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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가 있던 자리분옥
1.
아야.
오늘도 너에게 편지를 쓴다.
낮에 옷 정리를 했어. 추워서 입김이 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바깥엔 벚꽃이 폈어. 봄인가봐. 두꺼운 옷도 이젠 안녕이야.
봄이야. 봄. 꽃 피는 봄.
이맘 때 쯤이었구나, 너를 처음 본 게.
기억 나? 아야, 우리가 처음 만난 날.
2.
고르지 못한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리는 커다란 차 뒤로 흙먼지가 안개처럼 뿌옇게 흩어졌다. 부아앙― 하는 소리에 개울가에 모여 자갈 사이 쓰레기를 줍던 소년 몇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까만 눈 여러 쌍이 차를 졸졸 따라가다 이내 발 아래 돌로 향했다. 그 중 하나, 무리에서 가장 키가 큰 소년 하나는 길을 따라 사라지는 차를 향해 여전히 시선을 두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소년의 눈에 저 멀리 커다란 이층 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런 게 있었나, 소년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욕을 뱉으며 소년의 다리를 툭툭 치는 친구의 손에 시선을 거두고 쓰레기 줍기에 동참해야 했다.
3.
소년은 거친 시골길을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걸었다. 오후 네 시. 보통의 고등학생이라면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소년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학교 쯤이야 제끼면 되지. 몸에 맞게 다시 수선된 교복 바지 밑단이 발을 내딛을 때 마다 폴폴 올라오는 흙먼지에 뽀얗게 물들었다. 든 것 하나 없지만 크기만 한 가방을 고쳐 멘 소년은 전보다 가까워진 집을 눈에 담았다. 스무 걸음 정도만 걸으면 집 대문을 손으로 밀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은 걸음을 옮기며 건물과 건물을 둥글게 둘러싼 담을 살폈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나 봤던 서양식 건물에, 칠이 다 벗겨진 지붕과 군데군데 벽돌이 떨어져 나간 벽, 그리고 담 아래 스산한 모양으로 쌓인, 말라 비틀어진 낙엽과 꽃잎들. 언제 피고 진 것일까. 오래토록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했다. 소년은 슬리퍼를 질질 끌던 발을 멈추었다. 앞에 버티고 선 철문은 한 눈에 보아도 무거워보였다. 소년은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이고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가볍게 주먹 쥔 손을 들어 곧게 펴곤 힘을 주어 대문을 밀었다.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년의 예상과는 다르게, 녹슨 문은 나름 기괴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놀라 바로 손을 떼어냈지만, 소년이 워낙 힘을 실어 문을 민 탓에 문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열리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하고 돌아가려 했는데 문이 활짝 열려버렸다. 소년은 당황한 얼굴로 뒷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발은 땅에 붙었는데 상체만 들썩인다.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앞니로 아랫입술만 잘근거리던 소년이 문 너머 커다란 건물로 시선을 던졌다. 마침내 결심한 듯, 소년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발을 들어 대문을 넘었다. 오른발이 대문 너머 땅에 닿았을 때였다.
악!
검은 머리칼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악, 하는 소리만 내지르고 소년은 냅다 뒤로 돌아 걸어왔던 길을 뛰었다.
4.
소년은 분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인상까지 써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내려가다가 아직 한 글자도 채우지 못한 남은 종이들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그 낡은 집만 아니었다면 학교를 몰래 빠져나올 일도 없었고 이 반성문 따위를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전 날의 까만 머리카락이 다시금 떠올랐다.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 같았다. 소년은 연필을 고쳐 쥐고 죄송합니다, 수업 도중에 나가지 않겠습니다, 하는 말들을 다시 적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그 커다란 집을 생각하면서.
5.
사방이 어두운 밤이었다. 소년은 다시, 그 집 앞에 서 있었다. 시골 마을의 외진 곳이었지만 마을과 그리 멀지는 않았기에 사실 그닥 어둡진 않았다. 마을에서 발한 불빛의 끝자락이 집에 간신히 닿아있는 정도였다. 대문 앞에 선 소년은 이 집을 또 찾은 것을 잠시 후회했다. 친구들을 데려올 걸 그랬나. 그냥 돌아갈까.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상념들을 떨쳐내려 고개를 도리질쳤다. 소년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고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처음 밀었을 때 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린 문, 그리고 그 너머의 풍경. 소년은 눈만 끔벅이고 서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모습이 소년의 눈 앞에 펼쳐졌다.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튼튼한 건물이 문 너머에 있었다. 따뜻한 색의 벽과 소년의 집 현관보다 두 배는 되는 듯한 커다란 문, 마찬가지로 커다란 창문들. 단정하게 정돈된 정원. 잔디와 함께 깔린 색색의 꽃들과 커다란 나무. 처음 보았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양이었다. 벙찐 표정으로 소년은 잡고 있던 손잡이를 당겨 문을 닫았다.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다. 헛것, 헛것을 본 것이라고. 소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시 확인하기 위해 문을 천천히 밀었다.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하얀 얼굴이 불쑥 튀어나온다. 소년은 숨을 흡, 하고 들이마셨다. 소년이 문을 엶과 동시에 안쪽에서 잡아당기는 힘 탓에 소년의 상체가 안쪽으로 기울어졌다. 문 틈으로 뛰어나온 얼굴은 소년의 가슴팍에 부닥쳤고, 문고리를 놓고 뒤로 넘어지는 소년의 위로 쓰러졌다. 가볍게 철컥거리며 문이 닫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뭐,
쉿.
거기 누구에요?
...
누구야?
이리 따라와.
인상을 찌푸리며 볼멘소리를 뱉으려던 소년의 입을 덮은 찬 손은 대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년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소년은 왜인지 저를 이끄는 손을 따라갔다. 말 없이 앞서 가는 까만 머리카락과 하늘색 치맛자락만 보며. 높은 담을 따라 소년을 이끌던 소녀는 건물 뒤에 와서야 손을 놓고 소년을 보았다. 소년의 눈에 소녀의 얼굴이 오롯이 담겼다. 창백한 달빛에 부드럽게 빛나는 얼굴과 짙은 고동색 눈동자가 온전히 소년을 향해 있었다. 동그란 이마부터 연분홍 입술까지 눈으로 쓸어내린 소년은 다시 소녀와 눈을 맞추었다.
와.
이렇게 생긴 사람도 있구나.
너구나.
.. 어?
넋을 놓은 소년에게로 소녀는 뛰어들었다. 가느다란 팔이 소년의 목을 감고 꼭 끌어안는다. 소년의 얼굴이 붉게 물들며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 되었다. 소녀를 떼어내려 조그만 어깨에 두 손을 얹었지만, 귓가로 흘러드는 달큰한 목소리에 소년은 어색한 손짓으로 그 등을 안았다.
날 찾아준 게 너여서 기뻐.
이렇게 예쁜 사람도 있구나.
너는 내 하나뿐인 비밀이야.
아카시아 향이 나는 것 같았다.
6.
내 하나뿐인 비밀이야. 그러니 우리끼리는 비밀 없기로 해.
소년과 소녀는 손바닥을 마주하고 달빛 아래서 약속했다. 밤마다 그들은 커다란 소녀의 집 뒤 담벼락에서 만났다. 소년이 담 아래에서 파란 창을 물끄럼 올려다보면, 소녀는 커튼이며 옷가지며 하는 것들을 엮어 만든 줄을 내려 그것을 타고 소년에게 안겼다. 둘은 약속했던 그 날처럼, 달빛을 받으며 담 아래 앉아 밤새 얘기를 하기도 하고, 꽃을 꺾어 서로의 머리카락에 엮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다 달이 기울고 구름에 흐릿하게 가려질 때 즈음 다음날을 기약하며 손인사를 하곤 했다.
7.
네 이름은 뭐야?
내 이름?
응.
아야!
소녀가 땅을 짚었던 손을 얼른 제 가슴께로 가져가며 말했다. 아야? 하고 되묻는 소년에, 소녀는 잠시 골똘한 표정으로 소년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손 끝에 붉은 이슬이 맺혔다. 소년은 그것을 보다가 소녀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아야.
8.
아, 저번에도 전정국 때문에 쓰레기 주웠는데.
시끄러.
손에 쓰레기 봉투를 든 남자아이 하나가 불퉁한 표정으로 투덜댔다. 소년은 손가락을 세워 귀를 벅벅 긁고 친구들을 앞서갔다. 친구들은 소년을 향해 별 뜻 없는 욕을 던졌다. 그러다 갑자기 그 중 한 아이가 호들갑을 떨며 다른 아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얼마나 흥미있는 이야기였냐 하면, 제 친구들보다 빠른 걸음으로 걷던 소년조차 멈추게 할 정도였으니까.
저 쪽, 산으로 가는 길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보이는 빈 집 있잖아.
애새끼들 담력시험 한다고 여름마다 가는 집?
맞아. 거기 누구 이사온대. 부자라던데.
부자가 이런 덴 왜 와?
그 집 주인 손잔가, 증손잔가 그렇대. 모레부터 개수공사 들어간댔어.
9.
한참을 기다려도 소녀가 나타나지 않았다. 굳게 닫힌 파란 창은 열릴 생각을 않아 보였고, 소년은 그저 위만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야.
색이 바래진 파란 창들과 먼지 낀 유리가 유난히 낡아보였다. 바람이 분다. 낡은 건물과 낡은 창은 너무나 쓸쓸하다.
10.
좀 오래 됐지. 일제 때 만들었다고 했어. 전쟁났을 때 사람이 안 살긴 했는데 워낙 산 속이라 그렇게 망가질 정도는 아니었나봐, 멀쩡한 거 보면. 아, 전쟁 끝나고, 나중에 누가 그 집을 샀는데, 집으로 쓴 건 아니고 별장으로 쓴 거래. 집 주인 딸이 천식에 뭐에, 몸이 안 좋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요양도 하고 겸사겸사 쓰려고 산 거지. 난 왜 이렇게 잘 아냐고? 그야, 우리 아부지가 말씀해주셨으니까 알지.
어? 딸?
어어, 죽었대. 그 집에서.
병 고치려고 백방으로 손 써 봤는데도 안 낫더란다.
만날 방에 갇혀서 창문으로 하늘 쳐다보고, 몇 번은 커튼으로 줄 만들어서 몰래 빠져 나갔다가 잡혀 들어오기도 하고. 그래서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그 딸보고 이렇게 불렀대.
파란 창에 갇힌 소녀.
11.
그 날 밤도 소년은 소녀를 찾아갔다. 꽉 찬 보름달이 굳게 버티고 선 소년의 정수리를 쓰담었다.
아야, 네 이름을 세 번 불러도 네가 나타나지 않으면 난 돌아갈거야. 돌아가서 다시는 이 곳을 찾지 않을거야.
아야, 너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 왜 너를 보여주지 않는 거야? 우리 서로 약속했잖아. 저 달을 보며 속삭였잖아. 너를 알고 싶어. 너의 가까이에서 너의 숨이 되고 싶어. 파란 창에 갇힌 소녀. 도대체 너는 누구야? 밤마다 나타나는 너는 대체 누구야?
네가 보고싶어.
널 좋아해.
.. 아야.
달이 기운다. 소년은 무겁게 고개를 떨구었다. 흐릿해지는 달빛을 따라 소년의 그림자도 흐릿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소녀의 잔상을 털어내고 소년은 발을 돌렸다. 흙바닥에 자박거리는 소리가 탁하게 울렸다.
정국아!
며칠 만에 들어보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소년은 그 목소리가 흩어질까 창을 향해 재빨리 몸을 돌렸다. 바람이 분다. 싸아― 싸아― 나뭇잎 소리와 함께 소녀의 검은 머리칼이 흩날렸다.
거짓말 같은 거, 없기로 했으면서.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
묻고 싶은 게 많아.
다 대답해줄 수 없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야.
난 이제 떠나야 해. 더 이상 여기 머물러있을 수 없어.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야 돼. 정국아, 날 용서해 줘.
...
제발... 제발 날 용서한다고 말해줘..
양 옆으로 활짝 열린 파란 창이 바람에 일렁였다. 복숭아같은 소녀의 뺨 위로 눈물이 굴렀다. 손이 하얗게 질릴 만큼 창틀을 꽉 쥔 손이 바들거리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용서할 것도 없어. 내가 널 좋아한다는 이유로 모든 게 면죄부가 되니까.
소년이 앞니를 귀엽게 드러내며 웃었다. 눈물을 쏟아내던 소녀의 얼굴 위에도 미소가 번져올랐다. 가늘게 접히는 눈 사이는 여전히 축축했다.
나도, 나도 널 좋아해.
...
너는 내 첫사랑이야.
꽃바람이 불었다. 아카시아 향이 난다.
12.
내가 말 안했었지.
아야.
나도, 네가 내 첫사랑이야.
바깥 하늘엔 너와 헤어지던 날처럼 보름달이 떴어. 나는 오늘도 네게 닿지 않을 편지를 쓴다.
언젠가 만날 날에, 편지를 한아름 안고 너에게 갈게.
평생을 읽고 읽어야 할 만큼 많은 편지를 안고 갈게.
네가 있던 자리, 그 곳으로 갈게.
꼭 내 옆에 앉아서 읽어줘.
그 땐 나와 함께 해줘.
13.
아야.
네가 보고 싶어.
Fin.
* 권지용 님 감사합니다 :)
; 오랜만이에요, 여러분.
; 긴 말 안하겠습니다. 쓰차에 걸렸었어요.
; 하하하ㅏㅏ하하
; 사실 쓰차 풀린지 며칠 됐는데 소재가 없어서 못 쓰고 있다가 오늘 돌아왔습니다.
; 어제 추억의 마니를 봤거든요. 거기서 소재를 가져왔는데, 음. 네.
; 소재는 좋은 것 같은데 제 글이 참. 잘 안 따라주네요. 역시 급하게 온 게 문제였을까요ㅜㅜ
; 요즘은 소재도 딸리고 글도 잘 안 써지고 (한숨)
; 그래도 힘내보도록 하겠습니다.
; 내일이 월요일이네요 헣.. 내 독자님들도 힘내요.
; 항상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 그럼 안녕
; 분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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