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졸려."
"잘 거면 학교 가서 자라, 길에서 쓰러지면 버리고 갈거임."
"개새끼...."
입으로 쉴새없이 욕을 중얼거리며 자꾸만 눈이 감기는 바람에 혹시 쓰러져 잘 지도 모르는 관계로 찬열이 교복 셔츠를 붙잡고 학교로 향했다. 새벽에 우유배달 할 때는 4시에 일어나도 거뜬했는데, 딱 하루 쉬었더니 생체리듬이 개판 5분전이다. 그래도 근 한달만에 아침을 빵이 아닌 밥으로 먹고 나와서 영 기분이 나쁜 건 아니다. 낄낄.
"오빠 오늘은 방송부 늦게 끝나니까 갈땐 종인이랑 가라."
"오냐...."
"아 맞다, 이따가 우유 받으러 오빠 반으로 와. 박찬수가 어디서 제티 뽀렸다고 몇 개 주더라."
"넌?"
"하루이틀 일임? 그리고 내가 이 키에 우유급식 하게 생겼냐 븅아, 다 너 잘키우려고 신청했지."
두 달 전부터 찬열인 갑자기 먹지도 않던 우유급식을 신청했다. 찬열이 엄마는 이자식이 지붕 뚫으려고 작정했냐며 윽박을 지르시면서도 급식비를 주셨고, 찬열이는 그 우유를 한 달 내내 고스란히 나한테 갖다바쳤다. 그리고 이번 달에도 마찬가지. 너 이자식, 그러라고 부모님이 돈벌어다가 급식비 주신 줄 아느냐!!! 라는 말이 목구멍에 탁 차서 넘실거리고 있지만 거절하지 못했다. 우유 구경 한 지도 오래됐기 때문이다..아 씨 눈물나.
찬열이네 부모님, 죄송해요. 딱 180까지만 크고 저새끼 머리통 후려서라도 그만두게 하겠습니다.
"근데 그러고보니까 니가 왜 내 오빠야."
"넌 뭔가 내 여동생같이 생겼어. 막 그런 거 있잖아, 내 여동생이 있다면 이렇게 생겼을 것 같다 이런 느낌?"
"시끄러, 들어가 임마."
나 이따가 파레트 빌려줘. 오냐. 찬열이가 쿨하게 손을 흔들며 교실로 들어갔다. 나 중학교때 별명이 변카소였다. 변비걸린 피카소. 척 보기에도 멘탈붕괴와 혼돈의 카오스가 느껴지는 그림이라는 평을 자주 받았는데, 내가 그린 건 고요한 알프스 산맥의 양치기 소녀일 뿐이었다. 그 후로도 줄곧 풍경화를 그렸는데 상상화를 그렸냐는 질문과 함께 초현실주의의 천재가 21세기에 살아있다면 바로 변백현일 거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시발, 내 그림이 그토록 개같단 말인가. 어쩔 수 없다. 변카소건 뭐건 일단 수행평가는 해야 할 거 아니야.
"변백!!!!!"
교실에 입장하자마자 구석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외국인 노동자 하나가 마하의 속도로 달려와서 내 어깨를 붙잡고 짤짤 흔들었다. 야, 나 어제 일 나갔거든? 존나 대박. 대학병원 의사 딸이래!!!! 자기도 의대생!!!!!!
"...대한민국 의학계의 미래는 밝구나."
"고럼, 테크닉이 죽였거든."
아침부터 음란마귀가 잔뜩 씌인 불건전한 대사를 줄줄 늘어놓길래 제발 닥치라고 소리질렀더니 조니니 삐져써....6반 태미니한테 갈꼬야 뿌잉뿌잉 이러면서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간다. 그래, 제발 가라 가. 저놈의 누나타령이랑 토나오는 귀척 보느니 차라리 혼자 놀래.
"김종인이 뭐래?"
"있어, 넌 알면 충격먹어."
"뭔데, 말해봐."
"도련님은 알면 다친다니까여."
오세훈 이건 또 왜이래, 생전 관심도 없던 김종인과 내 대화에 끼어들고 난리. 솔직히 선량한 고등학교 2학년생이 알아서 좋을만 한 소재는 아니지. 더군다나 오세훈같은 덴마크 왕세손 뺨치는 근엄이 타입은.
"근데 오늘은 왜이렇게 골골대냐, 변백."
"새벽배달 안하니까 아침에 너무 늦게 일어나. 졸려 죽을 것 같은데 왠지 그 전에 굶어죽을 지도 몰라."
"...."
"뭐, 너같은 놈은 절대 공감 못하겠지만."
씁쓸하고도 세상의 모든 고난과 역경을 다 담은 듯한 한숨을 쉬고는 내 자리로 걸어가 책상에 엎드렸다. 오세훈은 쪼르르 따라와서 옆자리 책상에 걸터앉는다.
Aㅏ....이제 뭐해먹고 살지.
"차라리 삥을 뜯는 게 어떰? 달마다 상납금만 모아도 존나 짭짤하던데."
"그건 너 전학오기 전 그 동네에서나 통하는 거고요. 이 동네에 삥뜯을 놈이 어딨어, 다 거기서 거기구만. 그리고 넌 그게 반장이 할 소리냐?"
"새끼가 또 모범적인 반장 기대하네, 수만동에서?"
"미안하다. 근데 진짜 삥은 아닌 거 같애."
"아, 그럼 담배장사. 한갑에 삼천 원도 안하는데 학교에 한 개피당 몇백원 씩 받고 팔아."
"나 아직도 나름 중딩소리 듣고 다니는 놈이야, 내가 담배를 어떻게 ㅅ...."
아, 찬열이 시키면 되겠다.
"고맙다 세훈아, 니가 쓸모도 있구나."
역시 오세훈은 이런 쪽으로 머리가 기가막히게 잘 돌아간다. 그러나 그 머리로 공부했으면 전교1등 했겠다 이런 말은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오세훈은 진짜 전교1등이기 때문이다. 니미럴, 재수없는 새끼.
근데 우리 오재수가 황송하게도 나같은 머글한테 말도 걸어주신다.
"...야."
"어."
"백현아."
"어, 니가 웬일로 내 이름을 다 부르냐. 소름돋게."
"...근데, 나 김종인이 좋은 거 같아."
.....아 진짜 이건 또 왜이러냐고. 공부 너무 많이해서 훼까닥 돌았냐.
*
어제 김종인 말도 씹고 열심히 부업을 한 결과 내일까지 갖다드려야 할 만 개가 후딱 끝났다. 아, 이 뿌듯함. 새벽에 달동네를 집집마다 돌며 우유랑 신문을 뿌리고 집에 돌아와서 찬물에 샤워하면서 등교준비 할 때의 그 쾌감, (물론 지금은 느낄 수 없긴 하다.)주유소에서 반나절 내내 총 쏘다가 나이 지긋한 아저씨 손님한테서 고생한다는 말과 함께 머리 쓰다듬을 당했을 때의 그 훈훈함. 알바는 돈과 함께 그런 아름다운 것들을 가져다준다. 여러분, 알바하세요.
그러므로 난 지금 점심시간에 칙칙하고 땀냄새나는 교실이 아닌 햇볕 따사로운 교정을 거닐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이거다. 물론 그래야만 하는데,
".....대체 어디가."
"그냥....."
난 왜 되지도 않는 연애상담을 해주고 있어야 되지?
"언제부턴데."
"...좀 됐는데, 한... 작년 가을이었나. 아, 체육대회 한 날."
작년 가을이라, 그럼 김종인이 그 빌어먹을 애인대행이라는 것을 시작하기 직전 아닌가. 오세훈 이새끼 알게모르게 속 좀 썩었겠군.
"그때 걔네반이랑 우리반이랑 축구 결승 붙었거든, 난 살 타는 거 싫어서 스탠드에 앉아있고. 근데 김종인 진심 날아다니더라, 우리 반에서 제일 축구 잘하는 놈들이 줄줄이 무너지고 진짜 무슨 폭주기관차 같은 게 운동장을 막 가로지르는 거야. 씨발 나 걔 복도에서 오다가다 마주치는 게 다였는데 우리반 5:0으로 처발리고 있는데도 걔밖에 안 보이더라. 와...정말."
...반했군. 그래, 호모는 어딜 가나 있는 법이지. 아무리 수만고가 남녀공학이라고 해도 작년에 졸업한 선배들 중에는 공개 커밍아웃한 게이커플도 있었다고 했다. 동네가 워낙 작고 전 학년이 초중고를 같이 나와 다 가족같은 사이라서 매장되지 않았을 뿐, 굉장히 무모하지만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다.
암튼 그래, 척 봐도 멋있다 섹시하다 이딴 거 나오겠네. 솔직히 김종인도 여자애들한테 인기 꽤 많은 편이라 예전에는 인정 안했지만 그래...흑인 스타일의 시커먼 피부나 그 진한 쌍커풀이나 전형적인 섹시남의 대명사라는 건 어렴풋이 알 거 같다.근데 그럼 오세훈은 AV취향도 동남아 쪽일까?
"...존나 귀여웠어."
....왓? 팔든?
"그 까만 얼굴이 빨개져선 헥헥거리고 있는 게 진짜 꼭 무슨 강아지 같았어, 맘같아선 달려가서 개껌 던져주면서 손 앉아 빵야 다 시켜보고 뽀뽀하고 목줄 매달아서 끌고다니고 싶었다니까."
그건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지배욕에 가깝습니다만,
"그때부터 좋아하기 시작했어. 올해 같은 반 되서 존나 좋았다? 근데 애새끼가 무슨 애인대행 같은 걸 한대, 당장 가서 그년들 다 싸잡아 족쳐놓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니까. 한년은 집주소까지 알아놨는데."
"...싸이코새끼... 그사람은 누군데?"
"시계 사준년. 모텔로 들어가는 것도 봤어. 물론 그년 차에 스크래치 몇 개 내긴 했는데, 그래도 분이 안 풀리더라."
"야...근데, 이런 표현은 좀 그렇다만 김종인이 박힌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예민하게 그러냐?"
"넌 생각해봐, 새끼야!!!!"
"?"
"니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다른 남자애를 박고 있어, 니 기분이 어떻겠냐고!!!!!!!!"
"...그게 무슨 거지같은 논리야!!!!!!!!!!"
미쳤다. 오세훈 진짜 제대로 미쳤다. 난 여기서 나가겠어, 저자식이랑 더는 대화 못하겠다. 오세훈은 중학교 때 이곳으로 전학을 왔는데, 어지간하면 이 후진 동네로 전학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 터라 당시 짝이었던 내가 제게 관심을 보이며 취미가 뭐냐고 묻자 존니 큰 소리로 지금 나한테 작업거는 거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 학년에 변백현이 게이라더라 하는 소문이 쫙 퍼졌었다. 반쯤 돌아버린 내가 마구 따지자 오세훈은 상큼하게 웃으며 그게 다 관심의 표현이라는 병신같지만 멋있는 명대사를 날렸다.
니미럴, 아무튼 이번엔 차에 스크래치 내는 게 관심의 표현이라 이거지. 너한텐 절대 우리 종인이 못 줘......
"변백 선택해. 김종인보고 애인대행 그만두라 하든지, 아님 나 도와줘."
"나 끌어들이지 마라, 너임마 이거 범죄야.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남의 집 귀한딸 차에 흠집을 내?"
"....선택해."
"그자식 성인 되기 전까진 지구가 둘로 쪼개져도 일 계속 한댔는데."
"그럼 나랑 걔랑 잘되게 도와줘."
"승산이 있겠냐 병신아? 여자 상대로 돈받고 일하는 놈인데."
"혹시 알아? 호모 의뢰도 받았을지."
"그거는 모르는 일이지."
"깝칠래?"
....엄마........살려줘.
*
"근데 박찬열은 방송부에서 대체 뭐하냐? 엔지니어도 아니고, 카메라는 딴놈이 하던데."
"몰라, 찬열이가 아나운서 하면 기집애들 다 쓰러지겠다 그치?"
"그건 인정."
오늘도 일 나감? 어, 시내로 데리러 온대.
역시 김종인은 클라스가 다르다. 나도 뭐, 오늘은 남편 잡아왔다고 사모님께 연락이 왔으니 신나게 총쏘러 가야지. 종인이랑 나란히 교문을 통과해 시내로 가는 길이다. 한 20분은 걸어야 되는데, 그 동안 뭐라도 오세훈에 대해 말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오세훈 망할놈, 나보고 뭐 어쩌라고.
"뭐 할 말 있냐?"
"어? 아아니, 할 말은 무슨. 하하하, 우리 사이에."
사실은 우리 사이 때문에 도저히 말을 못하겠다 이거다. 대체 뭐라고 말해야 되지? 너 오세훈 좋아하니? 아 이건 이뭐병이고, 너 혹시 남자 손님도 받아봤냐? 아구창 날라가지 않을까. 아 머리아파, 몰라몰라. 알아서 하라 그래.....
그나저나 그동안 김종인이 오세훈 참 많이 놀려먹었는데. 어제도 그렇다. 그러고보니 오세훈은 자습시간에 누가 김종인이랑 말만 섞어도 미친듯이 그놈의 이름을 적었다. 반장의 권력남용. 덕분에 지금의 오수라가 있지만. 그리고 김종인은 그런 오세훈이 기집애같이 떽떽거린다고 빈정거리기 일쑤였다. 생리드립은 애교 수준이었으니까.
근데 그런 포악의 정석 김종인이 귀엽다니. 아무래도 올해 세훈이 생일선물로 안경을 맞춰줘야겠다. 물론 그럴 돈은 없지만. 그냥 하는 소리다.
"종인아!!!!!!"
시내에 거의 들어섰을 때쯤 자동차가 빵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완벽한 7옥타브의 고음을 선보이며 김종인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여자는 척 보기에도 존니 비싼 외제차 옆에 서있었고, 또 그에 걸맞게 존나 이뻤다. 입술은 움직이지 않고 복화술로 옆의 김종인에게 물었다.
"쟤가 걔냐? 의사딸."
"어. 시계 말고."
내가 알기론 김종인이 두 탕을 뛰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시계랑 의사딸 두 마리 토끼를 잡다니 진정한 능력남의 길로 들어섰나보다. 물론 김종인은 완벽한 사복차림이었다. 근데 굳이 숨길 필요는 없어보이는데, 저 여잔 한 스물 넷도 안 되 보이니까 고딩이라 하면 더 좋아할 지도 모른다. 내가 강남 쪽에 안 가봐서 잘 모르지만 찬열이네 집 티비에서 가끔 봤던 성형미인의 전형적인 얼굴을 한 의사딸에게로 김종인이 걸어갔다. 의사딸이라더니 성형외과인가보다. 근데 나도 따라가야 되나?
"보고싶었어, 종인아~ 하루 사이에 더 잘생겨졌네?"
"누난 더 예뻐졌어요."
"정말? 안 그래도 어제 필ㄹ.... 아, 아니. 근데 옆엔 누구? 동생이야?"
네, 아는 동생인데 이 근처에서 알바하거든요. 오는 김에 같이 왔어요.
생글생글 웃으며 뚫린 입이라고 거짓말이 술술 잘도 나온다. 김종인이 내 발을 꾹 밟으며 웃으라고 무언의 압박을 주길래 나도 편의점 알바 할 때 자주 써먹었던 영업용 미소를 띠우며 방긋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누나, 종인이형 후배예요."
"어머, 누나래! 어떡해, 종인아 니 동생 진짜 귀엽다. 동생도 같이 갈래? 우리 지금 재밌는데 갈 건데."
재밌는데라면 뻔하지, 전 사양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목끝까지 올라왔지만 오늘은 바빠서 안 되는데... 다음에도 괜찮으시면 데려가 주세요! 라는 가식적인 멘트를 날렸다. 나의 깨끗하고 맑고 자신있는 미소어택에 김종인은 징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모두 깔끔하게 무시했다.
원래 인생은 이렇게 사는거다. 자기는 안 그런 척 하고 지랄이야.
"그래? 아쉽다...어쩔 수 없지."
종인아 타, 의사딸이 김종인한테 조수석을 권하자 김종인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문을 열었다. 종인이 후배, 다음에 꼭 보자? 나는 그 차가 내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방금까지 있던 세 명 중에서 진심으로 웃는 사람은 의사딸 뿐이었다.
......난 그래도 행복한 놈이었어.
김종인처럼 저런 일 할 바에야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근로소년이 되어야지! 그렇게 나는 룰루랄라 주유소로 향했더랬다.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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