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간다.
PC방 알바를 시작한 지 벌써 2주가 지났고,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집을 들락거리며 빗자루의 올바른 사용법 등을 배우는 척 하던 크리스도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한 존나 좋은 오피스텔로 꺼져주셨다. 하다못해 밥솥 뚜껑도 제대로 못 여는 인간이 혼자 살 수 있을리 만무해 집에서 몰래 도우미 아주머니를 고용해 주셨다고는 하는데 글쎄다, 과연 잘 살지는 모르겠다. 이상하게 크리스는 보고있으면 걱정이 가득 생겼다. 너무 곱게 커서 그런가.
그리고 찬열이는 알바에 재미를 붙혔는지 이번에는 카페 얼굴담당으로 취직했다. 말이 카운터 및 홀 서빙이지, 여자 손님 끌어모으는 것과 잡일을 담당하고 있단다. 왠지 찬열인 나보다 배는 쉽게 일자리를 구하는 것 같다. 이래서 사람은 일단 키크고 잘생기고 봐야돼, 절대 고딩의 손이라고 볼 수 없는 기름때와 굳은살 가득한 손을 내려보다가 울화통이 터져 찬열이가 갖다바친 우유를 원샷했다. 으, 차가워. 내가 키 안큰 건 절대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저 집이 가난했을 뿐.
뭐, 그런 거 말고는 딱히 별 일 없었다. 아, 하나 빼먹은 게 있는데.
"김종인, 너 지각."
"뭐 이새끼야!!!!!!! 아직 59분이거든??!!!!!!!!!"
"저 시계 1분 느려. 오늘 지각은 너밖에 없으니까 니가 교실이랑 화장실 청소 싹 다 하고 가면 되겠다."
"아 너 요즘 나한테 진짜 왜그럼?!! 너 혹시 내가 스승의날 선물 사고 남은 학급비 삥땅친거 때문에 이ㄹ....."
"그거 이미 내가 다 메꿔놨어, 난 쩨쩨하게 그깟 푼돈 가지고 뭐라 안해. 그리고 뽀릴거면 좀 제대로 뽀리던가 천칠백원이 뭐냐? 병신아."
"....내맘이거든?!! 만원짜리밖에 없었는데 그럼 어떡하라고!!!!!!!"
오세훈 나가 뒈져라 씹새끼야!!!!!!!! 교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빽 지르고 김종인은 앞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와우, 박력남. 저런 모습에 누님들이 홀랑 빠졌다 이거지? 참고로 최근 새로 받은 누나는 무려 서른여섯이었다. 자기 입으로 유명 대기업의 막내며느리라고 떠벌렸다고 했는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굳이 김종인이나 내가 불지 않아도 조만간 인생 조지게 생겼다.
그런 김종인의 뒷모습이 사라지기 직전까지 복도 밖을 내다보던 오세훈은 곧장 나한테로 쪼르르 달려왔다.
"봤냐? 봤어?"
"뭐, 너 쌍욕먹은거? 오세훈 조만간 불사조 되겠다."
"그거 말고! 아 씨, 졸라 귀여워.... 욕할 때 그 입술이 너무 귀여워....존니 깨물어주고 싶어."
...쟤 가만보면 어디가 좀 모자란 거 같다.
딱 그 짝이다, 좋아하는 여자애 괴롭혀서 일부러 울리는 찌질이 초딩꼬꼬마. ㅁ...물론 여자애 치고는 좀 많이 우람하고 거칠긴 하지만. 오세훈은 최근 줄기차게 김종인을 괴롭히고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괴롭히는 쪽은 주로 김종인이었는데 말이다, 이젠 전세가 역전된 거 같다. 오세훈이건 김종인이건 왜 난 정상적인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걸까. 신은 공평하다더니 순 개구라였어. 재력과 부모 복도 안 주셨는데 친구 복이라도 좀 주시지 그러셨어요. 이래서야 나중에 커서 사업 말아먹어도 보증 서줄 친구 하나 없잖아요.
"제발 좀 닥쳐, 나 너때문에 김종인 노이로제 걸릴 거 같단 말이야....길가다가 김종인 얼굴만 봐도 흠칫흠칫 놀라."
"잘됐네, 안 쳐다보면 되겠다. 김종인 얼굴 닳아."
지난번 나한테 김종인을 좋아한다고 털어놓은 이후로 이젠 아주 대놓고 오타쿠짓이다. 진저리나게 싫다. 닥치라고 소리를 지르며 의자에 걸어놓은 체육복 바지를 오세훈의 주둥이에 쑤셔넣은 후 재빨리 교실에서 빠져나왔다. 근데 나오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체육복 김종인 꺼였던 거 같다. 제발 바지 옆면에 안 어울리게 상큼한 여중딩 글씨로 씌여진 종인이꺼♡를 오세훈이 발견하고 집에 가져가서 딸치는 일은 없길 바란다.
그렇게 무작정 교실을 나왔는데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 까먹었다. 그런데 누가 뒤에서 내 두눈을 손으로 척 하고 가리는 거다. 그리고 귓가를 파고드는 깜찍한 한마디.
"누구게?"
"...크리스, 나이먹고 그럴래요?"
"이게 오냐오냐 해줬더니 기어오른다? 빨리 리액션 해."
"...."
"알았어, 미안. 근데 백현 여기서 뭐해?"
"도망왔어요."
또 하나 말 안한 게 있다면 크리스가 우리학교로 전학왔다는 것. 전학인지 강전인지 내 알 바 아니지만. 그래, 얘기 들어보니까 원래 집은 강남 어디쯤인 거 같은데 당연히 이쪽으로 전학왔어야 하는 게 맞긴 맞다. 근데 아무리 봐도 수만고보다 넓은 집에서 살아왔을 거 같은 크리스한테 이 학교는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가난에 너무 찌들어살다 보니까 편견만 늘었나? 예상대로 남색 마이에 곤색 바지 칙칙하고 좆구린 교복이 꼭 유명 교복사 모델처럼 졸라 잘 어울렸다. 저 키에 저 비율이 뭘 입든 백화점 마네킹일 거 알지만 너님은 좀 너무하셨어요.
"아, 정말? 나도 도망왔는데. 애새끼가 빠르긴 존나 빨라."
"...."
"...아, 청소 한번 튀었어. 한번도 안 해봤다고 말해도 구라치지 말라잖아, 사실인걸 어떡해? 야, 진짜 궁금한게 있는데 이 학교는 왜 청소를 학생들한테 시켜?"
"그럼 누구한테 시켜요....?"
전문 청소부를 쓸 돈 있는 학교였으면.....내가 이 학교 다니고 있지도 않았다. 고럼고럼. 생각할수록 어이없는 크리스의 대사에 내가 고개를 젓고는 저 수업 있으니까 그만 갈게요, 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뜨려고 했다.
"아 맞다, 백현 오늘 시간있어?"
"아껴쓰라고요?"
"아니 그거 말고, 나랑 놀자. 나 전학와서 친구가 없어."
"아까 청소시켰다는 그 친구한테 맛있는거 사줘요, 그럼 1년동안 크리스 청소까지 자기가 다 할걸."
"그런거 필요없어, 난 너랑 놀고싶은데...."
이 양반이 또 왜 땡깡이야, 진짜 안어울리게. 나 알바하느라 바쁜거 알아 몰라. 인상 살짝 찌푸려주자 그걸 또 기가막히게 알아챘는지 내 손목을 꼬옥 붙잡고 비장한 기세로 말한다.
"알바해? 시급 내가 줄게. 주유소?"
"또, 또 시작이다! 한번은 넘어가도 두번은 안 넘어갑니다, 돈 안 아까워요? 무슨 생돈을 그렇게 물 쓰듯이 써."
"백현...자꾸 튕겨도 매력없어."
물론 이렇게 말해봤자 크리스같은 무개념한테 소용없는 거 안다. 돈 문제는 둘째치고 내가 봤을 때 자기가 하고 싶은건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는 타입 같거든.
"괜찮아."
"글쎄, 오늘은 안된다니ㄲ....."
"...변백, 여기서 뭐하냐?"
교무실로 내려가는 길인지 반 애들 절반이 안 냈을 게 뻔한 핸드폰 가방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담임의 도비 찬열이가 나를 불렀다. 찬녈아 잘왔어, 저새끼가 나 존니 괴롭히잖아. 니가 좀 때려주지 않으련? 크리스는 박찬열보다도 키가 쬐끔 더 컸다. 지금까지 살면서 찬열이보다 큰 사람을 본 적 없는 나라 그런지 둘을 나란히 붙혀놓은 투샷이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들더라.
"아하, 친구?"
"...."
"백현, 니 친군데 왜이렇게 키가 크냐?"
"아픈데 찌르지 마요."
찬열이가 무표정으로 크리스와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너무나 태연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니 지금 삥뜯기는중?"
"...미쳤냐."
"삥은 내가 뜯겼지, 이만원."
"아, 그건...! 시급이라면서요!!!"
"생각해보니까 팁으로 4천4백원은 너무 많은 거 같아서. 백현, 다시 뱉고 싶지 않으면 오늘 나랑 놀자."
"싫어요, 알바가야 된다니까."
찬열이가 우리 둘의 대화를 대충 듣고 있다가 핸드폰 가방을 성의없이 툭 하고 바닥에 내려놓고는 지갑에서 천원짜리 다섯장을 뽑아들고 크리스의 손에 턱 하니 올려놓았다. 크리스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찬열인 멋지게 지껄인다.
"나머지는 팁."
그리고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 제발 찬열아.....
"끝나고 기다려, 집 같이 가게."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크리스를 깔끔하게 무시한 채 찬열이는 이제 들기도 귀찮은지 핸드폰 가방을 질질 끌며 교무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난 뭔가....찬열이의 빙신같으면서도 멋있는 그 행동에 그저 입만 떡 벌려야 했다.
*
"쓸데없는 짓 했어, 너. 돈도 많은 사람한테."
"너 못봤냐? 그자식 표정. 존나 동네 한량같이 생겼어. 대체 그런 놈은 어디서 만났음?"
말하자면 길단다, 도비야. 종례 마치자마자 우리반으로 달려와 보란듯이 나를 끌고와놓고 아직도 뭔가 짜증나는지 뚱한 표정의 찬열이 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근데 얜 왜이렇게 과민반응이야, 오늘따라.
"너 그사람 왜이렇게 싫어해? 너한테 나쁜 짓 한 것도 아닌데...."
"그냥 생긴게 걸리적거리게 생겼어."
"야 박찬, 너 설마....."
내 말에 녀석이 휙 나를 돌아보는데, 우와 순간 남신인줄. 어떻게 저렇게 생겼지? 친구의 얼굴에 감탄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졌구나, 넌.
"너만큼 잘생긴 사람 처음 봐서 그럼? 막 니자리 뺏길까봐? 그런 거?"
"...말을 말자."
"에이, 그러지마. 그래도 나 아직까지 너만큼 잘생긴 놈은 못본듯."
애기 어루듯 쓰다듬어주던 등을 팡팡 내리쳤더니 아파하면서도 아까보다 눈에띄게 표정이 풀어졌다. 역시 다루기 쉬운 새끼. 금방 기분 좋아진 찬열이한테 맑게 웃으면서 나 떡볶이 사줘, 라고 말했다가 맞았다. 나 사주느라 엄마한테 빚도 졌단다. 미안해 친구야, 유달리 경제관념에서 엄격하신 그분을 떠올리고 찬열이한테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주유소 끝나면 몇시?"
"열한 시. 넌?"
"열시 반 쯤?"
"아 또 손에 기름때 끼게 생겼네, 내 손 원래 존나 여자손이었는데. 이거 봐봐 진짜 못생겼지?"
점점 비정상적으로 변해가는 손을 찬열이 얼굴 앞으로 불쑥 내밀었더니 찬열인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내 손을 슬쩍 잡고는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태연하게 입을 연다.
"내가 데리러 갈게."
"됐네요, 너 알바 끝나면 피곤해서 눈 감고 걷는거 내가 알거든."
"밤에 혼자가기 무서워서."
뻥치시네, 박찬열이 엄마빼고 무서운 게 어딨어. 만약 내가 여자였더라면 이건 완벽한 연인의 모습일 테다. 서로에게 말을 꺼내기도 소름끼치게 민망한 이 상황이 나랑 찬열이한테는 너무도 익숙했다는 거다. 김종인이랑은 절대 이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찬수만 봐도 그랬다. 둘다 똑같이 생겼는데 이상하게 어릴 적부터 박찬수보다 박찬열과 훨씬 더 붙어다녔다. 아마 막내로 자라 포악하고 태생부터 양애취근성이 가득했던 꼴통 박찬수보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럽고 유순했던(지금은 전혀 아니지만)박찬열이 내게 더 잘해줬기 때문이리라.
"안녕하세요, 사장님!"
"백현이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오늘은 좀 일찍 마쳤어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
어제는 사모님이랑 안 싸우셨나보다. 조울증 수준으로 감정기복이 심한 사장님께 인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밖으로 나왔는데, 사장님이 날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그러신다. 전에 왔던 그 사람 다시 안 오냐? 안 올거예요, 아마. 딱 잘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내가 잘릴까봐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대답했다. 하여튼 저 돈벌레, 몰래 혀를 끌끌 차며 일을 시작했다. 퇴근 시간대라 그런지 차들이 많이 밀렸지만 알바생은 작고 가냘픈 나 하나. 아, 미친다. 하지만 내게 선택권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닥치고 노동의 길을 택했다.
주유소 알바를 하면서 제일 좋은 점은 지나가는 차들을 많이 구경할 수 있다는 거다. 어차피 제 것도 아닌 차, 봐서 뭐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겐 좀 다른 의미였다. 언젠가 나도 돈벌면 저런 차를 사서 타고 다닐거야, 그리고 주유소에 들러 나처럼 연약하고 힘없는 알바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지. 시급 줄테니까 길 안내 좀 해줄ㄹ....아 이건 다른사람 건데.
"어? 백현! 우연히 여기서 마주치네? 하하하."
....저인간도 양반은 못 되나보다.
자랑스러운 수만고 교복을 입고 헬멧을 쓴 크리스가 페이스 쉴드를 척 하고 열더니 상큼하게 웃어보였다. 우연은 개뿔이, 저 어색한 리액션. 빨리 저 왕따에게 친구를 만들어줘야만 했다. 하여튼 저게 문제야, 얼굴이랑 안 어울리게 노는 거. 얼른 주유만 하고 가요, 크리스를 본다면 사장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 불보듯 뻔했다.
"뭘 그리 섭섭하게 말해! 난 학교에서 백현 볼때까지 어떻게 참나 고민 많이 했는데."
"봤으니까 이제 고민은 해결된 거 같네요, 기름 얼마나 넣어요?"
"어, 가득. 계산은 이걸로 하고."
지갑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카드를 한 장 꺼내 내 손바닥에 올려놓는 크리스. 그래 시발 너 돈많아서 좋겠다, 니미럴. 궁시렁거리며 주유를 하고 카드를 긁었다. 아주 세게. 마그네틱이 박살나도록.
"근데 백현, 알바 얼마나 남았어?"
"밤 새도 안 끝날 것 같은데요."
"헐, 미성년자를 그딴식으로 부려먹는단 말이니? 노동부에 신고해서 여기 영업정지 당하고 실업자 되기 싫으면 빨리 불어."
"췌...열한 시에 마쳐요."
그으래? 주유가 끝난 바이크에 여전히 걸터앉은 채 잠시 생각에 잠긴 크리스를 빤히 쳐다봤다. 가만보면 참 신기하단 말이야, 누가봐도 어디 서양 조각상처럼 생긴 얼굴에 붙은 입술에서 능숙한 한국말이 줄줄 튀어나오는 게.
"그럼 기다릴게."
"지금 여덟시도 안됐는데요?"
"...아니다, 방법이 있어."
방법이 있긴 뭐가 있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크리스는 존나 새끈한 신형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딱 두 번 가자마자 상대편에서 전화를 받았고, 크리스는 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 여기 사거리 건너편 주유소거든? 빨리 와."
"...."
"이유 처 묻지 말고 재깍 튀어와, 씹새야."
.....뭐하는 인간이야, 저건.........
크리스가 전화를 끊고 나를 돌아보자 나도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크리스는 그저 밝게 웃었다. 그가 짓는 미소의 공통점은 절대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걱정하지 마 백현, 오늘도 별일 없을 거야."
"아니,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대체 나한테 왜이래요? 예전 학교 친구라도 부르시던가."
"걔넨 다 작업 나갔....아, 이게 아니지. 나도 칙칙한 고3 말고 산뜻한 후배랑 좀 놀아보려고 그러는데 불만있어?"
"...전혀 고3처럼 안 보이거든요.....?"
하다못해 박찬수도 학원 가 있는 시간에 염병, 뭐하는 짓이야. 골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리고 끝나면 누가 데리러 오기로 했단 말이에요."
"누구? 아하, 아까 그 웃긴놈?"
...역시, 크리스 눈엔 그딴식으로 비춰졌다 이거지. 크리스는 나를 딱하게 쳐다보더니 친히 내 머리를 쓰담쓰담해줬다. 아끼는 동생에게 하는 게 아니라 왠지 키우는 개를 다루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넘어가자.
"좀 고생 안 하는 일을 하든가, 이게 뭐냐? 고딩이."
"카페, 맥도날드, 편의점 다 해봤어요. 이게 그나마 제일 시급이 세서."
"...5200원이? 꿈을 크게 가져야지 공주야."
"누구보고 공주래...꿈이 아니라 현실인걸 어떡해요?"
걱정마, 꿈이라도 크게 꾸게 해줄게. 크리스의 대사가 뭔 뜻인지 몰라 멍청하게 서있는데 존나 고급 외제차가 미끄러지듯 우리 앞에 멈춰섰고, 크리스의 표정이 단박에 밝아졌다. 드디어 왔다, 오긴 뭐가 와 이사람아. 그러나 외제차의 운전석 문이 부드럽고 우아하게 열리고 그곳에서 내린 사람을 보자마자 내 의문은 깔끔하게 풀렸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왜 이렇게 늦었어? 대가리 줘 터지고 싶니 도끼야?"
"죄송합니다!!!!!!!!"
너무나 따뜻하고 자상한 미소를 내보이며 차에서 내린 검은 정장에 키가 2미터는 될 법한 깍두기 형님에게 존니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크리스는,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까이 하면 안 되는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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