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부터 꾸물거린다 했더니 그 날 밤은 내내 비가 쏟아졌다.
가을비가 쏟아진 후의 날씨는 여느 때 보다 추웠고, 비가 내린 만큼 운동장도 촉촉이 젖어들었다.
오늘도 제 책상에는 헛개수, (어떻게 회식한 걸 알았는지 있더라.) 그리고 편지가 놓여있었다.
오늘은 편지가 조금 달랐다. 정말로 애정어렸던 그 편지가 아니라 안부를 묻는 편지. 그 뿐이었다. 왠지 서운해진 로빈이었다.
줄리안은 밤 내내 로빈에 대한 미안함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나는 아직 어리구나,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제 마음이 그에게는 짐이었다.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멋진 사람이 되자.
[기다려 주세요. 내가 당신을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자라서 더 멋진 남자가 되면, 그 때는 내 마음을 받아줄래요?]
밤새워 고민하고 고민한 말이었다. 아직은 아니다. 내일은 하루종일 생각이 많을 그에게 혼자의 시간을 내어주고 싶었다.
이 편지는 좀 더 준비가 되면, 그 때 전해줄거라 자신의 서랍 속 깊숙한 곳에 아무도 모르도록 꽁꽁 숨겨둔 줄리안이다.
시간표엔 내내 줄리안의 반은 눈에 띄지 않았고, 복도에서도 단 한 번 마주치지 못 했다.
또 어제처럼 애를 태우게 한답시고 도시락을 싸 와서는 나타나지 않다가 나타날 예정인지, 아니면 영영 안오는 건지.
혹시 나에 대한 마음을 포기한 걸까, 헛개수가 덩그러니 놓인 책상을 바라보다가 로빈이 고개를 떨구었다.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정말로, 정말로 이제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거니?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시 나온 교무실 밖에서는 하루만에 보는 줄리안이 제 또래 여자아이와 다정히 걷고 있었다.
로빈은 왠지 열이 올랐다. 머리는 아니라고 하는데, 가슴은 자꾸만 고슴도치가 굴러다니는 듯 콕 콕 아려왔다.
아, 돌아섰구나. 나는 한 순간의 불빛이었구나. 로빈은 체념했다. 이제 내가 마음을, 접어야겠구나.
일년 내내 자신을 따라다닌 줄리안이 싫지 않았다. 귀여웠다. 그래, 처음에는 그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겠다. 노란 금발 머리가 바람에 소리를 내며 흩어지면 황금빛 들녘이 펼쳐진 듯 아름다웠다.
그 자신을 부를 때 마다 애정어렸던 목소리가, 좋아진 건.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고 하루 내내 줄리안을 다시는 보지 못 했다. 여자아이, 예쁘던데.
기운이 없었다. 또 회식하자는 메시지가 떴지만, 가지 않았다. 몸은 잘 모르겠지만.
마음이, 마음이 너무나 아파서. 그냥 집으로 가서 바로 잠들어 버렸다.
자꾸 떠오르면 더 아플테니까. 어른인 내가 보내주어야 하니까.
아침에는 기운 없이 등교를 했다. 혹시나, 일말의 기대를 했던 로빈은 책상 위의 공허함에 다시 한 번 허탈했다.
매일 아침 나를 반기던 너의 손글씨도, 안 좋아하지만 꼬박꼬박 마시던 커피도, 좋아한다고 했던 사탕도, 아무것도. 없었다.
진짜 끝이구나. 잘 됐다. 잘 됐어. 그 애 인생을 너 하나 때문에 망칠 일이 사라졌잖아 로빈 데이아나, 잘 된 일이야.
그런데 왜 자꾸만 슬픈지 모르겠다. 이제라도 마음을 열고 다가가고 싶었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함께 있었던 코스모스가 피었던 정자로 달려나갔다.
이틀 새 내린 비에 코스모스가 다 시들어있었다. 그게 꼭 자신 같아서 또 슬펐다.
벌이 다 떠나간 뒤에야 피어버리는 꽃이라니. 이미 의미가 없었다.
다행히 아직은 수업시간이었다. 마음 놓고 울 수 있어서, 그냥 울었다.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왜 진작 말 하지 못 했을까, 왜 바보같이 너를 밀어내기만 했을까. 눈물이 눈꺼풀을 비집고 흘러내렸다.
하늘이 다시금 비를 내릴 준비를 했다. 소나기다, 한 순간 지나갈, 그렇지만 여파는 너무나도 큰.
우산은 당연히 들고 오질 않았다. 이럴 줄은 몰랐다. 울음이 그새 멈춘 듯 하더니 다시금 흘렀다.
마지막 교시가 끝나고 저녁시간, 줄리안은 교무실로 향했다. 내 마음을 말하기에는, 지금이 가장 좋을 것 같아서.
텅 빈 교무실을 지키는 것은 두 사람 뿐이었다. 담임인 장위안과 타쿠야. 로빈은 어디에 있지.
"선생님, 로빈 선생님은 어디 가셨어요?"
"아까 어디 막 뛰어가던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네? 언제요?"
"얼마 안 됐어, 한 5분 전?"
"어디 같이 갔던 곳 없어? 거기로 가는 것 같던데~"
타쿠야가 너스레를 떨며 덧붙였다. 줄리안은 당황한 듯 한참을 생각하다가 비가 오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palsambleu! 우산을 들고 황급히 달려 나갔다.
하루종일 그를 위해 고민했다. 언제쯤이면 그가 부담스럽지 않을까.
그러다가 제가 못 참겠어서 오늘 말하려고 일부러 아무것도 안 올려놓고, 제가 직접 주려고 시간을 끌었는데.
괜한 짓을 한 듯 했다. 우산을 들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함께한 그 정자로 향했다.
제발, 거기 있어줘. 거기 있어줘요 로빈.
비가 내리니까 더 처량해진 듯 한 기분에 더 눈물이 흘렀다. 그냥 비를 맞았다.
어차피,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감기에 걸려도 괜찮겠지.
마구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려니 여린 살이 아파왔다.
내가 그 애한테 준 1년이라는 긴 시간의 희망고문보다 아프지는 않겠지.
다 벌 받는거야, 솔직하지 못 해서 그런거야. 이렇게 좋아하는데, 눈치채지도 못 하고, 바보같아.
"왜, 바보처럼 비 맞으면서 서 있어요."
비가 멎었다. 마음까지 푹 적셔 가라앉게 만들던 비가, 멎었다.
"너..왜.."
"선생님한테 멋지게 기다려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이게 뭐예요."
"줄리안"
"왜요, 변명이라도 하시려구요? 안 돼요. 이렇게 비 맞으면 감기걸리잖아요."
"좋아해."
"네?"
"좋아한다고. 나, 너를"
이제야 알 것 같더라, 오늘 네가 안 와서 나한테 완전히 마음이 떠난 줄 알았어. 그래서 여기 와서 생각을 좀 정리하려고 했는데..
로빈의 오물거리는 입을 가만히 바라보다 줄리안이 막힌 말문을 다시 터냈다.
"로빈, 눈 좀 감아볼래요?"
"왜..?"
로빈이 물음을 던지며 눈을 감는 순간, 따뜻한 감촉이 입에 닿아왔다.
손인가, 아냐 너무 부드러운데. 그래, 입술이다.
줄리안의 입술이, 로빈에게 맞닿았다. 시간은 그들만을 빼고, 멈춰있었다.
우산은 이미 땅으로 떨어진 지가 오래였다. 서로를 바라며 맞추던 입이 하나, 둘, 셋. 떼어졌다.
비가 점점 멎어가고 있었다. 무겁게 젖어있던 마음은 떨쳐버렸다.
내가 있고, 당신이 있는데.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어요.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던 두 사람이 살짝 미소짓고, 다시 입술을 포개었다.
시든 코스모스 한 가운데, 다시 꽃이 피었다.
나비든, 벌이든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그저 서로가 필요한 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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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조절 미스...로 포인트 조금 높였습니다ㅜㅜ 부담되신다면 다시 내릴게요!!
하 밀당 끝났어요!!! 원래 이게 두 화 분량정도 되는데 오늘밖에 시간이 안 날 것 같아서 미리 많이 써두려고 하다보니 이렇게 됐네요..;_;
이제 둘이 사귀는 일만ㅠㅠㅠ 남았슴다ㅠㅠㅠㅠㅠ 오래가라ㅠㅠㅠㅠㅠㅠ
항상 감사합니다! 쥬똄므!!!
♥암호닉♥
마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