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
Eminem, stan
성규씨. 오늘 전 당신을 보러 갔어요. 하지만 당신은 저를 못 봤나 봐요.
괜찮아요. 난 당신을 또 보러 갈 거니까.
이번에도 못 알아봐 주면 전 정말 섭섭할 거예요.
이번에 팬 사인회 하죠? 꼭 당첨되서 ...
이 미친놈.
성규는 스토커의 편지를 익숙하게 구겨 버렸다. 혹시나 했던 게 역시나 였다. 그 초록색 가디건의 남자는 편지를 보내오는 스토커가 맞을 것이다. 사인회에 온다고? 당첨은 아무나 되는 줄 아나. CD 10장 사고도 당첨 안 되는 사람도 있는데. 성규는 스토커를 비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남우현이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팬사인회에 남자가 오는 건, 아마 제 기억이 맞다면 처음이었다. 성규는 눈에 띄게 긴장한 채로 사인을 했다.
"성규 씨."
"...네."
굳은 목소리로 성규가 대답했다.
"저, 회사 잘렸어요."
"네?"
"성규 씨 보러 다니다가 회사 빠져서, 잘렸어요."
싱긋, 웃는 남자. 가까이서 보니 평균 이상의 외모를 가졌다. 이런 남자가 도대체 나한테 왜. 성규는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흐르는 것을 느꼈다. 서둘러 사인을 끝내고 남자를 내려 보내려고 악수를 하는데,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놔주질 않는 남자.
"이것, 좀,"
"왜 답장 안 했어요?"
성규는 할 말을 잃었다. 방금까지 실실 웃고 있던 남자는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고 성규를 바라봤다.
"왜 전화 안 했어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스토커. 그 스토커다. 집요하게 편지를 보내오던 그 스토커. 오늘은 그 안경을 쓰지 않았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초록색 가디건의 남자가 맞는 것 같았다.
"이거, 놓으세요."
"왜 전화 안 했어요? 왜 답장 안 했어요? 내가 불렀는데, 왜 대답 안 했어요?"
아까 남자의 미소는, 미소가 아니었다. 흡사 절규와도 같은 남자의 목소리에 성규는 아연실색했다. 남자가 너무 오래 시간을 끄는 것 같자 매니저가 직접 위로 올라와 남자와 성규의 손을 억지로 떼어 놓았다. 남자는 끝까지, 성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차로 돌아온 성규는 아까 자신이 읽던 편지 더미에서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찾아냈다. 이제 보니 남자 글씨다. 여자치고 못 쓰던 글씨가 아니라 남자의 글씨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성규는 편지를 박박 찢었다. 매니저가 이상한 눈으로 돌아보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을 열어 그 잔해들을 날려 보냈다. 더 이상 이 스토커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음악 방송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온 성규가 뭔가를 한아름 들고 들어오는 매니저를 힐끔 보고는 물었다.
"그건 뭐야?"
"이거 오늘 팬들한테 도시락 서포트 들어온 거."
"오, 메뉴가 뭔데?"
지난 주 1위 기념으로 팬들이 서포트를 해왔다. 함께 전달된 개인 선물과 팬레터를 흐뭇한 표정으로 훑어보던 성규의 눈에 섬뜩한 붉은 색의 봉투가 띄었다. 수많은 팬레터들 가운데 떡 하니 맨 위에 올라와 있는. 아까 낮에 팬 사인회까지 찾아온 그 남자가 떠올라 성규는 문득 겁이 났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겉봉을 찢고 편지를 꺼냈다.
성규 씨. 난 당신이 내 편지를 모두 읽었다는 걸 알아요.
난 당신이 내 편지를 찢어버리는 걸 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답장 한 번 만 해주세요. 아니, 전화 한 번만 해주세요.
오늘부터 일주일만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에게 꼭 할 말이 있어요.
당신이 연락하지 않으면... 난 죽을지도 몰라요. -W
씨발. 기어코 성규는 삭혀온 욕을 내뱉고 말았다.
일주일 후, 행사 스케줄이 잡혔다. 전국 규모로 방송되는 큰 행사라서 성규는 음악 방송 사전 녹화를 하고 바로 행사장으로 가기로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제는 얼굴이 익어버린 그 남자가 와 있었다. 팬 석에 오롯이 앉아 있는 그를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무사히 녹화를 마친 성규가 서둘러 차에 올랐다. 행사 시간을 맞추려면 좀 빠듯했다. 성규는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려 아까 스타일리스트에게 맡겨 놓은 가방을 찾았다. 어쩐 일인지 가방 안 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있는 핸드폰을 꺼낸 성규는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자신의 핸드폰에 자신이 붙여놓은 기억이 없는 노란색 포스트잇이 있었다.
끝까지 당신은 아무런 답이 없군. 난 지금 죽으러 갈 겁니다. 혹시 모르겠네요. 죽어서는 당신과 만날 수 있을지. -W
아, 씨발. 이게 뭐야. 성규는 포스트잇을 구겨버렸다. 잊자, 잊어. 악질적인 스토커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고 들었어. 내가 반응하지 않으면 저 쪽도 사그라들 거야.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누우며 성규가 매니저에게 말했다.
"형, CD 좀 틀어봐."
행사에서 부를 노래를 틀고 따라 부르는 건 성규의 오랜 습관이었다. 이 시간은 매니저도, 스타일리스트도 방해하지 않고 그가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곤 했다. 첫 번 째 트랙을 다 부르고 좀 목을 안정시키려 입을 다문 성규의 귀에, 자신의 목소리와 그를 따라 묘하게 흥얼거리는 타인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형. 지금 내 노래 따라 불러?"
"어? 아니. 니가 싫어하는 걸 아는데 내가 왜."
"씨디 잠깐 멈춰봐."
뚝 멎는 소리.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야. 다시 틀어."
차 안 가득 울려 퍼지는 자신의 목소리. 성규는 눈을 감고 자신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다가 또 귀에 들리는 타인의 허밍. 소름이 끼치는 기분에 성규는 눈을 팍 떴다. 계속해서 들리는 허밍. 매니저도 입을 꾹 다물고 있고, 스타일리스트들도 곯아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들리는 낮은 남자의 목소리.
"...이게 뭐냐?"
매니저도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백미러로 성규를 보며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서서히 이성이 돌아온 성규는 침착하게 매니저에게 말했다.
"씨디 꺼내봐."
매니저가 재생을 멈추고 CD를 꺼내서 성규에게 건넸다. 자신의 앨범 CD. 별반 다를 게 없는 그것을 살펴보다가 성규는 욕을 하면서 CD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뒷면에 매직으로 선명하게 적혀 있는 W.
"...씨발. 진짜 이 미친 새끼가."
차에는 대체 어떻게 들어와서 CD를 바꿔 놓은 거지? 아까 포스트잇도 그렇고. 스토커 새끼가 진짜.
"왜. CD에 문제가 있어?"
"...또 그 새끼야. 스토커."
"뭐? 그 미친놈이 또? 야, 안되겠다. 신고라도 해야지, 원."
"형 미쳤어? 나 연예인이야. 남자가 남자한테 스토킹 당한다고 신고를 해?"
"그럼 어떡하냐. 무슨 해코지라도 하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없어야지. 진짜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성규는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라고 말했지만 그 놈은 미친놈이 분명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멀쩡한 성인 남자가 같은 거 달린 놈이 좋다고 회사까지 잘려가며 자신의 스케줄을 쫓아다닐 수가 없었다.
다시금 잘 생각해보면 그 남자는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자신을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편지는 다 찢어버려 연락처를 알 수는 없었지만, 또 그 남자가 자신을 찾아온다면, 꼭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저를 이렇게 좋아하는지. 회사까지 잘리는 희생을 감수해가며 자신을 따라다니는 이유가 뭔지.
"형."
"어. 왜?"
매니저가 뒤를 흘끔 봤다. 버릇이었다. 성규의 매니저는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면 꼭 그 사람을 보는 버릇이 있어서 가끔 성규가 뒤에서 이렇게 말을 걸면 고개를 반쯤 돌리고서 이야기를 했다. 겁이 많은 성규는 사고가 날까봐 질색하며 늘 강제로 고개를 돌린 상태에서 대화를 하곤 했다.
"그 남자 있잖아."
"무슨 남자?"
"왜, 저번에 팬싸에서 내 손 잡고 안 놔줘서 끌고 나갔던 남자."
"아아. 어. 그 남자. 알아, 왜."
"혹시 연락처 있어? 팬싸 명단 같은 거 보면 알 수 있을까?"
"남자는 그 사람 한 명 뿐이었으니까, 찾을 수 있을 걸. 근데 왜?"
"아니야. 혹시라도 다음 스케줄에 그 사람 보면, 어, 형! 조심해!"
매니저에게 W로 추정되는 그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던 성규는 맞은편에서 중앙선을 넘어 자신의 차로 돌진해오는 차량을 발견하고 매니저를 주지시켰다. 그러나 매니저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차는 성규의 차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쿵.
심한 충격과 함께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상태로 있던 성규는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차가 부딪히기 전 성규는 밝게 빛나는 상대편 차의 라이트 너머로, 싸늘하게 웃고 있는 W의 미소를 언뜻 본 것 같기도 했다.
속보입니다. 인기 가수 김성규씨가 ....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 ...... 한편 사고를 낸 운전자 남 씨는 혈중 알콜 농도 0.192%로 만취한 상태였으며 .... 김성규 씨와 운전자 남씨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
My tea's gone cold I'm wondering why I..
got out of bed at all
The morning rain clouds up my window.. and I can't see at all
And even if I could it'll all be gray,
but your picture on my wall
It reminds me, that it's not so bad, it's not so bad..
원래 Fan 상, 하 두 편으로 올릴 계획이었는데ㅋㅋ새벽에 졸려서 상 안 붙이고 그냥 올린듯ㅋㅋ
의도치 않게 그대들 농락해서 미안해요ㅋㅋㅋㅋㅋㅋ고의는 아니었어요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