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친과 현남친 사이 03 삐잉 시점 모처럼의 데이트였다. 구준회가 싫어진 건 아니었지만 요 며칠간 기분도 우울하니, 그닥 만나고 싶지 않아서 데이트를 걸어오는 구준회를 밀어냈었다. 가지고 싶어했던 구두를 선물해오는 구준회에 마음은 또 한번 기울었지만. 여느 연인들처럼 영화를 보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고, 밥을 먹고, 마지막으론 카페까지. 한참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다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구준회의 호의를 거절하곤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멀어져가는 구준회의 넓은 등판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에서 울리는 진동에 화면을 쳐다봤다. '김진환' 익숙한 이름이었다. 일명 부랄친구라고나 할까. 보나마나 술 한잔 하자며 건 전화가 분명했지만 모르는 척 전화를 받곤, 웬일이야? 혹시가 역시라고, 김진환은 오늘도 역시, '괴롭다 괴로워. 술이나 한 잔 하자. 우리 가는 포차로 빨리 와!' 지 할말만 하고 끊는다. 마침 시간도 인간이 가장 술을 마시기 좋은 밤 8시다. 나는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포차로 향했다. 얼마나 마셨을까, 완전히 취해버렸다.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김진환의 얼굴마저 일그러져 보였다. 김진환은 정신 못 차리고 허우적 대는 내 꼴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집에 가자며 내 팔을 잡아끄는 김진환이 괜히 얄미워서 잡힌 팔을 애써 빼냈다. 옆에서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을 김진환이 눈에 선했지만, 만취 상태의 나는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김진환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굴하지 않고 나는 발걸음을 옮기며 소리쳤다. 아디오스! 얼마쯤 걸었을까, 오늘따라 집으로 가는 길은 더욱 더 멀게만 느껴진다. 술에 취해 무거워진 몸뚱아리와 차가운 밤공기가 만나 몸은 더 시려웠다. 팔짱을 낀 채 비틀비틀, 간신히 앞에 있는 장애물만 피해서 걷는 중이었다. 카톡! 발랄한 알림음이 울렸다. 시린 손을 비비적대며 핸드폰을 꺼내 카톡에 들어갔다. 누가 이 늦은밤에 카톡을 보내나, 하고 봤더니. 생각지도 못하게 온 김한빈의 카톡이었다.
한빈 시점 하루종일 에스크에 달린 질문에 대해 생각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 했다. 한달 정도 사귄 남친. 그 말은 나를 완전히 구남친으로 돌려버렸다는 것이다. 구남친이라는 수식이 너무도 쪽팔린 나머지 오후 내내를 폐인처럼 지새우다가 결국 연락 한 사람은 김지원이었다. '힘들어 뒤질 것 같아. 술 한잔만 사주라.' 한심한 부탁에 기꺼이 응해주는 김지원이 고마웠다. 잠옷 차림 그대로 스냅백 하나만 눌러 쓴 채 집 앞 호프집으로 향했다. 부지런한 김지원은 역시 먼저 와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날 발견하자마자 손을 흔드는 그 익살맞은 얼굴이 왜 그렇게도 반가웠는지, 하마터면 눈물까지 날 뻔했다. 사실 김지원과 단 둘이 보는것도 김삐잉과 헤어진 뒤로는 처음이었다. 꼬추들의 우정은 역시 연락이 잦든 뜸하든 한결 같다. 김삐잉의 김 자도 꺼내지 않는 김지원이 조금 많이 고마웠다. 술까지 들어간 상태에서 김삐잉의 이름을 들으면 정말 대성통곡을 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는 내내 김지원은 다운 된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여자 관련 된 이야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다. 요즘 작업하는 곡이 어쩌구 저쩌구. 평소 같았으면 흥미롭게 들었을 주제이지만 이미 나는 술 탓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김지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으니 말을 멈춘 김지원이 그만 들어가자며 나를 일으켜 세운다. 딱히 거절할 마음은 없어 따라 일어나니 계산을 하곤 나를 데리고 나가는 김지원, 멋있는 놈. 혼자 갈 수 있지? 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뒤 돌아서 가버린 김지원에 한참을 추위에 떨다가, 술이라도 좀 깨고 집에 들어갈까 싶어 근처 슈퍼로 들어갔다. 엘사가 그려진 프로즌 요거트 콘을 집어들고 한입 베어물며 바로 옆 놀이터로 향했다. 아직도 깨지 않은 술에 판단력이 흐려졌다. 인조 잔디를 깔아놓은 놀이터 바닥에 퍼질러 앉아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아무 생각 없이 카톡에 들어갔다. 즐겨찾기 되어있는 단 한명. 김삐잉. 다짜고짜 카톡을 보냈다. 시작은 ㅃㄴ잉아. 끝은 아짓ㄱ도 졸아하늗데. 답장은 오지 않았다. 봤는지 안 봤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핸드폰을 배 위에 올려두고 그대로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아이스크림 덕에 조금 깼던 정신이 김삐잉에 대한 그리움으로 더 독하게 취해버렸다. 준회 시점 실로 오랜만에 보는 그녀였다. 감정에 이변이 있었던건지, 이유 모를 사연으로 그녀가 나와의 데이트를 피한지 일주일.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간 정말 피가 말라 죽어버릴수도 있겠다 싶어서 어떻게 하면 그녀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던 중 저번에 길거리 쇼윈도에서 그녀가 맘에 든다던 구두를 떠올렸다. 나는 그 길로 곧장 구두를 사러갔고, 마침내 그녀는 나를 만나주었다. 내가 아니라 구두를 만나러 온 걸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나와 함께 있는 동안은 꽤 행복해 보였기에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취향에 맞춰 내겐 전혀 흥미롭지 않은 멜로 영화를 보고, 그녀가 좋아하는 샐러드바가 있는 레스토랑에 가 식사를 하고, 자주가는 카페의 2층 테라스에 마주보고 앉아 얘기를 나눴다. 여자의 매력은 입술에서 나온다더니,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내 귓가를 자꾸만 간지럽혔다. 간질간질, 심장이. 간질간질, 입술이. 그녀를 보면 자꾸만 마음 한 구석 어딘가가 간지럽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향해 쫑알댄다. 아직까진 그녀와 입술을 맞대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달콤한 맛이 날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많이. 시간이 꽤 늦어 혼자 보내기엔 걱정이 되었다. 혹시라도 너무 예쁜 나의 천사를 누가 탐내기라도 할까,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하니 피곤할텐데 얼른 들어가 쉬라며 내게 걱정하지 말라는 손짓을 해보이는 그녀. 역시 나의 천사답다. 자기 주장은 잘 꺾지않는 그녀를 알기에 그럼 집에 도착해서 나한테 연락해요. 라는 말을 남긴 채 뒤로 돌았다. 몇 걸음 걷지 않고 슬쩍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지 전화기를 귀에 바짝 가져다대고 있었다. 나랑 헤어지자 마자 누구랑 전화를 하는 지 약간 신경쓰이긴 했지만 나는 쿨남이기에 그녀를 믿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이십 분 쯤 걸었을까, 아파트의 입구에 다다랐다. 102동인 우리집을 가려면 놀이터를 지나쳐 가야 하는데 놀이터는 어쩐지 밤만 되면 으슥한 느낌이 감돌았다. 절대 쫄진 않았지만 혹시라도 소매치기를 당할 수도 있으니 빠른 걸음으로 놀이터 앞을 지나가는데, 흑흑 거리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약간 미성의 목소리가 통곡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지켜보자니, 후드집업에 추리닝 바지를 입고 스냅백을 뒤집어 쓴 남자가 놀이터 바닥에 퍼질러 누워있었다. 핸드폰을 부여잡고 우는 꼴을 보아하니, 전 여친한테 연락했다가 씹힌 것 같기도 하고. 혀를 끌끌 차며 집으로 향했다. 뒤에선 여전히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뿌요 님 일이세개 님 감사합니다!♥ 댓글 달고 구독료 받아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