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일주일 전부터 공부를 겨우 잡았다. 공부가 현역 때 보다 더 안됐던 것 같았다.
그나마 잡은 공부도 하루에 두세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결국 수능 이틀 전이 되어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걸 눈치 채고 밤을 새기 시작했다.
사실 눈치를 못 챘던건 아니었다. 그냥 발등에 불이 떨어진걸 보며 '어? 발등에 불이 떨어졌네, 불이 활활 타고 있네!' 이랬던거지.
수능 이틀 전 부터는 하루에 두시간을 자면서 공부를 했다. 그 전에는 정말 거의 하지 않아서 알던 것도 잊어버리고 어디서부터 뭘 해야할지도 막막했다.
억지로 다 잡으려고 하니 더 안됐다. 결국 수능 전날 시험 직전에 볼 노트마저 다 만들지 못했다.
잠은 일찍 자고 아침 일찍 학교에 가려고 했는데 너무 불안해서 밤에 제대로 잠을 못 이뤘던 것 같다.
두시에 자서 5시 20분에 일어났다. 3시간 30분을 잤는데 13시간 30분을 자도 피곤하던 봄, 여름과는 달리 왜 이렇게 오래 잤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수할 때나 이렇게 공부를 해볼걸, 왜 당일날이 되어서야 이랬는지는 모르겠다.
고사장은 우리 집에서 1시간정도 걸렸다. 아침 일찍 엄마와 함께 버스를 타고 수험장에 가는 길에 부족한 잠을 청했다.
7시 20분정도 되어서 도착을 했는데 생각보다 교실에 사람이 많았다. 나름 빨리 온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생각을 고을 수 밖에 없었다.
초콜릿을 미리 까두려고 했다가 시작도 전에 모두 먹어버리고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머릿속에 많이 집어넣으려고 하니 힘들었다.
그래도 단기기억력은 조금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그것마저 아니었으면 진짜 죽고싶었을 것 같다.
생각보다 일찍 보던 것을 집어넣으라고 해서 한 줄이라도 더 볼 걸 후회를 한 것 같았다.
1교시 국어시간.
내 수험번호는 짝수라서 걱정이 많이 됐다. 현역때도 짝수였고 그래서 더 망헀던 것을 내가 잘 알고 있어서 더 그랬다.
다행이도 멘탈을 조금 진정해줄만한 계기가 있어서 멘탈이 깨지려고 할 때 마다 차분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했고, 덕분에 큰 무리 없이 문제를 풀 수 있었다.
풀면서 시간 걱정도 했고, 안 읽히는 문제는 지체없이 넘어갔다. 작년이 너무 역대급이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쉬웠다고 생각만 했다.
생각만 그랬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답을 풀면서 확신을 가지고 적었던게 많이 없으니까. 하기야 내가 공부를 안 했으니까 그렇겠지.
그래도 2월 이후로 국어공부라고는 9월 국어 한 번 푼 것과 운문문학 연계공부 한 번 돌린 것이 전부여서 이렇게라도 푸는건 나름 선방일거라고 생각 했다.
정신 없이 풀다보니 별표 체크하고 넘어갔던 문제들만 남았고 남은 시간은 5분이었다.
어찌어찌 대충 최대한 보면서 답에 가까운 것으로 찍고 넘어갔다. 어떻게 마킹과 가채점표는 다 작성했다.
쉬는시간에는 사회탐구를 공부했다. 그래봤자 딱히 공부한 것은 없었다.
2교시 수학시간.
솔직히 말해서 수학은 전혀 자신이 없었다.
현역때는 그래도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고 기출문제를 풀 때 딱 한 번 뿐이지만 2등급도 받아봤었지만 재수때는 공부를 안 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수학 공부한게 언제인지는 기억도 안 난다. 아마 개념강의도 수학2만 역함수 부분까지만 공부하고 풀지 않았던 것 같다. 확통도 기억 안나고, 미적분은 교재가 새거다.
그런데도 난 어떻게든 될 줄 알았다. 근데 역시는 역시 시험지를 받자마자 머리가 새 하얘졌다.
솔직히 말해서 첫 장 2점 문제들 보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올 초까지만 해도 몇초만에 슥슥 풀고 넘긴건데 이게 맞나? 하고 헷갈렸으니까.
5번 문제부터 막히기 시작했고, 분명히 작년에는 다 풀 줄 알았고 그래도 3점은 다 맞았던 것 같은데 건드리지도 못했다.
결국 대충 아무거나 찍고 엎드려서 잤다. 공부도 포기했다.
점심시간에는 도시락으로 치킨과 전복죽을 먹었다. 다들 속에 좋은 것을 챙겨가라고 했지만 난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위랑 장이 튼튼해서 그래, 라는건 그냥 허세였고 사실 수능때 삼겹살 먹는 사람, 치킨 먹는 사람이 있다길래 나도 허세를 부려보고 싶어서였다.
물론 후회는 안 했다. 정말 너무너무 맛있게 먹었고, 치킨을 좀 더 싸와서 앞뒤 사람에게 나눠주면서 말이라도 걸어볼걸 하는 후회는 했던듯.
밥을 먹고 남은 시간에는 영어 짝수 찍기스킬을 한번 보고 문제를 좀 더 쉽게 푸는 방법을 적어놓은 것을 한 번 봤다.
그리고 그 외에는 또 사탐 공부 했다.
3교시 영어시간.
웃기지만 난 이상하게 자신감이 들었다. 듣기를 치르면서도 이상하게 꽤 잘 들렸던 것 같고(비록 해석은 할 수 없었다.) 문제도 나름 읽고 자신있게 답을 쓴 것도 있으니까.
풀면서 어? 괜찮은데? 나름 나 잘 치는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다. 지금 보면 그냥 아무것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 같다.
영어 시간에도 대충 풀었다. 어차피 자세히 봐도 모르니까 그 시간에 마인드맵처럼이라도 탐구 공부를 하는게 낫겠다 싶었다.
웃기겠지만 쉬는시간에는 잠들어버렸다.
4교시 탐구/한국사 시간.
한국사는 그래도 나름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개념강의를 완강한지 오래되지 않았고 바로 전날 풀었던 한국사 기출문제도 2등급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풀었던 시험지가 아니었기에 어? 이정도면 그래도 4등급은 뜨겠는데? 싶었는데 생각 외로 어려웠다. 뭔 한국사가 이리 어렵나, 나는 사실 매국노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탐구는 생윤사를 선택했다. 현역때는 윤사문을 선택했었고 도표가 너무 하기 싫기도 해서 놀랍지만 법정 윤사로 탐구를 바꿨었다.
근데 6월까지 법정윤사를 공부하다가 암기할게 많아서 화가난다면서 생윤사로 바꿔버렸다.
사실 법정윤사로 바꾸기 직전에 생윤을 하겠다면서 한 번 개념을 돌린 적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공부를 안해서 결국 작년에도 한 윤사를 파기로 결정했고, 생윤은 포기했다.
근데 생윤이 나름 풀만 했다. 다시 말하지만 공부를 전혀 안하고 기억속에는 1월에 공부했던 생윤개념 한바퀴와 세달에 한번 읽었던 개념노트가 전부였다.
나는 뭣도 모르기에 풀 만 했던 것이었다.
오히려 윤사가 굉장히 난관이었다. 나는 공부를 했는데 아는 선지가 없었고 현타가 진득하게 왔다... 윤리를 왜 골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차라리 양이라도 적은 생윤 팔걸 하는 생각 들었다.
현역때는 그래도 늘 고정1 못해도 한개 틀렸던 윤사는 결국 장렬하게 망했다.
5교시 제2외국어 시간.
아랍어 신청해서 대체하겠다고 해놓고 공부를 하나도 안 해서 결국 모조리 찍어버린 제2외국어.
그 시간에 나는 잤다. 그냥 포기하고 집에나 가려고 했는데 혹시라도 잘 찍어서 2등급이 나오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막상 시험지 보니까 2등급은 무슨 2개 맞춰도 감사였다.
수능은 정말 작년과 똑같이 모의고사 치르는 느낌이었다.
치면서도, 치고 나면서도 후회가 됐다. 차라리 애매하게 공부하겠다고 설치지나 말걸, 그렇게 놀고싶었으면 여름까지는 죽어라 놀고 알바나 할걸.
여름부터나 열심히 해볼걸, 100일도 많이 남았다고 작년에 그렇게 말했으면서 왜 안 했는지.
나는 내가 달라질 줄 알았다.
나는 남들과는 달라, 난 잘 하고싶어. 잘 할거야.
여기서 나는 '나'가 아니라 남들의 '남'이었다.
망친걸 알면서도 생각보다 너무 평온했다. 교문을 나오면서 학생들을 기다리는 부모님들을 보니까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먼저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렸는데
버스가 인원이 많이 차있어서 한 대를 보내고 사람들이 가고... 버스가 지연이 되어서 결국 40분정도 기다린 것 같았다.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그제야 수능을 한 번 돌이키고 생각해볼 수 있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괜히 서럽고 눈물이 났다. 내가 너무 싫었다.
후회할 때는 이미 늦었다고 그러지만 나는 진짜 늦어서야 후회를 했다.
조금이라도 공부할걸, 그렇게 하기 싫으면 하루에 6시간이라도 꾸준히 할 걸.
적어도 고등학생들 처럼 아침부터 오후4시까지라도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공부나 할 걸.
재수를 한다면서 독서실을 끊고, 1타 강사를 듣는다면서 프리패스를 끊고, 탐구를 바꾼다면서 교재를 사던 모습이 생각났다.
내가 생각해도 진짜 생각 없이 보낸 1년이었다. 남들이 너는 재수생활이 어땠어? 라고 한다면 난 주저없이 놀려고 재수한 것 같았다, 라고 할 정도로 놀았다.
아침이 되기 직전에 잠에 들고, 아무도 없는 오후 3시에 일어나고.
머리감고 말리고 밥먹고 준비하는데만 어기적 어기적 3시간이 걸리고, 그러다가 폰 잠깐 한다고 한 시간을 버리고.
독서실에 가면 잠깐만 쉬어야지, 하다가 잠에 들어서 하루를 날려버리고.
독서실에서 앉아서 핸드폰을 해도 말리는 사람이 없으니 핸드폰 하다가 나가서 놀다 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삶.
나는 재수하니까, 시간이 많으니까 이건 정말 마법의 말이었다.
자기합리화를 하는 마법의 말.
저 말 때문에 나는 매일 내일 더 하면 되는거지, 하면서 결국 1년을 통째로 날렸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재수를 하겠다고 마음 먹었는지, 진짜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떻게든 뜯어 말리고 싶다.
그런데도 나는 삼수를 생각하고 있다.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을까, 또 내가 합리화 하면서 망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만 든다.
그냥 최저 없는 논술 두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고, 한편으로는 그게 한양대랑 인하대인데 과연 다행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잘 됐으면 좋겠다. 내 20살을 정말로 날려버린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