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 동기생 고상안이 기록한 이순신.

"其言論術智固是 緻亂之材而容不豊厚相 又寨脣私心而爲非福將也."
“말과 논리와 전술과 지모가 굳고 바르며 난리를 진압할 만한 재주이나, 용모가 풍만하고 후덕하지못하며 관상도 입술이 말려 올라간 듯 뒤집혀 福將은 아니라 여겼다.” (운영자역)
이순신과 같은 해에 무과에 합격한 동기생 고상안(高尙顔)이 충무공을 묘사한 문장이다(사진). 삼가현감이던 그는 한산대첩 2년 뒤인 1594년 3월 수군 선발 시험감독관으로 한산도에서 반달을 머물며 장군을 만난다. 그는 나중에 『태촌집』이란 문집에 묘사를 남겼다.
원균ㆍ이억기에겐 꽤나 비판적인데 구사직은 후하게 점수를 줬다. 그런데 동갑에 동기인 충무공에 대해선 평가가 애매하다. 영웅적인 면을 평가하면서도 용모는 ‘웅혼한 기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썼다. 그렇다고 일부러 용모를 깎아내린 것 같진 않다. 그는 장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죽은 통제사가 산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을 쫓아냈다’고 극찬한다. 원문을 해석한 동양대 강구율 교수는 “객관적인 글”이라고 평가했다. 이 기록이 장군의 얼굴을 묘사한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구국의 영웅’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기록이 있기는 하다. 공의 친구인 류성룡이 자신의 글 『징비록』에 남긴 “얼굴이 단아하여 수양 근신하는 선비 같다(容貌雅飭. 如修謹之士)”란 기록이다. 그런데 이는 선비를 묘사하는 상투적 표현으로 간주된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수준은 높다는 평가를 받고 큰 공을 세운 공신의 영정은 공식적으로 그렸음에도 장군 생전 초상이 없는 것은 미스터리다.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직접 만났던 고상안, 이순신의 친척이었던 이분과 윤휴가 기록했던 사실적인 모습이 있다. 고상안은 이순신의 얼굴을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못했고, 입술이 뒤집혀서 복장(福將)이 아니다"라고 했다. 조카였던 이분은 "겨울에 비로소 무예를 배웠는데 팔심과 말 타고 활쏘기에 아무도 따를 자가 없었다"며 22세 이순신의 모습을 말했다. 윤휴는 임진왜란 중 이순신을 "큰 체구에 용맹이 뛰어나고 붉은 수염에 담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순신 스스로 남긴 기록도 있다. "오랫동안 군영에 있으면서 터럭이 모두 세었으니 훗날 서로 마주해도 전날의 제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 종합하면 청년 이순신은 키가 크고 당당한 체구의 호걸 모습이다. 반면 전쟁 기간 중 중년 이순신은 온갖 고뇌, 시련, 스트레스로 인한 잦은 병치레로 몹시 상해 야위고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불패의 장수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순신의 초췌한 얼굴은 중년 남자도 화장을 해야 하는 사회, 명품으로 치장을 해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내면에서 풍기는 아름다움은 오늘날 그 어떤 꽃중년 신사보다 낫다.
겉모습은 세월과 상황에 따라 바뀐다. 기품있게 변하는 사람도 있고, 이순신처럼 볼품없게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 바르게 단련된 사람이라면 뿜어내는 인생의 향기는 같다. 인내와 지혜로 갈고 닦은 보석이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관상을 바꿔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이지만 관상보다 마음을, 삶의 자세를 바꾸는 것이 운명을 바꾸는 첫걸음이 아닐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시련을 이길 수 없다. 얼굴을 바꾸기보다 마음 가꾸기를 먼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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