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신은 무심했다. 필요 없이 하늘이 맑았다. 슬픈 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는 궁의 입구를 멀거니 쳐다보며, 나는 말의 고삐를 옴켜잡았다. 생애 처음의 승마에 대한 낯선 공포심 따위가 아니었다. 너무 많은 일을 겪어버린 혼란스러움, 그것 때문이었다. 나는 이 곳에 온지 고작 삼 일이었다.
나는 아직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냥 무작정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돌아가게 해달라고 고집을 부리고, 나는 세자빈 같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실토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이제 내겐 향단이 없고, 지원도 없으며, 찬우도 없다. 특별한 일을 겪지 않는 이상, 혜민서에서 일하고 있는 윤형도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다. 이제 내 곁에는, 오로지 차가운 인상의 새로운 세자만이 남을 것이었다. 왜인지 그에겐 아주 조금의 이야기도 하지 못할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알지 못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러다가 괜한 오해를 사서 쫓겨나게 되는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 편이 더 나을지도.
그녀라면 어떻게 했을까? 진짜 '세자빈'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사랑하던 사람이 너무나 빨리 죽어버리고, 그 자리를 이젠 그의 동생이 채워야 하는 이 답답한 상황을. 그녀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쉽게 추측이 서질 않았다. 사랑한 만큼, 아마 그 누구도 태연하지는 못할 것이다.
궁의 입구에 도착했다. 나는 몰래 저고리 사이에 숨겨둔 주머니를 꺼냈다. 향단이 직접 만들었다는, 분홍색 비단에 작은 새 모양의 수가 새겨진 주머니였다. 그 안엔 절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이 들어있었다. 찬우가 건네던 모란 한 송이와 윤형이 선물한 연고, 그리고 세자가 시장에서 사주었던 반지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모란은 이제 시들기 시작해 색이 조금 착색됐다. 나는 궁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그 세 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몸에 꼭 지니고 다니리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한다면 외로움을 조금 덜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이 열리고 어느 틈엔가 준회가 말 위에서 내려 내 곁으로 다가왔다. 고삐를 쥐고 내리면 말이 다칠 것 같고, 그렇다고 고삐를 손에서 놓자니 덜컥 겁이 나서 섣불리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조금 머뭇거리자 느닷 없이 손이 허공을 가로질러 나타났다. 준회의 손이었다. 그는 꾸벅 고개를 숙인 채로 말 없이 내가 그 손을 잡고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겨우 그런 감정 하나로 그의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생각 외로 따뜻한 손이었다. 준회는 내가 그 따뜻함의 부재의 느낄 틈도 없이 빠르게 손을 풀었다. 이윽고 궁에 소속된 걸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 고개를 숙이고 말을 가져갔다.
"고마워, 지원아."
"감사합니다."
"……아, 아니. 이런.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게 지원을 부르는 게 익숙해서 그만……."
"괜찮습니다."
준회는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으로 잘도 그런 말을 했다. 금방이라도 칼을 빼내어 휘두르고도 남을 표정이었다. 나는 내내 미안한 얼굴을 하다가 끝에는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준회는 지원과 다르다. 만나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친근감이 느껴지던 그와는 다르게, 이 사람에게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경계심 혹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들이 생겼다. 일 년을 같은 방에서 지내도 친해지기 어려울 것 같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하필이면 왜 이런 사람이 내 호위를 맡게 된다는 걸까. 지원이 따라왔다면 좋았을 텐데. 매일 준회의 딱딱한 얼굴을 마주칠 생각을 하니 속이 멀미를 하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내 뒤에는 아버지가, 옆에는 준회가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보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시야에 나타났다. 남색 치마에 짙은 옥색 저고리를 입은 무수히 많은 여자들이 줄을 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중에 몇 명은 연두색 저고리에 진한 분홍 치마를 입고 있었다. 장관에 입을 벌리고 감탄하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저셔 옆을 바라보니 그것이 준회의 눈이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얼굴의 절반은 검은색 두건으로 가려져 있었으므로 어떤 표정인지는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었다. 어떤 이유로 나를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지 또한, 알 수 없었다. 항상 사납던 눈 끝이 전과는 다르게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는 금방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방금 그건 그냥,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궁녀들을 지나쳐 준회가 이끄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이 삼켜졌다. 이제 조금 뒤, 세자의 장례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와 또 마주치고 말 것이다. 태양을 숨긴 딱딱한 황무지의 얼굴. 속이 쓰렸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학교에서 가끔 경복궁으로 현장학습을 갔던 적이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궁 몇 채는 그것들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옛 것을 그대로 보존했다고는 해도 현대 특유의 분위기를 지울 수 없는 특성을 가진 미래의 궁과는 풍체 자체가 달랐다. 색이 선명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떤 위엄이 느껴질 만큼 사람을 압도시키는 크기를 가진 궁이었다. 마음 같아선 카메라로 이 모든 것들을 담아내고 싶었다.
이내 어떤 궁 앞에서 준회가 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이내 준회와 비슷한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어디론가 아버지를 데리고 갔고, 준회는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조금 넋을 놓고 있다가, 그런 그를 따라서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돌아보지 않았다.
"세자빈, 돌아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대하는 바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대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말을 놓으셔도 됩니다. 그 날, 그러시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별궁 안으로 궁녀를 보낼 테니 잠시 휴게하시지요. 그럼, 이따가 다시 뵙겠습니다."
다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준회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았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그의 걸음에 이유를 모르게 속이 거북해졌다. 숨통이 조이는 느낌이 찾아왔다. '세자빈'은 준회와 말을 놓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렇다는 건, 둘의 사이가 친밀했음을 뜻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그가 나에게서 어떤 변화된 이상함을 감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는 세자의 호위무사였다. 내가 알기로는 '세자빈'은 집으로 돌아오기 전, 그러니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별궁에서 지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지원의 말을 따르면 '세자빈'은 준회의 호위를 받았다. 어쩌면 '세자빈'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준회와 친밀한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준회가 갑자기 자신을 어색하게 대하는 나를 이상하게 여겼을지도 몰랐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렇다면 동혁은? 그 또한 어찌 됐건 왕의 피를 이어받은 인물이 아니던가. 비록 어머니는 달라도 세자의 동생이니 그도 '세자빈'과 이전에 만남을 가졌을 확률이 높다. 아니, 틀림 없이 그랬을 것이다. 내가 이제 '세자빈'이 아닌 이상, 이 곳의 사람들과 내가 맞추어야 할 조각들은 너무나 많아졌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그 조각들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엇갈려 언젠가 나를 궁지에 빠뜨릴 것이었다. 눈치껏 행동해야만 오해를 살 일을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기분이 아찔해졌다. 이렇게나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니, 내가 한심스러워졌다. 단 몇 분 안에 초조한 감정은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조금 나빠진 안색으로 서 있는 나를 발견한 궁녀 두 명이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나는 멍청한 얼굴로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어떻게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별궁은 호화스러웠다. 곳곳에 금으로 장식을 한 가구들이 있고 몇 폭의 그림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궁녀들은 농으로 보이는 커다란 가구 안에서 새 버선을 꺼내어 내 발에 신겼다. 향단이 생각났다. 적어도 그녀라면 내가 심심하지 않게 사소한 순간에도 이런 저런 말들로 나를 웃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눈 앞에 있는 궁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든 적응할 수 있겠지. 스스로 위로하려고 속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어째 더 서글퍼졌다.
궁녀 두 명이 별궁 밖으로 나갔다. 그녀들은 나를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거나 다행이라거나, 가식으로라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딱히 그런 태도를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무거웠다. 이젠 신뢰하며 속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별궁은 지나치게 넓었다. 쓸쓸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 차분하게 안을 둘러보자, 구석에 있는 거문고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난 저런 거 만질 줄도 모르는데. 혹시 앞으로 누군가가 저걸 들려달라고 하면 그 때는 어떡하지. 걱정이 깃든 한숨이 터졌다. 그저 그럴 일이 생기질 않기를 속으로 기도하는 수밖에.
작은 책장도 있었다. '세자빈'은 책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복잡한 한자가 빽빽한 책들이 가득이었다. 조금 읽으려다가 포기했다. 읽을 줄 아는 거라곤 단 세 글자가 전부였다. 하나 일. 물 수. 둘 이. 아주 기본임을 넘어서서 개나 소나 한 번 가르치면 넙죽 알아들을 법한 난이도의 글자들이었다. 나는 도로 책들을 책장에 꽂았다. 이런 문제도 있었다. 누군가가 글을 주고 읽으라고 명하고, 나는 끝내 글자를 읽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 명을 거역하는 꼴이 된다. 이번에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생각해도 상황은 부정적이었다.
짙은 갈색의 경대 앞에 향단이 준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아무래도 곧 세자의 장례식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만큼은 그를 위해 다른 생각들은 일체 한 곳으로 접어야 했다. 오로지 세자 하나만 생각하며 그를 보내야 했다. 그것이 그에게 내가 갖출 수 있는 마지막 예의였다.
"세자빈,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인기척이 느껴지고, 뒤이어 준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적당히 낮고 차분한 그의 음성은 호위무사라는 그의 직책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나는 곧 나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벗었던 신을 찾아 신고 별궁의 문을 열었다. 준회가 아까와는 다른 검은색 복장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세자빈."
"……."
"저하를 위해서, 눈물은 참으셔야 합니다."
그가 지칭하는 저하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사랑하던 세자인지, 아니면 이제부터 나를 사랑할 세자인지. 굳이 물어 확인할 마음도 없었다. 둘 중에 누구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어차피 울지 않을 것이었다. 어제 울 만큼 울지 않았던가. 또 속으로 몇 번이고 그 울음을 삼키지 않았던가. 그렇게까지 했는데 또 다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울어버린다면 그건 분명히 욕을 들어 마땅할 바보 같은 짓이었다.
준회와 함께 별궁을 나서 길을 지나치는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내게 머리를 조아렸다. 대부분이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부담스러웠다. 태어나 이런 대접은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았다.
아까 궁녀들이 줄을 지어 서 있던 곳에, 이번에는 신하들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몇 명은 벌써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제 자식을 잃은 것 마냥 분하고 억울함을 표하는 눈물이었다. 그 모습에 갑자기 눈가 위로 뜨거운 게 치솟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불과 오 분 전이었다. 울면 안 된다. 울면 안 된다. 울면 안 되었다. 속으로 계속 주문을 걸었다.
검은색 혹은 하얀색 옷을 갖춰 입은 신하들의 옆에 조금 거리를 두고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곳으로부터 세자를 발견했다. 그는 흑룡포를 입고 바닥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이내 고개를 들고, 그는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을 했다. 그의 옆에는 그의 배가 다른 동생인 동혁이 있었다. 그는 세자와는 다르게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하고 싶지는 않은 것처럼 자꾸만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깨물음의 횟수 역시 많아져 결국엔 그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마 피가 흐르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둘의 뒤로는 늙은 여자가 있었다. 그러나 늙음의 정도는 아주 미약해서, 언뜻 보아서는 그저 연륜이 있는 미인으로만 느껴졌다. 나는 단숨에 그녀가 이 나라의 왕비인 것을 알아챘다. 멀리서 보아도 동혁을 불편히 여기는 기색이 있었다. 거기서 조금 더 왼쪽으로, 아버지가 홀로 앉아있었다.
왕은 보이지 않았다. 전에 윤형이 전하의 치료에 대해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병상에 있는 걸까?
준회는 나를 그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옆에 나를 앉도록 했다.
"뒤에 있겠습니다."
"……예."
"혹, 눈물이 떨어질 것 같으시면, 차라리 뒤를 돌으시기를."
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를 살피며 그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그는 내가 옆에 있는 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식의 태도였다. 인사를 건네지도, 아는 척을 하지도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줄곧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동혁만이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조금 밝은 기색으로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나는 거기에 화답하고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동혁에게 어떤 식으로 비춰졌을지는 모르겠다. 슬픔? 애통? 공허? 그리움? 다 모르겠다. 준회가 몇 걸음을 걸어 왕비에게로 다가간 뒤 무릎을 꿇어 고개를 숙였다. 왕비는 그런 그를 익숙하게 여기며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눈빛이 날카로운 걸로 봐서는 좋은 얘기는 아닌 게 확시했다. 준회 역시 그녀에게 작게 소곤거리며 언질했다. 그렇게 궁금하진 않았다. 단지 그녀의 눈빛에 조금 위축이 됐을 뿐.
이내 운구 행렬이 시작되었다. 저 안에 세자가 있다. 죽은 세자가 있다. 그 순간부터 눈물이 쏟아졌다. 다짐은 바로 무용지물이 됐다.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는 게 있다면 바로 지금이리라.
그가 미웠다. 불쌍하고 안쓰럽고 안타깝고 미웠다. 왜 사랑하게 만들어놓고, 그렇게 따뜻한 얼굴로 나를 행복에 젖게 해놓고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죽은 몸이 되었단 말인가.
누군가가 옆에서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세자는 아닐 테니 동혁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로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비."
숨이 멈췄다. 죽은 세자가 나를 부른 줄로만 알고 그만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더불어 그게 곧, 세자가 아닌 준회의 목소리인 줄도 알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으면 뒤를 돌으라는 그의 말이 생각났다. 생각이 나도, 나는 선뜻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음이 먹먹하고, 누군가가 심장 근처를 도려내는 것만 같은 욱신거림이 나를 찾아왔다. 이제 운구는 궁의 입구를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울음을 그치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탁이 아닌 애원이었다. 그가 이런 목소리를 낼 줄 안다는 것에 놀라우면서도 끝내 나는 그 애원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울음은 더 커졌다. 멈출 수가 없었다. 문득 이런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세자의 입장이 생각났다. 울고 있는 나를 보면 그가 나를 더 미워할지도 모른다. 서둘러 소매로 눈가를 닦아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눈 주위가 쓰라릴 뿐이었다. 그런다고 해서 눈물이 멈춰지지는 않았다.
궁 밖으로 운구가 사라졌다. 신하들의 울음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웅장한 음악 소리 또한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비가 왔으면 좋겠다. 비가 와서 이 모든 걸 다 쓸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 속에 쓸어 담겨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신도 여전히, 무심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다시 준회의 호위를 받으며 별궁으로 돌아왔다. 준회와 얘기라도 하면 좀 더 빨리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러기엔 내가 아직 그로부터 낯선 감을 지우지 못했다. 또 내가 말을 걸면 그가 과연 대답을 해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렇다. 아니다. 그런 종류의 엄청나게 형식적인 대답들만 돌아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내 준회가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별궁 안은 나 혼자였다.
더 외롭고 쓸쓸하고 넓게만 느껴졌다. 너무나도 조용해서, 그 조용함의 소리가 이명으로 번져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가 별궁 앞으로 찾아왔다. 목소리를 듣고 준회라는 것을 알아챘다.
"저와 후원에 가시겠습니까?"
"…그 곳은 무슨 이유로 찾으십니까?"
사실 어딘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물었다.
"번거로우시면 그냥 있으셔도 괜찮습니다."
"……."
"……슬픔에 역수하실 세자빈이 걱정되어 왔습니다."
"……."
"후원에 가신 뒤, 대전에 잠시 들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일어나기 싫으면 그냥 그 안에 계속 박혀 있으라는 소리였다. 나는 냉큼 몸을 일으키고 별궁을 벗어났다. 돌로 다듬어진 계단 몇 개를 밟고, 준회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디를 가자는 걸까. 그것도 나랑 같이. 문득 저 검은색 두건 안에 가려진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준회는 가려진 나머지 얼굴마저도 차갑게 굳어있을까?
그는 내가 나오는 것을 집요하게 주시하며 옆으로 바짝 붙어 섰다. 방향을 왼쪽으로 틀었다. 몇 분 쯤을 걷자, 푸른 빛깔의 식물들로 장식된 공원 비슷한 공간이 나타났다. 저절로 기분이 상쾌해졌다. 아마 장례식 때문에 기분이 무거울 나를 위해 예쁜 것을 보여주고 싶은, 그냥 충담 정도에 그치는 마음일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나 무뚝뚝한 성격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어쩐지 그런 그가 조금 귀엽게 느껴져다. 나도 모를 미소가 얼굴 위로 번졌다.
후원 안에는 여러 종류의 식물들이 있었다. 아직 내 키를 벗어나지 못한 작은 나무들도 있었고 화려한 색깔을 품은 꽃들도 주변에 심어져 있었다. 나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감탄하며 그것들을 바라봤다. 예뻤다.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지금 내 옆에서 같이 이것들을 구경했더라면 분명 더 예쁘게 느껴졌을 화초들이었다. 나는 몇 분이고 계속 그 자리에서 말 없이 있었다. 준회도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옆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준회야! 이제 됐으니까 가자."
"……."
숙였던 몸을 일으키고 그를 쳐다봤는데, 그는 어딘가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 역시 말을 놓는 건 너무 빨랐나. 대답 없는 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어딘가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그 어깨를 몇 번 흔들자, 그가 조금 놀라는 기척으로 등을 돌았다. 세심하게 찢어진 두 눈에는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겹쳐져 있었다. 의아함에 그가 쳐다보던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두 명의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흑룡포였다.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이내 준회는 큰 키로 그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그러나 수줍게 웃음을 터뜨리는 여자의 목소리는 이제 막 똑똑히 귓전을 파고들고 있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의 얼굴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 미소는 따뜻하고, 행복하고, 바로 앞에 사랑스러움을 마주하고 있어 분에 겨운 것만 같은 행색이었다.
나는 준회를 두고 먼저 등을 돌려버렸다.
/
*경대: 조선시대 여인들이 쓰던 지금의 거울이 달린 화장대.
*흑룡포: 세자가 상복으로 입는 옷.
*운구: 시체를 담아 운반하는 것. 또는 그것을 담은 모양.
*후원: 궁의 북쪽에 지어졌으며 궁의 사람들로만 출입이 제한된 왕실의 공원.
너무 늦었죠...?
세륜야자 때문에 컴퓨터를 잡을 시간이 없었네요...(변명)
게다가 또 요즘 시험기간이라...(변명2) ㅋㅋㅋㅋㅋㅋㅋㅋ
여태 너무 나노 단위로 글을 썼더니 글 진행이 느리네요...
이제부터는 시간을 껑충껑충 뛰어넘어서 글이 진행될 예정이니까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다려주시면...★
저번부터 계속 정신줄을 놓고 '송 주부'(윤형이 아부지)를 '송 내의'로 써놓았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정했으니 부디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어제 새벽에 글 수정하다가 모르고 새 글로 올려버렸는데 보신 분 있으실랑가 모르겠네요...
빛의 속도로 삭제했으니 아마 없으시겠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창피해!
바나나킥 님
빈블리 님
김빱 님
일이세개 님
뜨뚜 님
뿌요뿌요 님
외에도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하트~
힘들게 댓글 남겨주시는 비회원 분들도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