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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교시 문학
분옥
1.
구름이 흩어진 하늘과 화사하게 물들어 피어난 벚꽃, 따사로운 손으로 아이들의 봄을 쓰다듬는 햇살.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온 봄바람이 교실을 부드럽게 훑었다. 3교시 문학 수업이 한창이던 교실에는 여교사의 낭랑한 목소리만 퍼졌다. 매점에서 공수한 간식거리로 쉬는 시간을 보낸 학생들은 슬금슬금 다가오는 졸음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빼곡히 자리에 앉은 머리들이 무질서하게 움직였다. 꾸벅이는 까만 머리통 중에는 소년의 머리도 있었다. 아무래도, 진득한 춘곤은 성실함을 가리지 않는 듯 했다. 교과서 위로 부지런히 움직이던 샤프가 점점 기울다 툭 떨어졌다. 앞자리에 앉은 소년의 모습이 교사의 눈에 들어왔다.
김석진.
이름이 불린 소년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려는 눈꺼풀이 무거웠다. 교실 밖으로 나가 잠을 깨고 오라는 말이 졸음 가득한 얼굴로 쏟아졌다. 소년은 눈두덩이를 두어 번 꾹꾹 누르고 일어나 뒷문으로 향했다. 대놓고 책상에 엎어진 친구가 눈에 들어왔지만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소년은 성실했기 때문에.
2.
잠이 달아난지는 꽤 되었다. 그러나 소년은 뒷짐을 지고 조용한 복도에 서 있었다. 교실 창문 너머로 들리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다시 졸음을 끌고 올 것 같기도 했고, 제 앞에 뚫린 커다란 창으로 보이는 벚꽃 나무가 자꾸만 소년의 눈을 끌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내의 애간장을 태우는 여인처럼, 사뿐히 날아온 봄바람에 나뭇가지가 살랑살랑 춤을 췄다. 그리고 흩날리는 벚꽃. 벚꽃잎들.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흔적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소년은 깊은 곳으로부터 숨을 길게 빼내며 어깨를 접었다.
아, 아름답다.
눈 앞에 아른거리는 꽃향기에 취해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난 순간이었다. 벽에 닿은 소년의 등이 시멘트의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을 느끼고 움찔거렸다. 고무공이 튕겨 나가듯 재빨리 등을 떼어낸 소년이 팔을 뒤로 해 등을 쓰담었다. 복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조용했고, 햇볕이 가득한 운동장보다는 서늘했으며 건조했다. 소년은 손바닥을 벽에 붙이고 천천히 등을 기대었다.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
파리한 얼굴을 한 소녀가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가방을 메고, 실내화 대신 제 피부만큼이나 하얀 운동화를 신은 모습은 영락없는 지각생이었다. 그것도 3교시에 등교하는, 엄청난 지각생. 바닥을 향했던 소녀의 까만 눈동자가 천천히 올라와 소년에게 닿았다. 소녀를 보고 있던 소년은 바늘에 콕 찔린 것 마냥 몸을 흠칫 떨었다. 색이 거의 없는 소녀의 입술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것처럼 닫혀 있었고, 흰 피부와 대조되는 까만 머리칼은 길게 내려와 가슴께의 명찰을 가리고 있어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빤한 빛으로 눈을 마주한 소녀가 우뚝 멈춘 것은 옆 반 뒷문에 이르러서였다. 그제서야 소녀는 소년에게서 눈을 떼고 창 너머 교실을 응시했다. 소년은 소녀의 미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소녀는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교실을 등진 소녀가 소년과 같은 모양으로 벽에 등을 기대었다. 가방은 아무것도 품지 않은 듯 눌리는대로 찌그러졌다. 손바닥을 나란히 벽에 붙인 채 서 있는 소녀의 옆모습은 완벽했다. 앞머리 없이 시원하게 드러난 동그란 이마를 따라 부드럽게 뻗은 콧선, 예쁜 모양으로 그려진 통통한 입술. 소년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소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에 한 번쯤은 고개를 돌려 소년을 봐줄 만도 한데, 소녀는 그 자세 그대로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소녀의 맞은편 벽에 위치한 창으로 햇살이 쏟아졌다. 까만 머리칼이 빛을 받아 갈색으로 물들었다. 소년은 가슴 속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박하사탕을 한 손 가득 쥐어 입에 털어넣은 느낌이었다.
저기,
누군가 소년의 뱃속에 실크 스카프를 넣고 그것을 입으로 스윽 빼냈다, 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소년의 말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동시에 뜬금없기도 했다.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할 새도 없이 소년이 소녀를 향해 입을 연 것이다. 제 스스로도 놀라 혀 뿌리로 목구멍을 눌러 목소리를 막았다. 다행히 작은 목소리가 소녀에게는 미처 닿지 못했는지, 소녀는 전과 같은 모양으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입술을 잘근 씹던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였다.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둘 사이의 정적을 부욱 찢어놓았다. 소녀는 등을 돌려 교실로 들어갔고, 소년의 시야는 교실 밖으로 나온 아이들에게 가로막혔다. 소녀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는 소년의 어깨 위로 친구의 팔이 둘러졌다.
김석진.
.. 어.
왜 이렇게 얼이 빠졌어. 매점이나 가자.
나 어디 좀 가,
가자!
막무가내였다. 친구에게 목이 잡혀 끌려가면서도 소년의 고개는 자꾸만 뒤를 향했다. 소녀가 잠시 머물렀던 자리를 향했다. 안녕, 이라고 말을 걸고 싶었는데. 안녕. 안녕. 그렇게 말했으면 소녀가 무슨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았을지 소년은 상상했다. 웃었을까? 여전히 무표정이었을까?
3.
그 날의 마주침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소녀가 들어갔던 그 반에는 딱히 아는 친구가 없었기에 오며 가며 몰래 훔쳐보았지만 소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닮은 아이는 없었다. 왠지 모르게 밀려드는 실망감이 꽤 무겁게 다가왔다. 옆 반을 향하는 소년의 발걸음이 줄어들고 실망감은 점차 무뎌지며 머릿속에 선명하게 찍힌 얼굴이 바래질 때 즈음이었다. 소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야! 119 불러, 빨리!
평소보다 조금 늦은 등교였다. 계단을 오르던 소년의 귀에 찢어지는 비명과 고함이 뒤섞여 들려왔다. 연이어 웅성거리는 소리가 산만하게 울렸고, 코너를 돌아 소년이 마주한 것은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아이들이었다. 복도를 그득히 채운 인파를 뚫을 생각에 절로 찌푸려진 눈이 무심코 그 교실 뒷문으로 향했다. 짜증을 내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비키라고 소리를 질렀다. 문 쪽에 몰려있던 아이들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물러나며 길을 텄다. 타이만 맨 교복 차림의 남자아이가 그 사이로 뛰쳐나왔다. 소년은 순간, 숨을 흡, 하고 들이마셨다. 쿵쿵. 심장이 머리에 있는 것처럼 쿵쿵 뛰는 소리가 고막을 마구 때렸다. 뾰족한 손가락이 소년의 가슴을 압박하는 것 같았다. 그 아이가 곁을 지나가고 밖에서 구급차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사라질 때까지 소년은 자리에 못 박은 듯 멈춰 서 있었다. 손 끝에 구멍이 뚫려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손목이 아릿하게 져려왔다. 간간히 들려오는 '피', '죽음', '병' 과 같은 단어 위로 남자아이의 어깨에 축 늘어져 있던 하얀 팔이 오버랩 되었다. 빨갛게 물든 입가와 손, 붉은 자국이 남은 블라우스, 희미하게 스친 비릿한 냄새, 그리고 하얀 운동화. 소년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 정수리를 짓누르는 소녀의 운동화가 소년을 꼼짝 못하게 했다.
4.
교복을 벗고 학사모도 던진 소년은 다시 학교를 찾았다. 학교의 모든 이들은 더 이상 소년에게 학생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복도를 걷는 소년에게 학생 두 명이 꾸벅 인사를 했다. 남자가 된 소년은 다른 이름을 달고 교실에 들어섰다.
졸업생이라 해서 학교에 대해 더 애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학창시절을 보냈던 교실은 신관이 지어지면서 본관으로 불리며 고3의 전쟁터가 되었고, 삼 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입었던 회색 교복은 짙은 밤색으로 탈바꿈했다. 낯선 교실과 낯선 교복, 남자에게 향수를 불러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자가 옛 학교의 모습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3학년 방과후 수업이 있을 때 뿐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그들의 사용 범위는 2층까지였기 때문에, 계단을 가로막은 자물쇠를 넘어 무수히 많은 소년의 발자국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남자는 때때로 그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마지못해 등을 돌리곤 했다.
5.
김 선생님.
네.
이번 체육대회 물품, 본관 4층 창고에 있거든요. 학생부에서 도와줄 애들 데리고 강당으로 옮겨줄 수 있을까요?
아,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본관 4층 창고. 기억 속의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남자는 기꺼운 마음으로 열쇠를 받아들었다. 학생부에 옹기종기 모여 학생부장의 꾸지람을 듣던 남자아이 네 명이 남자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입에서는 연신 불평 불만이 터졌지만, 남자의 정신은 온통 손에 쥔 열쇠에 쏠려 있었다. 그 앞에 서서 항상 내려다보기만 했던 조그만 금속 덩어리에 열쇠를 찔러 넣었다. 오랫동안 잠겨 있었는지 뻑뻑하게 돌아가는 느낌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끝까지 돌아간 열쇠와 함께 턱, 하며 잠금이 풀리는 순간, 남자는 심장이 가볍게 진동하는 것 같았다. 녹슨 얇은 철문이 껄끄러운 소음을 만들며 천천히 벌어졌다. 열린 문 너머, 얼룩진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발을 들였다. 뽀얗게 앉은 먼지가 신발 바닥과 바짓단을 적셨다. 남자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뒤를 따라오는 네 명의 발소리는 산만했다. 스산한 정적 속에 걷는 소리만 주변을 채웠다. 아이들은 그 오래된 공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창고에서 짐을 꺼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남자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계단 한 칸마다 추억들이 피어났다. 잠든 친구의 실내화를 숨긴 기억, 체육복을 빌렸다가 세 달만에 돌려준 기억, 말뚝박기를 하다 교복 바지가 찢어진 기억. 남자는 두 발을 나란히 했다.
계단이 끝난 곳, 3층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면 오른쪽으로 돌아야 했다. 난간에 가져다 댄 손에 텁텁한 먼지가 묻어났다. 남자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가 왼쪽 모퉁이에 닿았다. 모퉁이 뒤에서 익숙한 내음이 풍겼다. 코 끝을 감싸는 비릿한 향기를 따라 코너를 돌자, 텅 빈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서랍 깊은 곳의 사진을 꺼내는 기분으로 걸었다. 계단 바로 옆에 있어서 등교하기 편하다고 부러워했던 교실과 매일 흘긋거리며 훔쳐봤던 교실을 지나, 친구들과 부대끼던 교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먼지가 껴 뿌얘진 창문 뒤로 친구들의 얼굴이 번졌다. 자장가 같았던 문학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쓸었다. 남자는 가만히 벽에 기대어 섰다. 여전히 차가운 시멘트 벽이 등에 닿았다. 마주보고 선 창 밖엔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과 벚꽃 나무가 넘실거렸다. 3교시 수업이 유난히도 나른했던 그 날의 소년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가방을 멘 회색 교복 차림의 소녀가 남자와 같은 모양으로 서 있었다. 볼품없이 찌그러진 가방과 그 옆으로 벽에 댄 손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운동화는 때묻은 곳 없이 깨끗했다. 맞은 편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눈을 감은 얼굴이 투명하게 반짝였다. 세상에서 가장 맑아 보이던 소녀. 남자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저기,
주변은 고요했고 그래서 남자의 목소리는 유독 크게 들렸다. 감았던 눈을 뜬 소녀가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까만 눈동자에 남자의 얼굴이 가득했다. 느릿한 소녀의 행동이 영화처럼 그려졌다.
안녕.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말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어색했다.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이고 다시 입을 벌렸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남자는 색이 없는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굳게 닫힌 소녀의 입이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벌어졌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화사하게 피어나는 미소가 남자의 솜통을 조여오는 듯 했다. 시간을 다스리는 신이 있다면, 그가 시간의 태엽을 느리게 감고 있는 게 분명할 것이리라. 마침내 만개한 얼굴은 흐드러지게 핀 벚꽃 같았다. 소녀의 웃음에 숨이 막혔다.
안녕.
정신이 혼미했다. 남자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올랐다.
6.
시곗바늘의 끝은 2006년 그 날, 3교시 문학 수업이 끝나기 2분 전에 멈춰 있었다. 열여덟 살의 소년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Fin.
; ? 이거 뭡니까?
; ??????????????
; 초록글 쪽지를 본 첫 반응 (당황)
; 물론 지금은 기쁩니다.
; 첫 글임에도 꽤 많이 달린 덧글에 놀랐는데 초록글까지 올라가다니..
; 모두 감사드립니다. 덧글 달아주신 분들은 조금 더 감사해요. 그리고 많은 칭찬들도 감사합니다.
; 제가 초록글 감은 아닌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하네요.
; 글 예쁘게 쓸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 그리고 저는 덧글에 답글 못 달아드립니다. 부끄럽거든요.
; 그래도 다 보고 있어요. 서너 번씩 계속 봅니다. 정말정말 감사해요.
; 혹시 저 기다리신 분 있으셨나요? (소심)
; 저는 가뭄에 콩 나듯 글을 올립니다.
; 기다려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리지만, 제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고 마음 쓰신다면 제가 슬퍼요.
; 사실 저는 텀이 길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다른 분들께서 글 올리시는 속도가 워낙 (생략)
; 글 잘 쓰시는 분들 많잖아요. 그 분들 글 보시다가 잊을 때 쯤 되면 신알신 쪽지가 올 거에요.
; 글잡담 작가 분옥님의 새 글이 등록되었습니다!
; 사담이 길어졌네요. 초록글 때문인가봐요.
;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다음에 또 뵈어요.
; 분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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