이상을 툭 잘라주는 너에 일주일, 너를 생각하며 만든 나의 노래를 좋다고 해주는 너에 한달, 악몽을 꿨다며 내 품으로 달려드는 너에 1년."
와... 지금 이 말을 하고 계신 게 지훈님이 맞는 거겠지? 다정하게도 쓸어주는 손 느낌이 너무 생생해 이게 현실이 맞다는 것을 아는데도 아득하기만 하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내가 지훈님을 좋아하기 전부터 지훈님은 나를 좋아하고 계셨구나.. 진짜, 지훈님이 너무 좋다.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를 해주는 지훈님이 너무 좋아서 지훈님 손을 놓고 그대로 끌어안았다. 당황한 듯 가만있던 지훈님도 나를 끌어안고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곧 지훈님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일 없어."
이제야 안심이 된다. 다행이다. 그럴 일 없어서. 마음이 놓이니 지금 내가 누구에게 안겨있는지 깨달았다. 예전에 상상조차 못할 일인데.. 지훈님이 또 새삼 좋아 꼭 끌어안는데 갑자기 사레들릴 만한 걸 물어보셨다.
"넌 김민규랑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네?"
"너가 기억하던 걔와의 추억은 죄다 찬란했다고 하니까 궁금해서. 뭐가 널 그렇게 기분 좋게 했을까 싶은 것도 있고.."
"아..."
그러게, 나 그를 어떻게 만나게 됐더라.
#89 어떻게 만나게 됐더라
아주 예전에 나는 인간을 먹는 것이 너무 겁이 났다. 다른 짐승들에 비해 느리기도 해서 가장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먹잇감이 인간이었으나 그들은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산짐승을 잡아먹기엔 나 자체가 산짐승보단 느리고 굼떠 도저히 사냥을 성공할 수가 없었다. 아, 이대로 굶어 죽겠구나 싶은 그때 나타난 것이 민규였다. 희미해지는 시야 사이로 민규가 보였고 눈을 떠보니 윤엄마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있는지도 모르겠고, 당시엔 윤엄마가 인간인 줄 알고 인간이 왜 날 간호하고 있는지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대충 손톱만 빼고 그를 위협했으나 그는 전혀 위협을 받지 않는 듯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말해드릴 걸.. 이건 내 탓이야."
일찍 퇴근하고 들어온 홍아빠가 자책을 하며 머리를 감쌌다. 그런 홍아빠 탓이 아니라며 승철아저씨 탓으로 넘긴 윤엄마 또한 웃음기 없는 표정인 것으로 보아 사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둘이서만 이야길 하고 우리에게는 조금도 말해주지 않는 탓에 이해가 안 되는 와중에 석민이가 물었다.
"거기서 무슨 일 있었어?"
"응. 저번에 마녀가 저주 걸었을 때 지수가 또 오기 귀찮아서 깃털 3개 정도 뽑아주고 왔다고 했거든. 근데 그걸 마녀가 훔쳐갔대."
순간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그래봤자 별 일 아니겠거니 걱정 없던 승관이마저 멈춰버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던 거실엔 승관이가 마시던 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너도나도 소란스러워졌다.
"설마.. 아, 아니겠지."
"그걸, 그걸? 에이.. 아니겠지. 바람에 날려 굴러 떨어진 거겠지."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전화 좀 하고 올게."
지훈님이 휴대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고 남겨진 우리는 불안해하는 홍아빠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적어도 그 분은 우리를, 해치진 않을 거잖아. 괜찮아.."
"아니, 그걸, 뭐, 그냥 가져갔을 수도 있지! 그냥, 진짜 예뻐서! 그래, 예뻐서 가져갔을 수도 있지."
"맞아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사실 우리도 안다. 걱정할만한 일이 일어나긴 일어날 것이란 걸. 다만, 한 가지 믿을만한 구석은.. 승관이 말대로 적어도 우린 안전하다는 것. 그러나 승철아저씨네는 또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었다. 빛나는 깃털은 모든 금기된 물약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기초라고 한다. 금기된 물약을 만들려면 꼭 들어가야 하는 기본 중에 기본이라는 거다. 또 다른 기본 재료인 악마의 뿔 조각이 들어갈 텐데, 그렇게 되면 물약제조에 악마의 재능이 들어가게 돼 자칫 화를 불러올 수 있어서 중화시키기 위한 천사의 깃털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마녀들의 약초학이었다. 이것도, 사실 마녀언니가 알려준 거긴 한데.. 불안함은 걷잡을 수 없었다. 아니, 윤엄마가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에 우리의 불안감은 배가 되어 덮쳐왔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야. 여태까지 지수가 깃털을 안 준 이유가 뭔데. 혹시라도, 혹시라도 걔가 진짜로 승철이를 죽일까봐.. 언젠가 다시 살아나는 그 죽음이 아니라, 정말로, 다시는 볼 수 없게 죽일까봐.. 그게 걱정되는 거잖아."
"...아, 분홍색 물약.. 그거 만드는데 깃털이 필요한 거였어?"
"다른 것도 필요한 것 같은데.. 아마 그건 쉽게 구했겠지. 돈 주면 깃털 줄 거냐고 물어보더니 몇 년 후에 팔천만원 가까이 가져왔던 앤데.."
"그 정도야 뭐..."
"80년 전이야."
윤엄마의 말을 들으니 사단이 나긴 날 모양이었다. 그 시대에 팔천만원이면.. 아.. 막아야겠다. 이번엔 무조건 막아야겠다. 마녀언니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훈님께 듣자하니 마녀언니가 사랑하던 아이였다고 한다. 그런 아이를 언니 손으로 죽이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안 괴로울 리가 없다. 방법을 찾아보고 싶은데, 뭘 아는 게 있어야 방법을 찾지... 윤엄마나 홍아빠는 뭐라도 알지 않을까?
"그.. 이번엔 막아 봐요."
"우리라곤 안 해봤을까. 우리 말을 들을 애였으면 그때 들었어야했어. 그 아이가 처음 죽은 그날부터, 우린 말렸단 말이야."
홍아빠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아주 옛날부터 친했던 사이였으니 안했을 리가 만무하겠구나. 그럼.. 그들은 또 같은 날을 반복하겠네.. 또, 나의 친구가 죽고, 승철아저씨는 몇 년 간 집안에 갇혀 살다가 또, 친구를 찾겠지. 환생한 친구를 세 번째 맞이하는 나는 차라리 이젠 만나지 말까 싶다가도 막상 친구가 살아났다고 하면 달라진 얼굴과 성격에도 따뜻했던 그 향이 익숙해서 본능적으로 끌리는데.. 아저씨는 오죽할까..
"안 받아. 방금 껐나봐. 이젠 꺼져있다 그래."
아.. 애달프다. 반복되는 삶에 모든 것을 후회할 만도 한데 승철아저씨는 언제나 그럴 줄 알면서도 그 길을 또 걷는구나.
#87 다정한 게 최고야
우리끼리 백날 이야기를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마녀언니는 빛나는 깃털을 가져간 후였고 왜 그랬냐 찾아가서 따진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아주 만약 승철아저씨가 죽게 되면 지훈님께서 손을 써주기로,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고 보면, 마녀들을 통하면 우리같은 존재들도 죽을 수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지훈님도 마녀언니에게 그 물약을 부탁했던 거겠지.. 아, 문득 불안해졌다. 분명 아까 안심하라는 듯 웃어주긴 했지만.. 불안감은 금방 또 나를 잡아먹었다. 방에서 나와 지훈님 방으로 바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있던 지훈님과 바로 눈이 마주쳤고 난 뒤늦은 노크를 했다. 슬쩍 웃은 지훈님이 의자를 돌려 나를 보더니 물었다.
"무슨 일이야?"
"불안해서요.."
"뭐가? 또 걔가 죽을까봐? 내가 빼내줄게. 나 그 정도 능력은 돼."
"그게 가능해요?"
"응.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게 아니거든, 내가."
"아... 아, 근데 그게 불안한 게 아니에요. 아, 물론 그것도 불안하긴 한데.."
"응?"
"지훈님이, 지훈님이 또, 죽고 싶어 할까봐.. 영영 떠날까봐.."
아, 정말 그렇게 되면 내 모든 것이 공허해질 것 같았다. 몇 십 년을 돌고 돌아 힘들게 만난 사이인데, 그동안 마음고생도 너무 심했는데 갑자기 지훈님이 사라진다면, 그것만큼 버티기 힘든 게 있을까 싶다. 다신, 볼 수 없다는 거잖아. 정말, 다시는... 지훈님이 갑자기 일어나선 내 손을 잡았다. 놀라서 바라보니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눈빛으로 다정하게 말하시는 거였다.
"그럴 일 없어. 너 두고 내가 어디를 가."
다정한 지훈님은 정말 심장에 해롭다. 또 세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에 평화를 찾으려 눈을 감고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소리 나게 웃은 지훈님이 내 뒤에 문을 닫았고 그 소리에 또 놀라 지훈님을 보았다. 여전히도 잡고 계시는 그 손을 다정하게 쓸어준 지훈님이 날 끌었다. 지훈님이 침대에 걸터앉았고 잡고 있던 손을 당기는 바람에 나도 그 옆에 앉게 되었다. 영문을 몰라 지훈님을 바라보니 지훈님도 나를 바라보는 거였다. 어.. 잘생겼다. 정말.. 너무 잘생기셨다.
#88 그때의 우린
감탄하고 있는 나에게 지훈님은 아까의 그 다정한 말투로 말하셨다.
"내가 처음 그 분을 찾아간 건 딱 지금 너 나이였을 때였어."
"......"
"저승사자는 생각보다 더 많은 후회를 뒤집어쓰고 있거든. 그럴 수밖에 없었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후회로 시작하고 후회로 끝났거든."
"......"
"그러다 그 분을 알게 된 거야. 그 분이 독약을 가지고 있대. 바보같이 그땐 그걸로 죽을 수 있을지 알았어. 그래서 찾아가니 아까 말했듯 죽을 만큼 괴롭고 싶으면 사랑을 하라고 하더라고. 사랑이 힘들면 눌러 담으라고 하고."
"...그래서 사랑을 하셨나요?"
"아니. 눌러 담았어. 후회만 있는 그곳에서 사랑을 어떻게 하겠어. 그래서 계속 눌러 담았지. 눌러 담다 보니까 살아지더라고."
그때가 생각났는지 잠깐 눈을 감은 채 몸을 떤 지훈님이 갑자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셨다. 영문을 몰라 지훈님을 바라보니 그러다 나를 만났다고 한다.
"그 분이 갑자기 나에게 너를 잘 돌봐주라고 했어. 오랜만에 온 연락이 불안한 한편으론 의문이었지. 항상 네 친구만 돌봐주라고 했던 분인데 갑자기 너를 돌봐달라고 하니까."
"......"
"넌 그곳에서 나와 무엇을 했을 것 같아?"
어... 정말 죄송하게도 난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번에 물어보러 갔을 때 안 가르쳐 준다고 하셨으면서 오늘은 가르쳐줄 모양이었다. 너무 궁금했는데 잘됐다 싶어서 우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니 지훈님이 검지만 쫙 펼치더니 웃음기 섞인 말투로 이야기를 해주셨다.
"일단 첫 번째로 김민규에게 악담을 퍼부었어. 결국 민규 손에 죽어서 네 친구가 왔었거든."
"아..."
"두 번째로 너를 살리지 말고 네 친구를 살려달라고 나에게 애원했어."
"네?"
"세 번째로 그럼에도 넌 민규를 좋아한다고 했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일단 그 당시의 나는 민규에게 악담을 퍼부었었던 것부터 민규의 손에 내 친구가 죽어서 왔다는 것도... 아니 걔는...! 아, 이런 거였구나. 바로 이해가 되었다. 내 친구를 살린 건 이해가 됐다. 민규때문에 죽어서 온 것이니 내가 얼마나 미안했겠어.. 아니 근데, 그때의 나는 민규를 좋아했단 말이야? 내 친구를 죽인 민규를... 좋아했겠구나... 그렇지... 우리는, 찬란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했겠지. 민규와의 찬란했던 때가 재생되기 직전 지훈님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자신 말고 남을 살리라고 한 건 네가 처음이었어. 그 다름에서 난 사랑을 시작했나봐. 짝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진짜 죽을 만큼 괴롭더라고."
"아..."
"그 즈음에 다시 그 분을 찾아갔었어. 즉사의 물약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그래서 찾아갔더니 원래 사랑이 그렇대. 모든 게 후회로 남다가도 돌이켜 보면 추억이라 또 버틴대. 이제 못 버티겠다니까 50년 후에 다시 오라는 거야."
"......"
"50년 후에 깨달았지. 정말 돌이켜 보면 추억이라 또 버티는 구나. 너가 나에게 저승사자님이 아닌 지훈님으로 처음 부른 그 순간으로 하루, 아무것도 안 먹는 내가 걱정된다며 자신이 먹을 고기의 반 이상을 툭 잘라주는 너에 일주일, 너를 생각하며 만든 나의 노래를 좋다고 해주는 너에 한달, 악몽을 꿨다며 내 품으로 달려드는 너에 1년."
와... 지금 이 말을 하고 계신 게 지훈님이 맞는 거겠지? 다정하게도 쓸어주는 손 느낌이 너무 생생해 이게 현실이 맞다는 것을 아는데도 아득하기만 하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내가 지훈님을 좋아하기 전부터 지훈님은 나를 좋아하고 계셨구나.. 진짜, 지훈님이 너무 좋다.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를 해주는 지훈님이 너무 좋아서 지훈님 손을 놓고 그대로 끌어안았다. 당황한 듯 가만있던 지훈님도 나를 끌어안고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곧 지훈님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일 없어."
이제야 안심이 된다. 다행이다. 그럴 일 없어서. 마음이 놓이니 지금 내가 누구에게 안겨있는지 깨달았다. 예전에 상상조차 못할 일인데.. 지훈님이 또 새삼 좋아 꼭 끌어안는데 갑자기 사레들릴 만한 걸 물어보셨다.
"넌 김민규랑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네?"
"너가 기억하던 걔와의 추억은 죄다 찬란했다고 하니까 궁금해서. 뭐가 널 그렇게 기분 좋게 했을까 싶은 것도 있고.."
"아..."
그러게, 나 그를 어떻게 만나게 됐더라.
#89 어떻게 만나게 됐더라
아주 예전에 나는 인간을 먹는 것이 너무 겁이 났다. 다른 짐승들에 비해 느리기도 해서 가장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먹잇감이 인간이었으나 그들은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산짐승을 잡아먹기엔 나 자체가 산짐승보단 느리고 굼떠 도저히 사냥을 성공할 수가 없었다. 아, 이대로 굶어 죽겠구나 싶은 그때 나타난 것이 민규였다. 희미해지는 시야 사이로 민규가 보였고 눈을 떠보니 윤엄마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있는지도 모르겠고, 당시엔 윤엄마가 인간인 줄 알고 인간이 왜 날 간호하고 있는지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대충 손톱만 빼고 그를 위협했으나 그는 전혀 위협을 받지 않는 듯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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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좀 들어? 죽는 줄 알았네."
"......"
"조금 더 누워 있어야 돼. 아직 움직이기 벅찰 거야."
윤엄마가 일어나기에 혹시나 나에게 위협을 가할까 먼저 공격하려 상체를 세우는데 그대로 내 머리를 눌러 다시 눕힌 윤엄마가 기지개를 켰다. 일단 누워있으래서 누워 있기는 하지만 도통 지금 이 상황을 모르겠는 거였다. 그때 생각난 게 희미한 시야로 보이던 민규였다.
그 당시엔 이름도 뭣도 몰랐으니 민규가 누군지 몰라 의아하기만 했다. 윤엄마가 나가고 얼마 후 문을 세차게 열며 뛰쳐들어오는 민규가 보이는 거였다. 희미한 시야로 보인 그였지만 그 빼어난 용모에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빼어난 용모 때문에 기억한 게 아니라 내가 늑대인간이기에 기억을 한 거구나.. 아무튼, 민규가 우물쭈물 문 앞에 서서 몸을 배배꼬며 말했다.
"와, 일어났네.. 못 일어나면 어쩌나 걱정했어."
"......"
"어, 난 민규야. 너도, 늑대인간이지?"
내 정체를 안 다는 것에 일단 경계했다. 그가 날 살려준 은인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믿을 것은 안됐다. 하여 잔뜩 경계하며 그를 쏘아보니 그가 머리 옆으로 손을 들어 올리며 날 안심시키기 위해 다다다 내뱉었다.
"아, 불안하게 했다면 미안해. 나도 너랑 같은 늑대인간이야. 너 치료할 때 자꾸 귀랑 꼬리가 나와서, 알게 됐어.."
그게 나와 그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짐승들은 물론 인간도 사냥하지 못하므로 또다시 굶어 죽을 거라 윤엄마가 여기서 지내도 된다고 허락했다. 민규는 워낙 자유분방한 아이라 따로 살았었다. 윤엄마는 그때 뭔가가 필요해서 오는 종족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혼자살기 외롭다는 승관이도, 천방지축 사고를 쳐 인간들 사이에 수배령이 떨어졌던 석민이도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의 집에서 재우고 먹이고 입혔다.
"그렇게 좋은 능력 어디다 쓸래! 가서 멧돼지라도 잡아와 좀!"
간혹 민규가 들리면 윤엄마는 사랑의 매를 날렸다. 그렇게 맞고도 안 아픈지 알겠다며 순순히 나가는 민규였다. 홍아빠는 그런 그들을 보며 윤엄마를 나무랬다.
"왜 애를 그렇게 못 괴롭혀서 안달이야. 잘 좀 대해줘."
"으휴 이 착해빠진 천사야. 우리 집 지금 가난한 거 안보여? 저기서 밥이나 축내는 이석민이랑 부승관 좀 보고 말해."
"너 뒷마당에 현금 묻어놨잖아."
"그, 그건... 그건 나중을 위한 일이고."
그러고 보니 윤엄마와 홍아빠는 그때도 투닥이셨구나.
#90 그와 친구
간혹 민규가 집에 돌아오면 나에게 여행을 다녀왔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아름다웠다. 커다란 연못에 색색의 물고기들이 지나다녔고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숲은 아주 울창했는데 밤이 되면 반딧불이들이 숲속에서 나와 연못 주변을 날아다니며 장관을 이뤘노라고. 아주 드넓은 초원에 색색깔의 아름다운 들꽃들이 피어있어 너무 아름답기에 너를 보여주러 꺾어왔노라고. 시대적으로 안 좋았던 그 시기에 민규는 멀리 여행을 가지 못하는 날 위해 아름다운 추억들만 머릿속에 담아와 나에게 말해주었다. 난 그런 민규의 이야기가 좋았고 민규는 이야기들을 듣는 날 좋아했었다. 그런 내가 민규가 좋아진 이유는 간단했다.
"좋아해.."
수줍게 건네던 그의 고백이었다. 그의 말에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크게 요동치는 심장에 아, 내가 좋아하던 건 민규의 이야기가 아니라 민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아주 작게 나간 나의 말을 들은 민규는 뛸 듯이 기뻐했다. 아직 모든 것이 서툰 나와 민규였기에 손만 잡아도 간지러웠고 안고 있으면 서로의 심장소리가 들려 찬란했다. 그래서 난 민규와 안고 있는 게 좋았던 것 같다. 그의 넓은 품에 가만히 안겨 서로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으면 옆에서 방해하는 석민이와 승관이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 한 후부턴 사냥을 나간 민규를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가만히 대문 앞에 서서 민규를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내 옆에는 친구가 함께였다.
"또 기다리고 있어? 그 오라버니도 너무하네. 이쁜 널 두고 말이야. 누가 채가면 어째?"
홍아빠가 납치 됐던 후로 인간들은 증오할 대상일 뿐이었는데 친구는 좀 달랐다. 사랑스럽다고 해야하나..? 그게 누구든 사랑을 쏟아주는 아이였다. 친구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보면 불쑥 마녀언니도 나타나 같이 이야기를 하곤 했다.
"아서, 아가야. 내가 장담하는데 누가 채가면 민규가 가만있진 않을 거야."
"어머, 좋겠다~ 언니는 그런 사람 없어요?"
"음, 아마 씨를 말릴 아이가 있긴 한데.. 그건 뭐.. 됐어."
"씨를 말려요? 가문을 망하게 하는 건가? 둘 다 대단하네요.."
물론 씨를 말린다는 게, 악마오빠 입장에선 정말 인간들의 씨를 말리는 거였겠지만 친구는 인간의 입장에서 이해를 마친 후였다. 마녀언니와 대문 앞에서 쪼그려 앉아 이야기를 하다보면 악마오빠가 와 또 여기 있냐며 마녀언니를 데려간다. 친구도 일이 있다고 안에서 들어가서 기다리라 말하며 가버리면 민규가 온다. 그의 발자국소리에서부터 난 심장이 떨렸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정말 단 한순간도 찬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
시즌1은 철저히 힙합팀이라곤 했으나 어쨌든 인간의 1인칭 시점이라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면
시즌2는 보컬팀 위주이나 우리의 공주가 민규의 전 반려이기에 그때 이야기는 아주 빠삭하게 알고 계시죻ㅎㅎ
현재 소세지빵은 20편 안으로 마무리 짓는다는 생각으로 쓰고 있씁니다!
이왕 시리즈물인 거 시즌1도 20편이 완결이었으니
시즌2, 시즌 3도 20편 안으로 쓰고 싶은 게 욕심이거든요^0^/
지훈이는 후회가 많은 아이이기에 항상 불안했는데
공주를 만나서 그런 생각이 일절 들지 않는가 봅니다8ㅁ8
너네 행복해야돼8ㅁ8
*암호닉입니다*
[암호닉은 더이상 받지 않습니다!]
[암호닉 확인 한 번 부탁드려요~]
뿌랑둥이, 오솔, 순찌, 잼재미, 16328, 선쿱, 수리수리, 유한성, 루미너스, 순수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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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쮸, 오링, 왕댯님, 하늘빛, 호굼, 앨리스, 꾬도리, 저너누복덩어리, 이서쿠, 모찌모찌
(맨 위 사진은 보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