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알리 - 365일)
2013. 10. 9. 수요일
오늘은 에네스와 헤어진 지 하루째가 되는 날이다. 그가 없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 편안한 하루를 보냈다. 오히려 나를 구속하고 있던 것들이 없어지고 자유로웠던 기분이었다. 에네스와 함께 했던 2년이란 시간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길을 가다 이별 노래를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았고 그저 모든 것이 평범했다. Damn, 인터넷에서 보던 별 구질구질한 이별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었네?
2013. 10. 10. 목요일
오늘은 왠지 하루종일 힘이 없었다. 몸이 축축 풀리는 것도 같고 체한 것처럼 가슴도 답답했다. 정말 체했나 싶어 소화제를 먹어 봤지만 역효과가 나서 속이 메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몸이 말을 안 들으니 괜히 기분까지 우울했다. 하루종일 짜증나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하루였다. 타투샵을 일찍 닫고 집에 들어와 TV를 보고 있으려니 이상한 이별 노래들만 주구장창 나와서 TV를 꺼버렸다. 잠이나 자야지.
2013. 10. 11. 금요일
타투샵에 임시휴업 팻말을 내걸고 하루종일 집에서 잠이나 자려고 했더니 심장소리가 너무 시끄럽게 쿵쿵 울려서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어쩐지 어제부터 가슴도 답답하고 몸이 좋지 않더라니, 몸 어딘가에 이상이 생긴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오늘 일기는 이쯤 해두고 병원이나 갔다 와야지.
2013. 10. 12. 토요일
병원에서는 내가 아픈 곳이 아무데도 없다고 했다. 가슴도 답답하고, 심장 소리도 너무 크고, 이젠 눈앞까지 캄캄해지는데 아픈 곳이 아무데도 없다고? 그 병원 의사는 돌팔이가 확실해. 하루하루 더 안 좋아져 가는 몸 상태와 그에 따라 우울해지는 기분 때문에 점점 폐인이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내일은 타투샵 나가 봐야 하는데..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그냥 호주로 뜨고 싶었다.
2013. 10. 13. 일요일
아픈 몸을 이끌고 무리하게 일을 나갔다가 결국 사단이 났다. 손님의 팔목 부근에 타투를 해 주고 있던 중 이유 없이 눈물이 떨어져 버렸었다. 다행히 도구를 살펴보려고 타투를 하고 있던 중이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손님 손목에 큰 흉터를 만들어 놓을 뻔 했다. 손님에게 급히 사과를 하고 타투를 마무리하긴 했지만 기분이 계속 뒤숭숭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문득 에네스가 생각나는 것도 같았다.
2013. 10. 14. 월요일
오늘은 유난히 속이 허전했다. 배가 고파서 그런건가. 평소에는 잘 먹지 않는 패스트푸드부터 시작해서 분식, 아이스크림, 집안 곳곳 남아 있던 과자까지 싹 먹어치웠다. 일주일은 먹을 분량을 오늘 하루에 다 먹었음에도 여전히 속이 텅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았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식으로 푸는 내 습관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타투샵을 일주일쯤 쉬고 휴가를 갔다 와야 할 것 같다.
2013. 10. 14. 화요일
휴가 가기 좋은 곳. 이라고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니 글이 주르륵 떴다. 하나하나 클릭해서 읽어보자니 대부분 다 가 본 곳들이었다. 여기도 가 본 곳, 저기도 가 본 곳.. 한국에 온 지 3년밖에 안 됐는데 언제 이렇게 많이 다닌 걸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국에 오래 살았던 에네스와 같이 갔다 온 곳들이었다. Shit. 괜히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 같았다. 접속해 있는 블로그의 BGM이 이별 노래여서 더 그런 것 같아 노래를 끄려다가 문득 이 노래가 내 이야기인 것만도 같았다.
2013. 11. 8. 금요일
일기를 꽤 오랜만에 쓰는 것 같은데. 사실 그 동안 많이 힘들었다. 내겐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별의 후유증이 에네스와 헤어지고 난 지 1주일 뒤라는 뒤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하루하루를 거의 좀비처럼 보냈던 것 같다. 그래도 이젠 그럭저럭 기운 차리고 살아보려고 길던 앞머리도 자르고 오랜만에 안 입던 티셔츠도 꺼내입어봤다. 그런데 이 옷 너무 비친다고 에네스가 싫어하던 건데.. 아냐, 이제 에네스 생각은 지워보기로 했다. 지우기로 했는데, 오히려 이별은 실감나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하다.
2014. 10. 8. 수요일
방 안 어딘가에 박혀 있던 일기를 오랜만에 꺼내봤다. 1년만인 것 같은데.. 에네스와의 이별 후 힘들었던 내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과정 속에서, 가끔 에네스의 얘기가 내 귀에 들려도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이땐 참 힘들었었다. 이렇게 사랑을 겪고, 아픔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무뎌지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언젠가 지금 이 사랑과 헤어지는 과정 속에서 조금 더 담담할 수 있겠지. 이제 이 일기는 이 글을 마지막으로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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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뭐 읽어?"
"어? 아무것도 아니야."
줄리안, 오늘 우리 외식할래? 나 된장찌개 먹고 싶어. 된장찌개? 너 그런 음식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냥, 옛날에 어떤 사람이 만들어줬는데 그건 맛있더라고.
팔짱을 끼고 떠나는 나와 줄리안의 뒤로 내가 급하게 벽난로 안에 던진 일기가 활활 타고 있었다. 안녕, 내 어린 날의 사랑. 무뎌진 사랑이지만 그래도 잊진 못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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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엘인데 에네스는 등장하지 않는 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