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닥거리다가 함께 잠이 든 그 날 밤 이후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먼저, 김한빈은 자꾸만 내 방에 침입했다.
혼자 있을 때에 노크도 없이 내 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늘 그래왔던 거라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함께 잠든 밤 이후였다.
김한빈은 내가 잠든 틈을 타서 시도 때도 없이 내 침대로 파고들었다.
분명 사람의 모습으로 제 방에 자러 가는 모습을 봤는데,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눈을 뜨면 품에 안긴 늑대를 발견하고 놀라 깬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지 말라고 혼을 냈더니 돌아오는 김한빈의 반응이 어이가 없다.
" 거기서 자는게 좋아. "
" 네 침대 따로 있잖아. "
" 그래도 거기가 더 좋은데. "
" 웃겨, 진짜. 그래도 나랑 같이 자는 건 안 돼. 아침에 깰 때마다 놀란단 말야. "
" 왜 놀라? "
" 품 안에 늑대가 있다는 게 어떻게 적응이 돼. "
" 매일 보는 늑대인데 왜. "
" 안 돼. 하여튼, 하여튼 안 돼! "
" 싫어. 거기가 좋아. "
" 이유가 뭔데? "
그리고 두 번째, 김한빈의 서툰 표현은 이전보다 보다 솔직해졌다.
" 누나가 좋아서. "
돌아오는 대답에 순간 멍해진 정신을 부여잡고 허얼, 하며 의미 없는 소리를 내뱉었더니 김한빈이 킥킥 웃는다.
표정 되게 바보같아.
한빈이의 말에 씨이, 하고 김한빈을 살짝 흘겨보았더니 김한빈이 웃으며 내가 늘 제게 해주는 것처럼 내게로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덕분에 헝크러진 머리가 시야를 가려온다.
이건 늘 내가 해주던 거였는데.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고 헝크러트릴 때마다 그 느낌을 좋아하던 한빈이는 어디 가고,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커버린 한빈이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헝크러트린다.
" 이거 하지 마. "
" 왜? "
" 이건 내 꺼야. 내가 너한테 해주는 거. "
" 그게 뭐야. "
" 너가 나한테 이렇게 하니까 이상해. 넌 다 커버렸는데 내가 어려진 기분이야. "
내 말을 듣고 있던 한빈이는 내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정리하자 손을 뻗어 함께 흐트러트린 머리를 정리해준다.
그 손길이 좋아서 내 손을 떼곤 가만히 받고 있었더니, 한빈이가 또 웃는다.
바뀐 것 세 번째, 불만 가득하던 김한빈의 얼굴에 이상하게도 웃음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 이렇게 가만히 있으니까 꼭 그거 같다. "
" 뭐? "
" 유…. "
" 유? "
" 그거. 그, 아, 어제 책에서 본 건데. "
" 뭘 말하는 거야. "
" 노란 모자 쓴 애기. "
" 아, 유치원생? "
내 말에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김한빈.
네 번째로 김한빈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말은 쉽게 하지만 글을 읽는 법, 쓰는 법을 알 리가 없었던 김한빈에게 얼마 전부터 천천히 글을 알려주기 시작했더니 습득하는 속도가 정말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글을 쓸 수 있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책을 읽을 수도 있었다. 책 내용도 제법 잘 이해하는 듯 했다. 다만, 내가 쓰는 단어들에 영향을 많이 받는 건지 평소에 내가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 예를 들면 방금 쓴 '유치원생' 이란 단어 같은 것들은 잘 기억해 내지 못하곤 했다.
김한빈이 이렇게 내 말에서 뭔가를 배운다는 걸 알고 안 좋은 말 쓰는 걸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중인 건 안 비밀.
" 유치원생이라니! "
" 책에 나오는 유치원생은 혼자선 뭘 못 해. 그래서 자꾸 다른 사람이 다 해줘. "
" 나는 머리 정리하는 걸 못 해서 너한테 맡겨둔 게 아닌걸. "
" 그럼? "
" 음…. 그냥, 누군가 이렇게 머리 만져주는 게 되게 오랜만이라 기분 좋아서. "
" 이렇게 만져주면 기분 좋아져? "
" 응. 잠오는 느낌도 들고. 아, 엄마 생각 난다. "
머리를 매만져주는 한빈이의 손길이 포근해서 나도 모르게 절로 엄마, 아빠 생각이 났다.
대학 생활을 위해 혼자 이곳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처음 떨어져 지내게 되었을 때에는 툭하면 엄마에게, 툭하면 아빠에게 전화하곤 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게 너무 없어서. 하지만 학교 생활이 바쁘고 내 나름의 생활을 지내다 보니 (게다가 한빈이까지 들어오고 나니까 신경 쓸 것이 더 많아졌다.) 엄마랑 아빠에게 전화하는 게 어느샌가 뜸해지게 되었다. 한빈이 덕분에 문득 떠오른 엄마가 보고 싶어서 괜히 마음이 울적해 진다.
조금 있다 전화해 봐야겠다, 하고 마음을 먹는데 갑자기 세게 풍겨오는 김한빈 특유의 향기에 몸을 흠칫, 작게 떨었다.
" 향기 좋다. "
내 어깨와 목 사이로 제 얼굴을 가져간 김한빈이 나즈막히 내뱉는 목소리가 가까이 있던 귀를 타고 울리며 전해진다.
아직 내 머리를 만지고 있던 한빈이의 손가락 사이로 내 머리카락이 스르르 빠져나간다.
김한빈은 이렇게 자꾸만 예고도 없이 제 몸을 내게 가까이 가져오곤 했다.
이 늑대랑 살면서, 진짜, 심장이 하루라도 안 콩닥거린 날이 있을까.
늘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려곤 하지만 당황한 내 몸은 내 의지와는 다르게 바보 같이 말을 더듬었다.
" 너, 너랑 같은 향이잖아. "
" 아냐. 다른 향이야. "
" 너랑 나랑 같은 비누, 같은 샴푸, 같은 바디샤워를 쓰는데? "
" 그거랑 달라. 너한테서 나는 향기가 있어. "
한빈이의 말에 팔을 코에 가져가 킁킁댔다. 아무리 맡아도 특이한 향기같은 건 안 나는 거 같은데, 김한빈의 표정은 꽤나 진지하다. 킁킁대는 내 모습이 웃긴지 한빈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다시 한 번 향기를 맡던 한빈이가 내게서 제 얼굴을 떨어뜨리더니 말했다.
" 기억해 둘게. "
" 어? "
" 이제 어디서든지 너 찾을 수 있겠다. "
그리고는 다행이라는 듯 웃는 그 모습에서 순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마지막으로 바뀐 것은….
김한빈과 점심을 먹기 위하여 마주보고 앉은 그 때,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에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휴대폰 속 화면으로 향했다.
익숙한 번호, 익숙한 사진, 그리고 익숙하지만 또 익숙하지 않은 이름.
'김지원' 이라고 뜬 화면에 순간 숟가락을 들다 말고 온 몸이 굳어버렸다.
굳어버린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빈이의 시선도 휴대폰 속 화면에 닿더니, 전화를 건 쪽의 이름을 읽고는 한쪽 눈썹이 일그러진다.
숟가락을 놓고는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뭐 해.
" 어? 나 지금 밥…. "
- 벌써 먹었어?
" 아니. 이제 먹을 생각인데. "
- 잘 됐다. 아직 안 먹었으면 나랑 먹자.
" 지금? "
- 엉. 나랑 먹자. 밥 먹고 뭐 해? 오늘 할 거 있어?
" 딱히 할 게 있진 않은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
- 그럼 나랑 영화 볼래?
바뀐 것 다섯 번째.
김지원을 향한 내 짝사랑은 점점 '짝사랑'을 벗어나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김지원의 목소리에 심장이 쿵쿵대다가, 영화를 같이 보잔 김지원의 물음에 얼굴로 열이 확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 얼굴 터져버리면 어떡하지!
빨개진 얼굴로 땅만 바라보며 발을 동동,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나를 보는 김한빈의 표정이 참 다이나믹하다.
뚱하다가, 뭔가 불만 가득한 표정이다가, 눈썹이 잔뜩 꿈틀거리다가, 이젠 아예 대놓고 턱을 괴곤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 그래. "
내 대답에 김지원은 장소, 시간을 말했고 몇 마디의 말이 더 오고 간 후에 전화가 끊겼다. 짧게 끊긴 전화에도 멍하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한 채로 쥐고 있으니 김한빈이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본다.
" 야. "
불만 가득한 김한빈의 목소리에 한빈이를 바라보니,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건지 뚱한 표정이다.
" 왜 그렇게 뚱한 표정이야? "
" 김지원 싫어. "
" 내가 너보다 누나면 얜 너보다 형이야. 김지원 아니고 지원이 형. "
" 형은 무슨. "
" 김지원이라고 하면 혼나, 너. "
내 말에도 들은 척 만 척. 짜증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밥이나 먹어. 하는 한빈이의 말에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니 밥으로 시선을 돌렸던 한빈이가 또 다시 나를 바라본다.
" 미안. 나 나가야 해. "
" 어디? "
" 영화 보러. "
몸을 일으켜서 얼른 내 방으로 달려가 옷장 문을 열었다. 뭘 입고 가야하나, 신발은 또 뭘 신지? 오랜만에 화장을 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자꾸만 들뜬다.
평소 좋아하는 옷을 몇 가지 꺼내서 거울에 대보는데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 무슨 옷을 입어야 할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내 방문 쪽으로 삐딱하게 기대 선 김한빈이 그 특유의 날카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 김지원 만나러 가? "
" 김지원 아니라 지원이 형이야. "
" 가지 마. "
" 왜? "
" 걔 만나지 마. 걔 싫어. "
김한빈은 대체 왜 저렇게 김지원을 싫어하는 걸까.
가지 말라는 한빈이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옷을 고르다가 예전에 한빈이와 학교에 갔을 때 입고 갔던 하얀 원피스가 눈에 밟혔다. 이거 입고 갔을 때 김지원이 예쁘다고 그랬었는데. 그 옷을 입을까 해서 옷을 들고 몸에 댄 채로 거을 앞에 섰더니 김한빈이 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게 또 반말이야.
" 그거 입지 마. "
" 또 왜, 이게 이쁘단 말야. "
" 입지 말라면 입지 마, 좀. "
" 몰라. 너 나가. 옷 갈아 입을 거야. "
나가라는 말에도 끝까지 버티고 서있는 김한빈을 억지로 밖으로 밀어내곤 문을 잠궜다. 한빈이의 말은 못들은 척 하얀 원피스로 옷을 갈아 입고 오늘의 기분에 맞춰 화장까지 마음에 들 정도로 끝마쳤다. 정말 특별한 날에만 끼는 귀걸이까지도. 한참동안 준비를 마치고 방문을 여는데, 여태 거기서 버티고 있었던 건지 김한빈이 벽에 기대 선 채로 나를 힐끔 바라보다 내가 입은 원피스에 시선을 고정한다.
" 이거 입지 말랬잖아. "
" 내 마음이야. "
" 너 진짜 …. "
" 왜 이렇게 뚱해져선 자꾸 잔소리야. 나 나갔다 올게. 늦지 않게 들어올 거야. "
" 그럼 나 밥 혼자 먹어? "
맞다. 같이 밥 먹으려고 해놓곤 한빈이 혼자 두고 나가야 하네. 미안한 마음에 한빈이를 바라보다 양손으로 한빈이의 양 볼을 잡고는 살살 쓸어주었다. 한 쪽은 아직 어린 피부의 부드러운 느낌이 느껴지는데, 다른 한 쪽은 덜 나은 상처 때문에 붙인 반창고가 한빈이의 피부에 내 손이 닿는 것을 막고 있다. 볼을 쓰다듬으니 잔뜩 날이 서있던 그 눈빛이 조금은 가라 앉은 것도 같다.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어색하게 웃곤 한빈이에게 말했다.
" 미안.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오늘만 혼자 먹어. 나 나가봐야 해. "
" 안 가면 안 돼? "
" 응. "
" 뭐 하러 가는데. "
" 김지원 보러. "
내 말에 한빈이는 아무 말이 없다.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시간을 확인하니, 혹시 늦을까 해서 맞춰둔 알람이 울리고 있다. 이제 진짜 나가야 해. 혼자 밥 먹고.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한빈이에게 잔소리를 남기곤 모처럼 구두도 꺼내 신었다. 물끄러미 내가 나가는 것만 바라보고 있는 한빈이에게 손을 흔들고는 얼른 문밖을 나섰다.
아, 왠지 늦을 거 같아. 늦기 싫은데.
걸어가는 발걸음이 왠지 평소보다 더 들뜨고 가볍다.
현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쇼파에 드러누운 한빈이 하, 하고 한숨을 쉬었다.
입지 말래도 끝까지 입고 나간 원피스. 자꾸만 한빈의 머리 속에는 그 원피스가 눈에 밟혔다.
더해서 설레하던 그 모습, 그리고 김지원.
한빈이 제 팔로 제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 아 진짜, 짜증나게…. "
♡
헐 첫 초록글!!!!!!!!!!!!!!! 4화가 초록글에!!!!!!!!!!!
작성하고 왔더니 이런 행복한 쪽지가 와있네요 ㅜ.ㅜ 이 이쁜이들!
여러분 진짜 사랑합니다..♡ 혼자 즐기려고 쓰는 글에 이렇게 많이 읽어주시니 정말 감동 ㅜ.ㅜ
앞으로도 열심히 열심히 쓸게요,♡
암호닉은 언제나 받고 있으니 언제나 신청해주셔도 되구요!
아, 기분 좋아요 ♡>.<♡
기분 좋아서 주절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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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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