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04 (새로운 손님)
역시 시간의 힘은 대단하고도 위대했다. 다음날이 되자 어제 녀석에게 느꼈던 이상한 감정들은 모두 잊혀져 있었고,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도 애매했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녀석과 등교를 했다. 어제 PC방엔 잘 갔냐는 질문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녀석도 어제 일에 관해선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하긴, 있을 리가 없었다. 괜한 신경을 썼던 쪽은 김종인이 아닌 나였으니까.
오늘은 과외를 하는 첫 날이다. 과연 과외 선생님은 어떤 분이실지, 수업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 주실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석식까지 먹고 만나서 같이 하교를 하자 말하던 김종인은 6교시 쉬는 시간이 5분 정도 남았을 무렵 카톡을 보내왔다.
어차피 사줄 거면서 생각해 본다 튕기긴. 김종인은 항상 그랬다. 겉으론 틱틱대듯 안 사줄 것처럼 굴어도, 결국은 아무런 군말 없이 맛있는 걸 사주곤 했다. 하굣길에 붕어빵 포장마차를 보곤 녀석에게 사달라 졸랐던 적이 있다. 그때 녀석은 천원짜리 한 장도 없냐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해대면서 애써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었고, 그런 녀석의 행동을 바라보고만 있던 난 사내자식이 쪼잔하게 천원도 아까워서 못 쓰냐며 속으로 녀석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몇 걸음쯤 걸었을까, 갑작스레 걸음을 멈춰선 녀석이 짧게 말을 내뱉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배고프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순전히 저를 위한 것이었다. 붕어빵 이천 원 어치를 사곤 내게 봉투를 건네는 녀석을 바라보며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배고프다면서 왜 별로 안 먹어?'
'이제 배불러.'
오늘도 분명 그럴 것이었다. 떡볶이 말고 좀 더 비싼 메뉴를 말해 볼 걸 그랬나….
*
종례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멨다. 며칠 간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던 탓에 출석부에 재깍재깍 받아놓지 못했던 담당 선생님들의 싸인을 다 받아 놓으라는 선생님의 지시가 내려졌다. 미리 꺼내두었던 펜을 들곤 교탁 위에 놓여있던 출석부를 집어들었다. 그리곤 아직 종례가 끝나지 않은 듯 보이는 김종인의 반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단 한 명의 학생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역시 우리반 종례가 빠르긴 한가 보다.
출석부를 펴 비어있는 칸들의 개수를 셌다. 총 네 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계단을 오르내릴 필요 없이 바로 이 층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교무실을 먼저 가는 게 효율적일지 고민하며 펜을 돌리고 있는 사이, 아이들이 일어나는 소리와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종례가 끝난 것이겠지. 곧 김종인이 나올 것이었다.
"어? 아, 왔어?"
"뭐해?"
출석부를 살펴보던 중 갑작스레 어깨 위로 누군가의 묵직한 팔이 올려지는 느낌에 고개를 슬쩍 들었다. 예상대로 김종인이었고, 녀석은 내가 들고있는 출석부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다시 입술을 뗐다.
"맞다, 너 출석부 셔틀이었지."
"출석부 셔틀 아니거든. 서기라고, 서기."
"그래, 서기."
녀석을 밉지 않게 흘겨주곤 내 어깨에 걸쳐져있는 녀석의 팔을 힘겹게 잡아내렸다. 그리곤 앞문이 활짝 열려있는 교실을 조심스레 들여다 보았다. 김종인의 담임 선생님은 칠판을 지우고 계셨고, 남아있는 학생들이라곤 청소당번들 뿐이었다. 녀석의 담임 선생님께 받아야 할 싸인이 있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 들어가서 부탁드려도 실례가 아닐까, 고민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내 옆에 멀뚱히 서 나를 바라보고만 있던 녀석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내 팔을 툭툭 쳤다.
"뭐하는데. 집에 안 가?"
"아, 나 이거… 너희 담임 선생님한테 싸인 받아야 하는데…."
"무슨 싸인?"
"그니까… 수업을 했다는 일종의 확인 표시? 그런 걸 하는 거야."
"무슨 말이야, 그게."
"아, 그니까… 그냥 이 빈칸에 너희 담임쌤 싸인을 받으면 된다는 거야."
"어디. 여기? 그냥 우리 담임 싸인만 받으면 돼?"
손가락으로 빈칸을 가리키며 말하는 김종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녀석이 망설임 없이 한 손으로 출석부를 쏘옥 빼앗아들곤 제 교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저 벙찐 채 녀석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제가 서기인 양 제법 능숙하게 담임 선생님의 싸인을 받아내는 김종인의 모습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서기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던 녀석이 어떻게…. 물론 나도 서기라는 역할을 태어나서 처음 가져본 것이라 아직은 많이 미숙하지만….
제 임무를 마치고 다시 성큼성큼 복도로 걸어나오는 녀석에게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무심히 출석부를 내게 건네온다.
"와, 김종인 짱이야."
"근데 이거, 일일이 다 받으러 다녀야 돼?"
"응?"
"비어있는 칸들 말이야. 네가 교무실 다니면서 다 받아야 하는 거냐고."
"아, 맞아. 그렇게 해야 해."
"왜?"
"왜냐니. 그게 할 일이니까."
"그니까 왜 그렇게 하냐고. 힘들잖아."
"힘들어도 어쩔 수 없지…."
"그냥 네가 하면 안돼?"
"뭘?"
"선생님 대신 네가 싸인하라고. 그냥 비슷하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
"솔직히 일일이 다 받으러 다니는 건 너무 힘들어. 누가 글씨체 분석을 해보는 것도 아니고, 네가 대신 해도 어차피 아무도 못 알아볼 걸."
"……."
"선생들도 바빠 죽겠는데 고작 이런 거에 신경을 쓰겠어?"
"… 으음…."
"만약 들킨다 해도 별로 혼나진 않을 것 같은데."
"… 혼날 것 같아."
"그럼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 해. 대신 혼나줄게."
"……."
"어차피 혼날 일 없을 거다."
진심으로 걱정이 돼서 해주는 말인지, 일일이 다 받으러 다닐 거라는 내가 미련하고 답답해서 해주는 말인지 정확히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생각으론 아마도 후자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자였든 후자였든 상관 없었다. 현재 지금으로써는.
*
사실 아까 김종인에게서 카톡이 왔을 당시엔 떡볶이가 먹고 싶었다. 그러나 교문을 나서는 순간 왠지 모르게 참치김밥이 확 끌리기 시작했다. 떡볶이를 먹으러 갈 거냐 묻는 김종인에게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럼 뭐 먹게. 굶을래?"
"미쳤어? 저녁을 왜 굶어. 나 떡볶이 말고 김밥 먹을래. 참치김밥."
"또."
"또? 음…, 그거 하나면 될 것 같은데? 뭐, 밥 먹고 아이스크림이나 하나씩 사먹을까?"
"배라?"
"아니 아니. 비싸잖아. 메로나 어때?"
"먹고 싶은 거 먹어. 너보고 돈 내란 소리 안 해."
"… 너 돈 많아? 왜이리 돈을 많이 써? 어제 오세훈 PC방비도 내줬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어버렸다. 내가 저의 전화통화를 엿들었다는 걸 알 리 없는 김종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대답을 머뭇거렸다간 분명 의심하겠지. 그러니 최대한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대답을 해야…
"겉으론 안 그런 척 하면서 너 오세훈이랑 연락하고 지내나 보다."
"… 뭐라고?"
"그리고 돈 많아. 우리 부모님 여행 가셨잖아. 누나들은 자취하니까 집에 없고. 그래서 집엔 나 혼자 있는데, 그게 좀 미안하셨나 봐."
"……."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용돈 두둑히 주고 가셨다."
"… 아아."
"그래서 오세훈 PC방비도 내줬어."
왜인진 모르겠지만 녀석은 오세훈을 강조하듯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항상 느끼는 건데, 김종인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내게 오세훈을 들먹이곤 했다. 오세훈이랑 내가 도대체 무슨 연관성이 있길래. 내가 오세훈을 좋아해? 아니었다. 오세훈이 나를 좋아해? 그것도 아니었다. 왜 자꾸 내게 오세훈을 언급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다.
"근데 너 왜 자꾸…"
"그럼 김밥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먹는 거다."
"… 어? 아, 응…."
녀석에게 말문이 가로막히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물으려 했던 말을 꾸욱 삼켜야 했다. 그냥 내 착각이었을 수도 있으니, 녀석이 다음에 또 그런다면 그때 가서 물어보는 수밖에.
*
예전부터 자주 가곤 했던 분식집에 들어가 주문을 했다. 자기도 참치김밥을 먹을 거라며 참치김밥 두 개를 주문한 김종인이 정수기에서 물을 떠왔다. 그리곤 맞은편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집어든다. 역시 이놈의 휴대폰이 문제라니까. 스마트폰의 혜택을 많이 받고는 있지만 그에 반해 단점도 은근 많았다. 모든 사람들이 어디에서든 스마트폰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의도치 않게 대화를 단절시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김종인 너 말이야, 너.
"몇 시부터라 했지?"
"과외?"
"어."
"7시 반."
"과외 남자라 했냐, 여자라 했냐."
"남자."
"그 외에 더 아는 거 없어?"
"음, 이름밖에 몰라. 엄마가 알려줬거든. 박찬열이래."
이름과 성별 외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어차피 몇 시간 뒤면 얼굴도 알게 될 테고 수업 방식도 알게 될 테지.
김종인은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먼저 물을 꿀꺽꿀꺽 마시며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참치김밥이라니, 정말 오랜만이다. 내가 참치김밥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참치와 마요네즈의 살짝 느끼한 맛을 깻잎의 산뜻한 향이 커버를 해주는… 그런 참치김밥.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밥이었다.
내가 하나 먹을 시간에 녀석은 두 개를 먹었다. 내가 두 개 먹을 시간에 녀석은 네 개를 먹었다. 자연스레 속도 차이가 벌어지게 되었고, 김종인은 벌써 김밥 한 줄을 뚝딱 해치운 채 물을 들이키고 있었다. 아직 네 개나 남은 김밥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하나를 집어 녀석에게 내밀었다. 배가 부른 건 아니었지만, 왠지 부담스러웠다. 녀석이 휴대폰을 하지 않는 이상 내가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게 될 테고, 그 시선을 느끼는 난 가시방석에 앉은 것 마냥 안절부절 못할 게 분명했다. 아까 휴대폰만 본다고 속으로 뭐라 해서 미안해. 지금은 네가 차라리 휴대폰을 만져줬음 좋겠어.
원래 내가 이런 네 시선에도 부담감을 느꼈었나.
"왜? 왜 나를 줘."
"너 아직 배 안부르잖아. 김밥 한 줄로 배가 차?"
"어차피 아이스크림 먹잖아."
"그래도 하나만 먹어. 나 슬슬 배부르려 해."
녀석이 못 이기는 척 내가 내미는 김밥을 받아 먹었다. 요즘 김밥은 길이가 짧아진 대신 두꺼웠다. 김밥 하나를 먹으려면 입을 크게 벌려야 했으니 말이다. 김밥이 들어가 불룩 튀어나온 녀석의 볼을 바라보다 하나를 집어먹었다. 오물오물 씹으며 김밥에 들어간 재료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정말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천천히 먹어. 재촉 안 해."
녀석이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천히 먹고 있긴 했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씹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녀석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다시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제 이것만 먹으면 마지막 하나만 남게 된다. 얼른 먹고 얼른 나가야지.
*
약속대로 돈은 김종인이 전부 부담했다.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어 겉옷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천원짜리 몇 장을 꺼냈지만, 행동이 빠른 김종인은 벌써 계산을 마치고 먼저 분식집을 나가버렸더랬다. 꼬깃꼬깃한 삼천원을 꺼낸 손이 무안하다 느껴질 정도로 녀석은 쌩- 하니 나가버렸고, 민망해진 난 멋쩍게 웃으며 다시 삼천원을 주머니 속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을 걸어 도착한 배스킨 라빈스에 들어가 무슨 맛을 먹을지에 대해 한참이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거나 고르라 말하는 녀석 탓에 더욱 고민이 되었다. 민트초코? 엄마는 외계인? 솜사탕? 아, 도대체 뭘 먹어야 하지….
"… 종류가 너무 많아서 못 고르겠어."
"솜사탕 두 개 주세요."
내 말을 무참히 무시해버린 녀석이 당당하게 주문을 했다. 그리곤 나를 바라보며 제법 장난스레 웃는다. 뭐, 솜사탕도 나쁘진 않으니 아무렴 괜찮다. 결정장애 탓에 아이스크림의 맛 하나도 고르고 있지 못하던 나를 김종인이 구원해줬다 치지 뭐.
작은 컵에 동그랗게 담긴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나서자마자, 새로 개장한듯 보이는 전자제품 매장에서 시끌벅적한 노랫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어느 남자 아이돌 가수의 노래였다. 매장 앞엔 홍보용 전단지를 나눠주는 알바생들, 마이크를 들고 재미난 멘트를 해가며 고객들을 매장 안으로 이끄는 안경 낀 남자직원이 보였다. 매장도 꽤나 커 보였다. 앞으로 전자제품을 구입할 땐 저 매장을 이용해 보자고 엄마한테 말해야겠다.
*
"안녕하세요."
운동화를 벗고 안으로 들어선 김종인이 크게 외쳤다. 그 목소리를 듣고 현관으로 걸음을 옮겨온 엄마가 환히 웃으며 녀석을 맞이해 주었다. 내가 녀석의 집에 굉장히 오랜만에 갔던 것처럼 녀석도 우리집에 온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자연스레 내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방문을 열려다 말고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왜?"
"… 아, 아냐."
금세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살짝 젓는 녀석에게 고개를 갸웃해 보이곤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다행히 방 안은 깨끗했다. 며칠 전에 미리 방정리를 해두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몇 시냐. 이거 시계 이상해. 안 맞아."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져있는 작은 자명종 시계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녀석이 말했다. 자명종 시계의 건전지를 갈아 끼운다 해놓고 또 까먹었나 보다. 학기 첫 날 이 시계 때문에 내가 지각을 했었지. 그래도 요즘엔 휴대폰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는 탓에 다행히 지각은 항상 면하는 셈이었다. 그래도 얼른 건전지를 갈아 끼우던지 해야겠다. 방 안에 있는 시계라곤 그거 하나 뿐이니 말이다.
"야, 여기 앉아. 왜 바닥에 앉아. 차갑게…."
"바닥이 편해."
넓디 넓은 침대를 두고 굳이 바닥을 고집하는 녀석에게 침대를 툭툭 쳐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바닥이 편하다는 되도 않는 이유를 대며 그대로 바닥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김종인은 우리집에 놀러올 때마다 항상 바닥에 앉아있곤 했다. 그 당시엔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조금은 의아하게 느껴졌다.
바닥에 드러누운 상태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녀석이, 그 자세가 불편했는지 다시 자세를 바꿔 편히 엎드렸다. 지루함을 떨쳐내고자 다시 게임을 실행시킨 건지, 녀석의 휴대폰에선 모두의 마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저 게임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종인 때문에 테마곡이 지겹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종이야."
"왜."
"안 불편해?"
"뭐가?"
"그 자세 안 불편하냐고."
"나름 괜찮은데. 편해."
"……."
"남의 집 침대에 막 함부로 눕고 그러는 거 아니래."
"……."
"근데 남자인 내가…"
갑자기 말을 하다 끊어버리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녀석은 엎드려있는 상태라 뒷통수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까보다 자세가 조금 흐트러진 것으로 보아, 아마 또 무인도에 가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깟 게임이 뭐라고 저렇게 우울해 하는지. 그깟 주사위가 뭐라고. 그깟 마블이 뭐라고….
"남자인 네가 뭐?"
"… 아, 남자인 내가 여자 침대에 앉고 눕고 그러는 건 좀 아니잖아."
"……."
"어릴 적부터 엄마가 그렇게 알려줬어."
"……."
"그래서 난 어릴 적에 누나들 침대에서 뛰어놀았던 적도 없어."
"… 근데 너, 나 여자로 안 보잖아."
응. 아니. 어떠한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게임 속 주사위가 도로록 굴려지는 소리만 들릴 뿐, 방금까지 말을 줄줄이 늘어놓던 녀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여튼간에, 김종인은 꼭 자기가 불리해지면 입을 꾸욱 다무는 스타일이다. 그게 괘씸해 발로 은근슬쩍 녀석의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거리는 게 웃겼다.
"… 하지마."
"미안."
계속 무시하고 참는 듯하더니 녀석이 제법 무서운 어조로 경고하듯 말했다. 그 목소리가 무서워 황급히 발을 거두곤 자연스레 사과의 멘트를 전했다. 그리곤 침대에서 내려와 엎드려있는 녀석의 옆에 나란히 엎드렸다. 그리곤 엄청난 집중력으로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녀석과 뜨겁게 열이 가해지고 있는 녀석의 휴대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게 저렇게 재밌을까. 나 심심한데 게임 그만하고 나 좀 놀아주지….
"김종인, 나 궁금한 거 있어."
"또 뭐."
"춤 말이야. 네가 더 잘 춰, 오세훈이 더 잘 춰?"
"나."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라 말하는 녀석에 웃음이 터졌다. 고3은 동아리 활동 안 해서 좀 아쉽겠다? 춤 추고 싶지 않아? 나름 괜찮아. 무미건조하기만 한 김종인의 대답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근데 어떡하냐. 한동안 춤 안 춰서 복근 사라졌겠다."
제법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녀석을 놀리듯 말했다. 그게 꽤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녀석이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짙게 진 쌍꺼풀 라인에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 그리고 무심한 듯한 눈빛에 무미건조한 목소리. 되게 무섭네, 진짜.
"아까부터 자꾸 시비다, 너."
"… 시비 아닌데?"
"말투가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복근 안 사라졌거든요. 까서 보여줘?"
"… 아니, 사양할게."
어색하게 웃음을 짓곤 엎드려있던 몸을 일으켜 다시 침대에 털썩 앉았다. 김종인을 놀리려 달려들면 그것의 두 배로 당하게 된다. 뛰는 김종인 위에 나는 내가 있다 누누이 생각하곤 했는데, 역시 아니었나 보다. 난 녀석을 이겨먹기 위해 온갖 방법을 생각해내고 노력하는 반면, 녀석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쉽사리 나를 이겨먹었다. 그게 너무나도 짜증이 났다. 난 죽어라 애를 써도 되지 않는 게, 왜 녀석은 힘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쉽게 되는 건지.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만히 침대에 앉아 녀석의 까만 뒷통수를 바라보다 그대로 발라당 드러누웠다. 빨래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불에서 산뜻한 섬유유연제 향이 느껴졌다. 아, 자고 싶다. 과외 첫 날에 대한 설렘은 이미 달아나버린 지 오래였다. 눈도 점점 느리게 감기고 자꾸만 하품이 나오려 하는 게, 아무래도 졸음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얘들아, 인사해. 선생님 오셨어."
갑작스레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정돈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하며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과외를 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20분이나 빠른 시각이었다. 바닥에 엎드려 게임을 하고 있던 김종인이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고, 살짝 삐뚤어진 제 교복 넥타이를 단정히 정돈했다. 마치 학교에서 용의복장 검사를 받는 긴장한 학생의 모습처럼 보였다.
인자한 미소로 내 방을 안내해주던 엄마의 뒤로 건장한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키가 180은 훌쩍 넘을 것처럼… 모델 포스가 좔좔 흐르는 남정네였다.
"아, 여긴가요? 들어가면 되는 거죠?"
그를 향해 엄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환한 미소로 목례를 하던 그가 천천히 내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겨왔다. 그리곤 수고하라는 엄마의 멘트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분위기는 한층 가라앉게 되었고, 오로지 적막감만이 감돌기 시작했다.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양 서로 어떠한 말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그저 눈치만 살피며 침묵만 지키고 있는 지금 이 모습들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웠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건지….
"음, 안녕. ○○이랑 종인이지?"
"아,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먼저 말을 꺼낸 건 다름아닌 선생님이었다. 사실 선생님이라 부르기도 애매할 정도로 그는 젊었다. 짙은 브라운 빛이 도는 헤어스타일, 김종인 만큼이나 진하게 새겨진 쌍꺼풀 라인. 레드 계열의 남방과 하얀 니트, 그 위에 걸친 짙은 네이비색 코트까지…. 그는 마치 현실적인 대학 생활에선 없을, 환상으로 가득한 대학 생활 속에서만 있을 법한 훈훈한 비주얼이었다. 그는 환히 웃으며 먼저 책상 쪽으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미리 준비해 놓은 세 개의 의자 중 가운데 의자에 털썩 앉은 그가 제 코트를 벗어 의자에 살짝 걸쳐두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김종인이 슬쩍 턱짓을 해보였다. 자리에 앉자는 뜻이겠지.
박찬열, 이라 자신을 소개하던 그는 제 휴대폰에 내 번호와 김종인의 번호를 저장했다. 그리곤 제가 메고 온 백팩에서 몇 가지의 문제집을 꺼내 앞으로 수업은 어떻게 진행할 것이며, 과제의 양은 어떠할 것인지에 관해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가 슬쩍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니트 소매 사이로 살짝 보이는 손목 시계에선 광택이 났다. 남자답게 생긴 손에 잡힌 샤프가 꽤나 작고 얇아 보였다. 그리고 그의 손등엔 은근하게 드러난 힘줄 몇 가닥…
"○○아, 듣고 있어?"
"네?"
"과제 안 해오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 아."
그의 커다란 손만 바라보고 있던 내 시선이 순식간에 그의 얼굴로 향했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듯 보였다.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잠시 딴 생각 좀 하느라…."
"이 시간엔 나한테만 집중해야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네에, 죄송해요."
분명 혼을 내는 것 같으면서도 혼을 내는 것 같지가 않았다. 표정이 밝아서 그런 건가? 꾸중을 들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덩달아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작게 목례를 하자, 그의 큼지막한 손이 조심스레 내 머리를 두어번 쓸고 지나갔다. 그 손길이 어색하기도 하고 괜히 민망해 볼을 긁적였다. 그리곤 애꿎은 김종인 쪽으로 흘끗 시선을 옮겼다. 바로 옆옆 자리에 앉아있던 녀석은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한 건지, 책상 위에 놓여있는 작은 화분의 받침대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단언컨대, 김종인은 과외와 거리가 먼 스타일 같다.
"있잖아요, 선생님. 궁금한 게 있어요."
"궁금한 거? 뭔데?"
"키가 몇이에요?"
"키? 나?"
"네, 쌤이요. 되게 커 보이던데…."
"음…, 가장 최근에 잰 게 군대에서 쟀던 건데. 음… 185였나, 186이었나…."
"와아…, 대박이다."
"종인이는 키가 몇이지? 종인이도 크게 보이던데."
"쟤요? 글쎄요. 쌤에 비하면 그냥…"
"180 간당간당해요. 아마 나도 군대 가면 좀 더 크겠죠."
역시 남자들은 키 얘기에 민감하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답을 않고 있던 녀석이 제법 틱틱대듯 말을 내뱉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 맞아. 남자는 군대 가서도 키가 큰다잖아. 종인이도 키 많이 클 거야."
그러나 더 웃긴 건 그의 반응이었다. 다 큰 성인이나 다름없는 남고생을, 마치 7살짜리 유치원생 대하듯 말하는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앞으로 왠지, 만만치 않은 과외가 될 것만 같다. 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이라 불러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삐그덕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
더보기 |
좀 늦었나요? 늦었죠? 죄송합니다... 또륵.. 제가 요즘 영화에 꽂혀버렸.. 은 말도 안되는 변명이구요. 앞으론 업뎃하는 속도 좀 늘려보려구요!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
어느덧 저녁 시간인데, 독자분들 맛있는 저녁 드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