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없어도 해는 뜨더군요.
숨은 쉬고 밥은 먹고 즐거울 땐 행복하고.
그런데 내가 여전히 같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허나 당신 남겨준 그것 하나만은 분명히 알아 지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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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에게 있어 해 수는 그저 누이의 일부분이었다. 어쩌면 이기적일지 몰라도 백아의 모든 것은 대부분 누이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그래서 해 수 또한 그의 이기적인 생각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누이의 동생 그다음엔 누이의 상처 그리고 누이가 죽은 후엔 누이의 살아있는 유품. 그리고, 그러다가 결국에 지금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백아의 세상을 독자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골칫덩어리 친우. 몇 번 만나지도 않았지만 수는 볼 때마다 관계가 바뀌고 변화했다. 그건 수 본인이나, 수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상황이 자주 변한다는 뜻이었다.
백아는 하늘에 오르기보다 자유로운 바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정치나 머리 쓰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대로 누이를 따라 사는 것에 족했고, 누이가 죽은 이후에는 세상의 즐거움을 찾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똑하고 영리한 머리는 때때로 생각하기도 전에 결론을 도출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본능적인 감각에 의해 이성이 어떤 것을 떠올려야 할 때 특히 그 영리함이 빛을 바랬다. 백아는 사람을 잘 알았다. 정확하게는 사람과 사람 사이 감정과 성향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남들보다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백아가 제 골칫덩어리 친우의 성향을 떠올려 봤을 때. 중심을 잡기도 전에 빠르게 변하는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백아 스스로에게, 해 수에게, 그리고 이미 떠난 누이에게. 아주 모르는 사이였다면 상관없겠지만 지금 수는 누이의 유품이자 친우였다. 백아의 무관심은 전적으로 안전에서 기인했고 스스로에게 있어 한 점의 상처나 불합리가 있다면 그는 언제나 태도를 바꿀 의사가 있었다. 그건 백아가 소중 해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야, 네가 축제 구경도 시켜주고 다 컸네! 우리 백아.”
“어이구, 쥐 콩만 한 게 술 마시고 꼬장 부리던 건 기억 안 나나 봐?”
“야, 꼬장을 나만 부렸냐? 너도 부렸지!”
“그래, 알겠으니까 구경이나 해.”
하지만 언제나 가만히 있었던 백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닥쳐올 수의 불행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증거나 증명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정 유감스럽게도 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은 언제든지 수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가 수의 불행이 될지 백아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수에게 불행을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백아에게는 그런 잔인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닥쳐올 불행과 아픔에 있어 약간의 위로를 먼저 쥐여주기로 했다. 그것이 백아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거였으니까. 축제를 즐기고 풍류에 빠지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영롱하니 세상의 모든 고운 것들을 보여주는 것.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피 할 수 있는 것들. 백아는 극심히 아파 할 수를 위해 미리 도피처를 보여주었다. 부디 그때,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어떤 것도 견딜 수 없을 때. 잠시의 도피가 되길 바라며 백아는 다가올 불행에서 잠시 눈을 감고 외면하기로 했다.
“진짜 예쁘다. 곱다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아.”
“나도.”
“응?”
“아무것도. 이게 고우면 하나 사줄까?”
“에이, 괜찮아! 나중에 돈 가지고 와서 사지 뭐.”
“어허, 모름지기 사고 싶은 건 그때 사라고 했다. 부담가지지 말고 받아, 사주고 싶어서 사주는 거니까.”
백아는 수가 말리기도 전에 은장도를 계산한 뒤 수에게 건넸다. 수는 미안하다는 듯이 망설이자 백아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수의 손에 은장도를 쥐어주었다. 세상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꼭 챙기고 있다가, 불한당이 있다면 찔러버려라. 백아는 무척 근엄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신하에게 하사하는 듯 한 행동을 했다. 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소탈하게 웃다가 결국 장난스럽게 고개를 푹 숙이면서 왕에게 하사 받는 듯 두 손으로 은장도를 받았다. 연 분홍색의 은장도는 나비모양의 수가 놓아져 있었고 작은 칼날은 몹시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수는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은장도를 살펴보다 곧 품속에 넣었다. 한적하니 길을 걷는 두 사람 사이로 한적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나쁜 놈 있으면 이걸로 찌르라고?”
“응, 너 힘세잖아. 찌르고 나한테 도망쳐 와.”
“어이구, 못 하는 말이 없어요. 그러다가 나 잡혀가면?”
“내가 황잔데 뭘.”
“이래서 신분제가 문제야. 저 권력남용.”
“야! 너…. 그거 함부로 하면 안 되는 말인 거 알지?”
“에라이, 이놈의 동네는 말도 못해요. 말도.”
놀란 백아는 수를 짐짓 혼내는 바라보다 아무 잘못 없다는 듯 당당한 수의 얼굴에 결국 허탈하게 웃으며 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니. 그러자 해 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친구 주제에 어린애 취급한다며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백아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수는 그런 백아를 보며 억울한 듯 표정을 찡그렸으나 결국 허탈히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평화로운 축제의 밤은 마치 영원을 약속하듯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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