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 가마에서 불을 땔 때 가마 안의 온도와 유약이 어떻게 녹는지 알아보기 위해, 실험용으로 만든 도자기 조각
첫번째 조각
; 재회
(1 - 1)
"이번 학기 도예 특별수업을 맡아주실 차수연 선생님이다."
담임 선생님의 소개로 인해, 아이들의 시선이 완전히 내게로 몰렸다. 나는 오랜 시간 준비한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이번 학기 동안 여러분과 도예 수업을 할 차수연입니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을 빼앗은 내게도 박수를 쳐주며, 장난스레 예뻐요. 혹은 수업은 언제부터 해요? 하는 식의 질문을 했다. 덕분에 마음이 놓인 나는 교실에서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고.
요즘 길에서 보이는 학생들이 무서워서 좀 겁도 먹은 상태로 왔는데. 생각보다 순하고 학생 다운 얼굴들이 내 앞에 있었다. 다행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이 교과목 선생님 아니라고 또 좋아한다며, 내게 쉬는 시간 동안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라고 하셨다. 도예 수업 전까지는 따로 시간이 마련 되지 않을 테니, 준비물이나 수업 개요 같은 걸 미리 설명해줘도 좋다고 하셨고.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시자 아이들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 그러니까.
"2학년 5반 친구들이 특별 활동으로 도예를 선택해줬다고 들었어요."
"네!"
"쉽게 흥미를 가지기 어려운 분야인데 선택해줘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선택해준 만큼 저도 열심히 준비해서 올게요."
사실이었다. 도예라고 하면 지루하고 고루한 장면을 떠올리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그래서 교육청에서 개설한 특별 수업 목록에 도예가 있다는 걸 들었을 때, 네? 하고 되묻기도 했다. 어린 친구들에게 도예라니. 그리고 그 재능기부 수업자가 나라니. 과거 교수님을 따라 주민센터에서 진행되는 도예 수업에 조교로 참여했다는 게, 그 이유 중 하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교수님과 함께 신인 작가 전시로 그렇지 않아도 바쁜 스케쥴이었지만, 왜인지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와서 아이들의 흥미로운 눈을 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몇몇 장난스러운 눈도 보였지만 딱 그 나이대 아이들 같았다.
"수업은 다음 주 화요일부터 진행될 예정이에요. 다음 주 준비물은 따로 없어요. 이론과 용어 설명이 기본이라, 그 수업부터 하도록 할게요."
"네!"
"네, 내가 쉬는 시간을 다 뺏어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래도..."
쉬는 시간 5분 가량을 내가 다 빼앗은 꼴이었다. 아이들은 괜찮다면서도 그래도 - 하고 말 끝을 늘어트리는 나에게 '그럼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하고 짓궂게 말했다. 나는 아이들과 친해지기에도 좋겠다 싶어, 그럴까?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반장이 교탁 앞으로 나왔고, 나는 아이들의 빠른 실행력에 고개를 저었다. 카드를 건네 받은 반장은 빨리 다녀오겠다며 아이스크림을 탱크보이로 통일한 채, 모습을 감췄다. 뒤이어 아이스크림을 같이 들고 오겠다는 아이 두 명이 사라졌고, 교실은 어수선해졌다. 아이스크림이 오는 동안 뭘 해야 할 지 고민을 하기도 전에 아이들의 질문 공세가 시작 되었다. 선생님! 몇 살이세요? 선생님! 도예과 나오셨어요? 선생님! 선생님은 뭐 만들어요? 선생님! 선생님! 저희도 도자기 만들어요? 선생님! 남자친구 있으세요? 선생님!
"나이는 스물여섯이에요."
생각보다 나이가 좀 있죠? 그리고 중학생 때부터 도예를 공부해서 대학교까지 도예과를 졸업했어요. 현재는 도예 관련해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뭐 물어봤죠? 선생님이 만드는 거요! 아, 어... 뭘 만드냐는 질문은 답하기 어려워요. 그때그때 재료에 따라서 만들어야 할 것을 만들어요. 흙마다 성격이 달라서. 좀 어렵죠? 여러분도 공부하다가 보면 알게 될 거예요. 수업 주수 별로 계획해둔 게 있기는 한데. 여러분이 잘 따라와주면, 아마 우리도 도자기를 만들어보지 않을까요? 그리고 남자친구는.
때마침 앞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적당한 타이밍에 아이스크림을 사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처음 만난 친구들에게 - 그것도 나보다 한참 어린 - 구구절절한 연애 스토리를 들려 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1 - 2)
"수업 준비 안 하냐."
"..."
"오늘 종 망가져서 안 치는 거 모르냐. 다들 앉..."
"..."
그런 구구절절한 연애 스토리를 말하는 게 백번이고 천번이고 나았을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불과 2년 전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저 쪽이 더 당황했다는 표현이 옳았다. 엄연히 따지면 제 직장에 내가 들어온 것이니까. 나랑 만나고 있을 때만 해도 임용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합격했나 보구나. 아이들은 우리 둘 사이의 기류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주섬주섬 수학 교과서를 꺼냈다. 부산스러운 분위기가 우리 둘만 피해 감돌았다.
"선생님! 아이스크림이요!"
"... 아, 응. 그래. 얘들 하나씩 나눠주세요."
반장은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나눠주더니, 빈 봉지를 접으며 말했다. 수학선생님꺼는 안 사왔는데... 나는 내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드세요. 이것도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자 아주 오래전에 아주 익숙하게 받아냈던 그 시선이 내게 잠시동안 머물렀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쥐고 있던 탓에 차가워진 손을 치마에 몇 번 문지른 뒤, 교탁 위 서류를 챙겼다. 그럼 다음 시간에 봐요. 여러분.
교실 근처를 벗어나지도 못한 채, 바로 벽에 기대어 마구 뛰는 심장을 달랬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내가 본 게 정말 맞나? 말도 안 돼.
하지만 무색하게도 교실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내 코 끝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책 펴라
아, 쌤! 아이스크림만 먹구요!
책 펴
도예쌤이 사준 건데! 좀 먹고 하고 싶습니다!
... 도예?
네. 특별활동 선생님이 처음으로 사준 건데! 먹고 해요!
...
네? 네? 윤기 쌤!!
오 분 줄게. 빨리 먹어.
네!
전남자친구와 직장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는데. 지나가는 척 창문을 통해 본 민윤기는 내가 준 탱크보이를 멀뚱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은 왜 또 하필.
* LOVE SEASON *
about 탱크보이
"윤기야."
"응"
"너 탱크보이 닮았다."
"내가?"
"응!"
"아이스크림을 닮았다고?"
"응!"
느닷없이 내게 아이스크림, 그것도 촌스러운 탱크보이를 닮았단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쥐고 있던 차가운 손으로 수연이의 양 볼을 감싸, 이리저리 흔들었다. 탱크보이는 무슨. 때마침 핸드폰에서는 예매해둔 영화 알림이 울렸고, 수연이는 그를 핑계로 내 손을 벗어나 제 볼을 감쌌다. 너무해. 민윤기. 여자친구 볼을 이렇게 막!
"가자."
"화장 다 지워진다니까! 볼 이렇게 잡으면!"
"그럼 화장 안 하면 되지."
"아아. 진짜 대화가 안 통해."
"같이 가."
"싫어!"
뒤에서도 보이는 수연이의 볼록한 볼살이 귀여워 그 자리에서 웃다가,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음성에 걸음을 옮겼다. 귀여워. 진짜.
F.
안녕하세요. 겨울입니다.
작품으로는 정말 오랜만이죠? 이번 회차는 더 많은 내용을 담으면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아서, 프롤로그처럼 짧게 끊어보았어요. 이번 작품 '시편'은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게 되면서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어렸을 때의 사랑에는 아쉬움이 남는 법이잖아요. 조금 더 성숙할 걸 혹은 조금 더 어른이 되어서 만났다면 어땠을까. 같은. 그런 생각에서 출발한 작품이에요. 주인공은 투엔드 이후로 윤기입니다. 완결을 내지 못해 아쉬움이 남아서... 윤기로 이야기 해보려구요.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몰입도를 위해 '차수연'이라는 이름으로 설정했습니다. 혹 불편하시면 다른 의견 주셔도 감사히 듣고 참고할게요. 그럼 다들 기분 좋게 나눠주세요 :)
그럼 오랜만이지만 여전히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