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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분옥
1.
바람 불어.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소년은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떼고 숨을 죽였다. 창 너머 기괴한 바람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어왔다. 창문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잠이 덜 깬 뺨을 치대는 것 같기도 했다. 소년은 숨을 폭 내쉬며 다시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건너편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소년도 딱히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늘이 날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소년은 이불을 목 끝까지 덮었다. 오른쪽 귀에는 여전히 불규칙한 호흡이, 왼쪽 귀에는 드센 바람과 그에 유리창이 진동하는 소리가 닿았다. 순간 조용해지는 듯 싶다가, 파도 비슷한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커다랗게 다가온다.
윤기야.
불안이 섞인 신음과 함께 뱉어낸 소년의 이름이었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도 알량한 위로를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말 없이 연신 숨만 뱉어냈다. 소년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바르게 누워 멀뚱히 눈만 끔벅이고 있었다. 책상 한 켠에 놓은 시계의 초침이 바쁘게 달리는 소리가 요란스레 느껴질만큼 고요했다.
자?
대답 대신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소년은 입술을 꼭 물었다. 사실 아니, 라는 대답이 올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자는 사람 깨워놓고 너는 자냐. 소년이 잠든 소녀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소녀가 잠들었다는 것을 눈치챘음에도 굳이 자냐고 물은 것은, 어쩌면 물꼬를 트는 행위었을지도 모른다. 바람 불어, 하는 소녀의 첫 마디로 시작된 둘의 말 없는 통화는 늘 이렇게 소년의 독백으로 끝을 봤다. 오늘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조용히, 나긋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풀어 놓던 소년이 가늘게 숨을 뱉곤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한풀 꺾인 듯 아까보다 옅어진 바람이 창을 긁고 지나갔다.
넌 싫지? 바람 부는 거.
휘파람같은 바람 소리와 소녀의 숨소리가 오묘하게 섞여 소년의 귓볼을 간지럽혔다. 미간을 구기고 왼쪽 귀를 벅벅 긁었다. 손톱이 지나간 부위가 시원한 듯 하다가 화끈거린다.
바람 매일 불었으면 좋겠다.
...
그래서 네가 매일 불렀으면.
내 이름 말이야. 소년은 전화를 끊고 눈을 감았다.
2.
소년은 소녀와의 대화창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조금은 긴 편에 속하는 스크롤 바가 떨어지는 듯 하다가 멈춘다. 소년의 답장을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짙은 어둠이 소년의 어깨에 무겁게 늘어졌다. 오늘 밤은 조용하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멋대로 너에게 전화를 걸지 않길.
스스로에게 당부하며 소년은 휴대폰 전원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3.
지나친 참견.
오지랖.
여린 살 속에 숨겨둔 마음이 가끔씩 제 틀을 벗어날 때가 있다. 얇은 가죽을 벗겨내고 속을 드러내는 소년에게 소녀는 말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무감각한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이 낯설게 느껴져 소년은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
너와 나의 관계.
소년은 문득 소녀에게 묻고 싶어졌다. 밤마다 전화하는 사이는 무슨 사이야?
4.
'상관'에 대하여. 간섭, 참견, 관련, 관계, 연관.
5.
소년은 소녀와 전화를 하지 않는 밤이면 밤마다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곤 했다. 가끔 제 어깨죽지에 닿는 머리칼과 따뜻한 향을 흩뿌리는 입술과 통통한 볼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매일 밤 소녀를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괴로움의 연속은 소녀와의 '상관'에 대한 꿈을 만들어냈다. 부질없는 망상에 뜬 마음과 소년이 절대로 잡을 수 없는 뜬 구름같은 희망은 그것을 향해 들어올린 얼굴을 지탱하는 소년의 목을 고통스럽게 했다. 살며시 번지는 고통이 숨을 조여 갑갑해질 때 즈음, 꽃이 피기는 커녕 씨앗조차 찾을 수 없는 현실로 소년을 끌어내려 집어삼켰다.
6.
나는 너와 상관하는 걸 생각해. 그 생각이 끝을 달리고 달려 가늘게 날카로워지면 내 심장을 파고들어 날 죽여. 그리고 나는 이따위 짓을 매일 밤 반복하지.
바람 부는 날 빼고.
7.
바람이 분다. 봄바람이 소녀의 스커트 자락을 쥐고 장난을 쳤다. 밝게 웃는 소녀의 얼굴과 그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얼굴. 소년은 거리를 두고 둘을 눈에 담았다. 소녀의 옆에 선 낯선 이의 얼굴을 물끄럼 쳐다보았다. 소년은 그 사람이 부러웠다. 그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소녀의 옆 자리가 부러웠다. 소녀의 머리를 쓰담고 소녀의 볼을 감싸고 소녀의 손을 잡고 소녀의 입술에 입 맞추고.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서 온전한 제 감정을 소녀에게 쏟고 싶었다. 소년은 지난 밤 머릿속을 헤집었던 상상 속 소녀를 떠올렸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존재하더라도 소년은 절대로 만나지 못할 모습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족하니까. 나는 상상만으로도 족하니까.
욕심내지 말자.
소년은 제 팔뚝을 꼬집었다.
8.
소녀를 두렵게 했던 매서운 바람은 성질을 죽이고 간지러운 바람으로 탈바꿈했다. 이제 소녀가 소년에게 전화를 거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소년은 소녀와의 대화창을 닫고 소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종료 버튼과 통화 버튼을 번갈아가며 연신 눌러댔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만큼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소녀가 잠 기운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것은 새벽 1시 46분이 47분으로 넘어가던 순간이었다. 소년은 전화를 걸어놓고는 말이 없었다. 소년의 이름을 부르던 소녀도 입을 닫았다. 째깍째깍. 둘의 정적 속에서 움직이는 건 시간 뿐이었다.
바람 불어.
소년이 입을 열었다. 안 불어. 소녀는 부정의 대답을 꺼냈다. 소녀의 대답에 소년 또한 부정의 대답을 했다. 소녀는 다시 한 번 제 대답을 반복했고, 소년도 그랬다.
너랑 나는 무슨 사이지?
말을 돌린 것은 소년이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질문에 소녀는 말을 잃고 침묵을 내놓았다. 늘 그랬듯이 소년은 소녀를 기다렸다. 소녀의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소년은 손가락으로 소녀의 이름자를 직직 그렸다. 네 번 이름을 쓰고 다섯 번째로 이름의 마지막 글자 한 획을 그을 때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아무 사이도 아닌 사이.
그럼 나는 너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인가?
응.
두 번째 질문에 달아준 답은 비교적 빠르고 간단했다. 이번엔 소년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소녀는 소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할 말이 없으면 끊겠다고 의도치 않게 소년을 재촉해왔다. 소년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이 손 안에 소녀의 손가락을 담았으면, 싶었다.
나는 너와 상관하는 걸 생각해.
무슨 소리야?
이젠 안 그럴게.
소년은 소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소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거절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의 전원을 끈 소년은 바른 자세로 자리에 누웠다. 서늘한 바람이 닿지 않는 볼이 어색해 손톱을 세워 벅벅 긁곤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익숙한 바람이 불지 않는다. 이제 바람 부는 날은 없겠지. 바람 안 부는 날만 잔뜩.
잔뜩.
잔뜩.
9.
'상관'에 대하여. 간섭, 참견, 관련, 관계, 연관.
그리고 성교(姓交).
Fin.
* 권지용 님 감사합니다 :)
; 오랜만입니다.
; 새벽 감성으로 썼어요. 내일 아침에 일어나 제가 쓴 글을 보고 머리를 쥐어 뜯을 생각을 하니 신나네요.
; 이래서 사람들이 충동적이 아닌 계획적으로 살라는 말을 하나봐요.
; 아 '상관'에 대하여 와 함께 나열된 단어들은 상관의 유사어입니다. 충격적이지 않나요? 예를 들면 성ㄱ -검색요정 올림-
; 지난 글에서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생각도 못했는데 감사합니다 여러분.
; 추천 수도 3이나 되더라구요. 대박!
; 그리고 저에게 암호닉이라는 걸 신청해주신 분이 계십니다. 저에게 암호닉이라니 헠
; 정말 감사드려요. 신알신 해주신 분들도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 오랜만에 오니 잡담이 길어지네요. 이만 갈게요. 다음에 또 뵈어요.
; 분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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