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
한참 과제에 빠져서 머리를 끙끙, 싸매고 고민 중인데 느즈막히 일어나 사람으로 변한 김한빈은 노크도 없이 내 방문을 열곤 안으로 들어왔다.
힐끔, 김한빈에게 시선을 주려다가도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럴 틈이 없다. 한참 손을 바쁘게 움직이는데 뒤에서 또 야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 왜. "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더니 김한빈이 내 등 뒤의 침대로 가서 앉는 건지 스프링 소리 같은 게 들려온다. 아마도 앉는다고 하기 보다는 벌러덩 누운 거겠지.
왜, 하고 물었으니 뭐라고 대답을 할까 싶었는데 아무 대답도 없길래 다시 과제에 열중했다.
아, 진짜 뭐가 이렇게 많아. 교수님들은 내가 자기 과목 밖에 안 듣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런 나쁜! 교수님들 같으니라고!
" --아. "
지루함 가득 담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오는 김한빈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손이 멈칫했다.
가끔 김한빈은 저렇게 제 마음대로 날 부르곤 했다. 야, 주인, 그리고 --아. 그리고 아주, 아주, 아주아주 가끔은 ….
" 누나. "
저렇게 누나라고 부르곤 했다. 이름을 불리는 것도 그것 나름의 가슴 떨리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김한빈 저 놈이 '누나' 하고 부를 때면 이상하게도 심장이 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누나라는 호칭을 한 번 알려준 뒤로 김한빈은 저렇게 필요할 때만 누나라고 불렀다.
아주 가끔. 참 이상한 감정이었다. 결국 손에서 펜을 놓곤 의자를 뒤로 돌려 김한빈을 바라보니 김한빈은 나른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 왜 그렇게 자꾸 불러. "
" 뭐 해? "
" 공부. 과제가 너무 많아. "
내 말에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다가온 김한빈은 나를 다시 책상쪽으로 돌리곤, 내 등 뒤에서 날 감싸 안은 듯한 자세로 내가 하던 과제들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골프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골프 코치가 등 뒤에서 껴안아 알려주는 듯한 이 자세는 ….
뭐가 그렇게 신기한 건지 한참 내려보던 한빈이는 제 팔로 내 어깨를 감싸 안고는 내 목과 어깨 사이로 제 고개를 파묻으며 웅얼거렸다.
" 이거 다 해야해? "
" 어? 어, 어. 해야지. "
" 나 심심해. "
" 가서 혼자 좀 놀고 있어. "
" 싫어. "
무슨 어리광이야. 하, 하고 짧게 숨을 뱉곤 김한빈이 껴안은 팔을 풀어냈더니 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나 바쁘다니까. 칭얼대지 마. 내 말에 김한빈은 특유의 불만 가득한 표정이다. 뭐. 그런 표정 지으면 어쩔 건데.
" 너무하다. "
" 나 이거 내일까지 다 해야해. "
" 씨 …. "
불만 가득한 김한빈은 다시 내 침대로 돌아가더니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린다. 애써 그런 김한빈을 못본 척, 다시 펜을 잡고 과제를 시작했다. 과제가 한 장, 두 장 빼곡히 채워지고, 다음 장으로 막 넘어가려는 때에 또 김한빈의 다정한 목소리가 날 불러왔다.
" --누나. "
아, 쟤는 진짜.
" 나 배고파. "
저 늑대를 어떡하면 좋을까.
결국 펜을 놓고 몸을 일으키니 김한빈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몸을 일으켜 내 옆으로 걸어왔다. 자연스레 어깨에 팔을 거는 행동에 어깨를 으쓱 하곤 부엌으로 향하니 이리 가도 졸졸, 저리 가도 졸졸, 내 곁만 따라온다.
" 정신 사나우니까 좀 앉아있어. "
" 나도 옆에서 볼래. "
" 가만 있는게 도와주는 거야. "
" 어째서? "
흔히 쓰는 표현이 이해가 안 되는 건지, 한쪽 눈썹이 찡그려진 표정이 귀엽다.
새어나오는 웃음에 김한빈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곤 식탁으로 가 있으랬더니, 쓰다듬은 손길이 좋았는지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식탁에 앉아 가만히 기다린다. 이럴 때 보면 진짜 애 같다. 늑대일 때도 되게 작던데, 많이 못 먹어서 그런 건가 …. 갑자기 뭔가를 많이 먹여야 겠다는 사명감이 불타오르는 느낌이 든다. 엄마의 마음이 이런 걸까?
" 이거 싫어. "
기껏 볶음밥을 만들어 앞에 놔줬더니 인상을 팍 쓰고는 고개를 젓는다. 저 얼굴은 툭하면 불만 가득 찬, 저런 인상 쓴 얼굴이다.
안 봐도 뭐 때문인지 알겠어. 안 돼, 하고 듣지도 않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아예 숟가락을 잡을 생각도 않는다.
" 그래도 먹어. "
" 당근 싫어. "
" 당근이 왜 싫어. "
" 아, 그냥, 진짜, 당근 싫다. "
뚱한 표정으로 당근과 나를 번갈아 보는 김한빈.
미간에 주름을 팍 짓곤 마주앉은 김한빈의 손에 숟가락을 억지로 쥐어줬더니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는 밥만 뒤적뒤적거린다. 어째 모양새가 당근을 빼내는 것 같아서 유심히 지켜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당근을 빼내서 그릇 밖으로 휙휙 버리고 있다.
" 아, 진짜. 당근 먹으래도. "
" 싫다는데 왜 자꾸 넣어줘. 당근 싫어. "
" 당근이 대체 왜 싫은데. 다른 건 잘만 먹으면서 왜 자꾸 당근은 싫대. "
" 그냥, 특이한 맛 나잖아. "
평소엔 더 특이한 것들도 먹는 놈이!
김한빈은 늑대라서 사실 처음엔 무얼 줘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생고기를 줘야 하나 싶다가도, 일단 눈앞에 보이는 김한빈은 사람인데 …. 혹시나 해서 집에 있던 아무 음식이나 줬는데도 다행히 김한빈은 아무런 탈 없이 잘 먹었다. 늑대가 되었을 때는 또 생고기만 먹는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덕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동네 마트의 식육코너 아주머니와 친해질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당근을 먹을까. 한참을 고민하며 몇 숟가락을 입에 넣곤 우물거렸다. 한빈이를 바라보니 어느새 당근은 그릇 밖으로 다 탈출해있고, 당근 없는 볶음밥만 한 입, 두 입 먹고 있다. 저 편식쟁이를 어쩌면 좋아.
" 당근은 진짜 안 먹을 거야? "
" 먹으면 뭐 해주게? "
턱을 괸 채로 고개만 들어 나를 바라보는 한빈이의 눈빛이 잠깐 반짝였다. 뭐, 뭐.. 승부욕이라도 생긴 듯한 눈빛에 순간 당황. 난 뭐 해준다는 말 안 했는데? 하고 대답하니 금새 반짝이던 눈이 생기를 잃어버린다.
" 뭐 해주면 먹을 건데. 뭐 원하는 거 있어? "
들어나 보자 싶어서 물어본 내 질문에 괸 턱을 풀곤 숙였던 몸을 일으켜 의자에 등을 기댄 한빈이가 씩 웃는다. 하루 종일 불만 가득한 얼굴만 보다 웃는 얼굴을 보니 왠지 또 심장이 '누나' 하고 불렀을 때처럼 간질간질.
" 들어줄 거야? "
" 뭔지 들어보고. "
" 들어준다고 먼저 말해. "
" 그런게 어딨어. "
" 여기 있지. "
" 싫어. 분명 넌 이상한 거 들어달라고 할 거잖아. "
" 이상한 거 아니야. 들어준다고 약속하면 여기 버린 당근 다 먹을게. "
원하는 게 뭐길래..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도통 당근을 안 먹는 김한빈이 당근을 모조리 다 먹을 정도로 원하는 걸 보면 뭔가 엄청난 건가 싶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는 탓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하지만 뭐, 궁금한 건 못 참는 내가 이런 걸 그냥 지나칠 수 있나 뭐. 이상한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싶어서 알았다고 대답했더니 김한빈은 금새 그 어마어마한 양의 당근을 한 숟가락에 담고는 제 입에 넣어 우물거린다.
" 얼레! "
분명히 지금 맛없는 걸 아는데.
김한빈은 참 잘도 씹는다. 마치 맛있는 척 연기까지 하는 모습이 대체 뭘 원하나 싶어서 날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겨우겨우 삼켜낸 한빈이가 물로 입을 한 번 헹구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어온다.
" 다 먹었어? "
" 응. "
" 대박. "
" 나 예쁘지? "
응, 예뻐. 조건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당근을 먹는 모습이 이뻐서 머리를 쓰다듬어 줬더니 또 아기 강아지 마냥 제 머리를 순순히 내밀어온다. 그리고는 쓰다듬는 손목을 잡아 내리더니 손가락 하나를 꼭 쥐어온다.
" 그럼 이제 저거 하지 말고 나랑 놀자. "
" 저거? "
" 공부. 하지 마. 나랑 있어. "
하.. 이 놈을 어찌 하리오.
*
그렇게 같이 놀자던 김한빈의 꼬드김에 못이겨 결국 펜을 놓곤 거실에 마주 앉았다.
그래서 뭐하고 놀까. 하는 내 질문에 김한빈이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연다.
" 우리 놀러 가자. "
" 어딜? "
" 너네 학교. "
" 엥? "
우리 학교? 뭐라는 거야. 그건 절대 안 된다고 고개를 내젓고 거절하려는데 내 입을 막는 큰 손에 의해서 나오려던 소리가 쑥 들어갔다.
" 으브브! 느! 느르그! "
" 가고 싶어. "
학교가 뭐하는 데인 지도 모르잖아. 입을 막혀버린 탓에 눈빛으로 말했더니 그제야 손을 풀어준다.
" 갑자기 우리 학교는 왜? "
" 그냥 나가고 싶어. 거기 가보고도 싶고. "
" 학교가 뭐 하는 데인 지는 알아? "
" 몰라. "
" 근데 왜 가고 싶어. "
" 너 매일 가니까. "
그게 뭐야. 너 매일 가니까, 하고 말하는 김한빈의 눈빛이 왠지 축 가라앉아 있는 듯 느낀 건 착각인가. 내가 늘 가서 심심했나 보다. 김한빈 만큼 눈으로 많은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하는 생각이 드는데 김한빈이 제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로 들이밀어 온다. 덕분에 갑자기 숨을 훅, 참아버렸다.
" 어? 안 돼? "
안 될 건 없는데 …. 가면 재미 없을 거야. 내 말에도 김한빈은 외출이 마냥 좋은 듯 벌떡 일어서서 내 방으로 들어갔…. 아니 내 방은 왜 들어가!
엥? 하는 표정으로 김한빈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더니 내 옷 하나를 침대 위로 던져두곤 제 옷을 갈아입으려는 건지 웃통을 벗고 있다. 적당히 근육이 붙은 그 몸에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힐끔 시선을 뒀다 떼고는 내 침대위를 바라보니 하얀 원피스 하나를 꺼내 뒀다.
" 이건 왜? "
" 이거 입고 가. 이거 예뻐. "
얘는 순 자기 마음대로다.
*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자기 마음대로라고 뭐라 해도 뭐.. 이쁘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어서 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길이 오늘따라 멀기만 하다.
나란히 목적지를 가지고 걸어본 적은 없어서 왠지 모르게 자꾸만 걱정이 앞섰다.
한빈이 뭐, 실수라도 하면 안 될 텐데. 이런 내 걱정과는 다르게 김한빈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후드 주머니에 양손을 넣곤 잘도 걷는다.
처음 제대로 된 외출을 맞아서 머리를 대충 만져주긴 했는데, 아무리 봐도 저 머리가 마음에 들진 않는다. 남자 머리는 처음 만져주는 거라 그런가.
" 여기서 멀어? "
" 금방이야. 저기 하얀 건물 보여? 저기 근처야. "
학교의 입구에 가까워 질수록 복작대는 소리가 더욱 커지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혹시나 김한빈이랑 떨어질까 싶어서 김한빈의 옷깃을 꼭 잡고 걸었더니 잠깐 제 옷깃을 잡은 내 손을 내려다본 김한빈이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내 손을 잡곤 제 주머니로 쏙 들어가버린다. 어, 어, 어!? 놀라서 손을 빼보려고 했는데 밀려오는 인파에 김한빈의 손을 더 꼭 쥐게 되었다.
크다. 김한빈 손.
잡아본 적은 처음인 거 같은데.
" --아! "
순간 멍한 표정으로 김한빈을 바라보는데,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갤 돌렸더니 동기 무리들 중 한 명이 내게 손을 흔들고 있다. 안녕. 하고 같이 손을 흔드니 주위에 있는 동기들이 모두 이쪽으로 시선을 옮겨왔다.
나에 한 번, 그리고 김한빈에 한 번, 둘이 같이 들어가 있는 주머니 속에 시선 고정. 오~ 하는 놀림 섞인 목소리에 급하게 손을 빼냈다. 그랬더니 김한빈이 나를 빤히 내려다본다. 언제 키는 저렇게 컸을까.
" 뭐야. 남자친구야? "
" --이! 솔로인 척 하더니 아니였구만. "
" 아냐. 그런 거! "
아니라고 손을 내젓다가 순간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에 흠칫 놀라 고개며 손이며, 아주 모조리 아니라고 저어버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김지원.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어오는데 곱게 접히는 그 눈에 순간 심장이 아주 빠르게 쿵쿵거렸다.
" 이야. 오늘 예쁘다 ---. "
그 한마디에 분명 내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을 것만 같다. 얼굴이 후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물끄러미 그 상황을 지켜보던 김한빈이 갑작스레 제 손을 내 이마에 얹었다.
" 아파? "
" 어, 어? "
" 열 나는데. "
" 아, 아냐. 그, 그런거. "
가슴도 콩닥콩닥 뛰고. 열도 오르고. 김지원을 보면 진짜 늘 그랬다. 아마 이게 좋아한다는 증거인 거 같았다. 한 번도 좋아한다 입 밖에 꺼내본 적 없었지만 김지원 앞에서는 늘 티가 났다. 가까이 다가오는 김지원의 모습에 수줍게 웃는데 김한빈의 손이 이마에서 떨어질 줄은 모른다. 힐끔, 김한빈을 바라보니 내게로 시선이 고정된 그 모습이 낯설다. 심각한 표정의 한빈이에게 괜찮아, 하고 입모양으로 말해주곤 손을 내게서 떨어트렸다.
" 오늘 어디 가? "
" 어? 아, 아니. 그냥 학교 잠깐. "
" 그런데 그렇게 예쁘게 입고 온 거야? 평소에도 그렇게 하고 다니면 좀 좋아. "
" 자주 입고 다닐 …까? "
" 엉. 예쁘네. "
예쁘네, 하면서 웃어주는 김지원에 흐, 하고 나도 모르게 바보같은 웃음을 흘렸다. 같이 웃어주던 김지원의 시선이 김한빈에게로 닿았다. 이쪽은 누구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뭐라고 소개해야 하나 망설이는데, 대뜸 김한빈이 뭐라 말을 해온다.
" 싫어. "
" 어? "
" 싫다고. 저 사람. "
여기까지 쓸려던 게 아닌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튜)
읽어주시는 분 많아서 좋네요 ㅠ.ㅠ
더 늑대같은 모습은 후에 많이 보여드릴게여 흐흐
그럼 한빈이 꿈꾸면서 좋은 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