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이 아파?"
"좀 아프긴 한데, 죽을 정도는 아니고."
"어디 어디 맞았어."
"어...허리랑, 얼굴 몇 번 맞고...아, 다리 좀 밟혔다. 어깨는 오늘 별로 안 심함."
"...자랑이다 이새끼야!!!!!! 그러게 내가 몇 번 말했어!!! 얼마든지 아작낼 수 있으면서 굳이 그렇게 피해자 코스프레 해야겠냐?!!!"
"나 돈없쪄....."
"...말을 말자."
지금 좀 낯간지럽지만,
난 찬열이한테 업혀 있다. 걸을 수 있다는 내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부득불 나를 들처업은 채 찬열이는 집으로 향하고 있다. 병원은 합의금 나오면 가자는 내 말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눈물나게 고마우니까 별다른 반항은 하지 않았다. 근데 찬열아, 너 아까 존니 멋있었어. 백마탄 왕자님인줄.
"정 켕기면 우리 엄마아빠 보호자로 대. 니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맞고 다니고 지랄이야."
"됐거든, 병신아. 자전거나 끌고오지 쪽팔리게 이게 뭐임?"
"던져버리기 전에 닥쳐."
"...네."
티는 안 내지만 난 지금 찬열이가 무지 화나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덜 깝쳤건만, 아무래도 그보다 조금 덜 깝쳤어야 했나보다. 근데 나 정말 이렇게 업혀있을 만큼 아픈 거 아닌데. 찬열인 내가 맞고 들어올 때마다 늘 이렇게 과민반응이었다. 알잖아, 나 통뼈인거. 무슨 18개월 애새끼 다루듯이 해.
"망할 놈의 개새끼들.... 얘가 때릴 데가 어딨다고, 시비도 지들이 먼저 걸었으면서."
"...."
"호로새끼들, 천벌 받을거야 아주."
찬열이는 계속 중얼거리며 무겁지도 않은지 조금 속도를 높혀서 걸었다. 찬열인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는데도 언제나 체육 수행 만점이었다. 못 하는 게 없었다. 축구, 농구, 야구, 피구, 공 가지고 하는 건 뭐든지 잘했고 100m를 12초대에 뛰었으며 수영까지 잘했다.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으니 뭔들 못할까 싶지만, 얜 심지어 팔씨름도 중학교때 전교에서 제일 잘했다. 난 항상 얠 보며 사기캐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사람이 헐렁한 매력까지(좀 지나치게) 가지고 있으니 봐주기로 했다.
"아까 너 진심 멋있더라."
"뭐가."
"그 개새끼들한테 존니 무섭게 말할때. 3일 안에 청구서 보낼 테니까, 그거나 기다리고 있어. 캬~ 니가가라 하와이 이후로 최고의 명대사."
"...철없는 새끼, 지금 니 몸이 아작났는데 그런 말이 나옴?"
"뭐 어때, 안 죽었잖아. 아작은 무슨...오버야."
물론 나도 그 호로들이 자지가 어쩌고 할 때는 순간 빡돌아서 몸을 날리긴 했지만 말이다, 솔직히 미성년자가 사회생활 하다보면 그런 말은 심심치 않게 듣더라. 특히 나처럼 얼굴에 나 만만해요-라고 써있는 놈은 더더욱. 나도 내가 강철멘탈인 줄 알았는데 솔직히 사람이 쉽게 그럴 수는 없더라. 태평양마냥 넓은 등에 얼굴을 묻는데, 찬열이가 그런다.
"나 니가 맞고 들어오는 거 싫어."
"...."
"진짜 맞고 올만큼 찌질하면 또 몰라, 평소엔 지보다 머리통 하나 큰 나한테까지 개기면서 저번에 부잣집 중딩한테 처맞고 돈 뜯어냈을 때는 나 정말 당황했다 백현아."
...그래, 그건 지금 내가 생각해봐도 좀 에바였어. 내 수많은 흑역사들 중 단연 랭킹 10위권을 달리고 있으니까. 근데 후회는 없는 게 그 돈으로 니 생일선물 사줬거든. 평소 찬열이한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해서 사줬던 후드집업을 받고 기뻐하던 찬열이 얼굴이 떠올라 나혼자 킬킬거렸다. 물론 저새낀 그걸 모르지.
계속 업혀있느라 목이 뻐근해서 태평양마냥 넓은 등판에 슬쩍 얼굴을 묻는데, 찬열이가 그런다.
"요즘 자꾸 불안해."
"...엉?"
"난 닳을까봐 아까워서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는 걸 너무 쉽게 망가뜨리는 개새끼들이 있어."
"...."
"또 그걸 맘대로 가져가려고 침흘리는 도둑놈도 봤어."
뭐라는 거야, 내가 알기로 박찬열은 특정 물건에 집착이 강한 성격은 아닌데. 중학교 때 지가 며칠동안 꼬박 밤 새서 만든 종이학 천 마리를 동네 꼬마한테 홀랑 줘버린 건 진짜 충격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냥 할 짓이 없어서 접었다고는 했지만, 난 찬열이의 쿨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개새끼, 근데 내가 그렇게 달라 그럴 때는 안 주더니...동네 꼬마가 나보다 더 소중했냐??!!!
"그것 참 안됐구나 찬열아."
"그래서 다 죽여버리고 싶은데."
"...살인은 나빠."
내가 짤막한 말 한 마디를 막 내뱉었을 즈음, 우리집과 찬열이네 집을 연결하고 있는 계단에 도착했다. 이 계단만 올라가면 우리집인데, 찬열이가 나를 내려주질 않는다. 설마 업고 계단 올라갈 생각이면 관둬, 너 허리 나간다니까? 찬열이가 아무 말도 없이 서있자 차마 내려달라는 말을 못하겠는거다.
"알아,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봤는데."
"...?"
"내가 먼저 가져버릴거야, 아무도 못 건들이게."
뭔 소리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찬열인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무릎을 살짝 숙여 나를 내려주었다. 그 먼 길을 업고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찬열인 지친 기색 하나 안 보였다. 슬몃 찬열이를 올려다보자 그 큰 눈으로 내 얼굴을 내려보는데, 그 눈이.....
눈빛이....평소랑 달랐다.
"가지고 싶은 게....뭔데?"
어쩌면 나는,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찬열인 언제나처럼 썩소를 짓고는 내 양 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몇 배는 잘생겼다. 김종인 오세훈보다도 큰 깊게 쌍커풀진 눈에 매달린 속눈썹이 아련함을 잔뜩 머금은 중2병 소년마냥 파르르 떨렸다. 매끈하게 잘 뻗은 콧대 밑에 자리잡은 입술은 완벽하기 그지없다. 정말이지 재수없게 잘생긴 놈이었다. 만약에 내가 여자였다면 사귀자고 바짓가랑이 붙잡은 채 매달렸을 지도 모른다. 그게 퍽 위화감이 느껴지질 않는 거다.
"내일 봐."
"...."
"...잘 자고."
어깨를 붙잡고 있던 커다랗지만 투박하지 않은 손이 내 뺨에 나있는 생채기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상하게 내내 쓰라리고 거슬렸던 상처가 그 순간만큼은 아프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찬열인 이미 저만치 멀어져있었다. 길게 뻗은 다리가 벌써 제 집 대문으로 사라져버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게 누구든, 생각조차 못했던 가슴께부터 간질간질거리는 징그럽고 생소한 감정. 나는....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
"뭐 줄까."
"타임이요."
"하나에 600원. 몇 개 살래?"
"왜이렇게 비싸요? 낱개로 팔면서."
"꼬우면 꺼지든가, 아가야 니 면상 가지고는 백날 가봤자 딴데서 못 사요."
"...에이 씨, 두 개요."
다신 오지마라, 싸가지없는 고객님아. 매점 뒤편 건물 구석 담벼락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흡사 만물상의 자세로 담배장사중인 나다. 1학년 나부랭이 주제에 소문듣고 쭐래쭐래 와가지고는 영 선배를 대하는 태도가 글러먹었다. 내가 영업중이라 참는다. 그러는 나도 어디가서 어른행세 가능한 얼굴은 아니다만 내 양옆에 박찬열과 김종인을 끼고 있으니 뭐가 두렵나 싶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이라는 내 말에 김종인은 금방 담배를 종류별로 몇 갑씩 사왔다. 새끼, 동작 빠르긴.
내 사업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손님의 연령대는 다양하니 이미 널리 퍼져있었다. 중딩도 아니고 소심하게 한개피 두개피씩 파는 게 먹힐까 싶었지만 의외로 나보다 소심한 놈들은 많더라. 친구따라 찔끔찔끔 몇 모금 피는 1학년부터 담배 사려고 옷 갈아입는 것조차 귀찮은 고3까지. 지가 추천해놓고 오세훈은 비난했지만 그래도 나를 찾는 손님들은 많다.
난 돈 많이 벌어서 펑펑 쓸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담배 한 번 입에 문 적 없지만, 이곳엔 언제나 매캐한 냄새가 진동한다. 오세훈한테 페브리즈나 빌려야겠다. 남녀공학이긴 해도 온몸이 겨드랑이로 이루어진 남자 반에서 굳이 깔끔을 떠는 오샌님이 처음으로 쓸만하다고 느껴졌다.
"변백현 존나 그지같애, 잘 어울려."
"너만할까."
"새끼...이거 멘솔 얼마?"
"급우 할인. 400원만 줘."
얼마나 줄였는지 주머니에 손이 들어가지도 않는 바지에서 동전을 꺼내 내 손에 올려놓고 김종대는 개시라도 하듯 멋지게 불을 붙히고 한 모금을 빨았따. 그런 종대를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봐주자 발암물질 공급하는 주제에 그런 표정 지을 자격 없단다. 개새끼, 김종대는 어떻게 하면 남을 개빡치게 할 수 있는지 아주 잘 아는 아이였다. 옆에 있어봤자 나만 손해다.
"나 다리에 멍든 거 봐."
"요즘 맞고다님?"
"아니거든 병신아?"
스타킹을 연상케 하는 곤색 바지가 잘 올라가지도 않는구만 그걸 굳이 걷어서 보여주겠다고 종아리까지 올리는데,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다리에 시커먼 멍이 들어있다. 와우, 언놈인지 몰라도 진짜 제대로다. 김종대야 워낙 여기저기 깝죽거리고 다니는 놈이라 누구한테 맞든 별로 이상할 건 없지만.
"이거 박찬열이 그런 거야."
"...엥?"
"축구하는데 패스 잘못해서 상대팀 줬다고 존나 축구공으로 맞음. 나중엔 옆에 있던 줄넘기로 때리는데 왜 하필 구슬줄넘기임? 채찍인줄."
내가 알기로 박찬열은 남 때리는 데 취미가 있는 놈은 아니였다. 변태도 아니고, 취미가 그쪽인 게 더 이상하지.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더군다나 누군가를 때릴 때 도구를 사용하는 편 또한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 패스 한번 잘못했다고 애새끼를 저지경으로 만들어놓을 놈은 아니라 이거다. 분명히 그 전에 저 미친 김종대가 뭔짓을 했겠지.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나 진짜 아무짓도 안했다."
"레알?"
"어, 우리 엄마 걸고."
"아빠도?"
"걸고, 임마."
...그래? 그럼 얘기가 좀 달라지는데. 갑자기 굉장히 흥미가 생겼다.
"야, 근데 박찬열 언제부터 그렇게 가오잡았음? 박찬수 말고 누구 때리는 꼴은 내가 못봤는데. 씨발 바퀴벌레 한 마리 혼자 못 잡아서 벌벌 떠는 새끼가."
중학교때 집에 바퀴벌레 나왔다고 울면서 전화했던 거 나 기억한다. 녹음도 해놨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내 폰에 그런 좋은 기능은 없었다.
"몰랐냐? 너한테만 좆밥인거."
김종대가 필터 부근까지 다 탄 담배에서 알뜰하게 연기를 빨아들이고 필터를 질겅질겅 씹는다. 금연교육 비디오에서 봤던 누런 치아와 다 썩어가는 페가 눈앞에 아른아른거렸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넌 황천길 vvip석이다 색꺄. 그나저나 쟤가 방금 뭐랬지.
"...왓?"
"와, 새끼 돌대가리네. 너 작년 축제때 기억 안 나냐? 3학년 여자선배한테 돈받고 무대 오른 거."
알지, 그걸 당사자인 내가 기억 못하면 누가 기억할까.
당시 나는 심각한 자금난에 휩싸여 있었다. 내가 보살은 절대 아닌지라 주체할 수 없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내 전단지 붙일 자리를 탐닉한 개.새.끼에게 화려한 뒤돌려차기를 선보였다가 아예 코뼈를 아작냈었지.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긴 개뿔 지금 내 뇌 속에 남아있는 장면은 차마 끔찍해서 말도 안 나오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치료비 청구서. 시발.....
한달치 생활비를 탈탈 털어넣고도 모자라 수능 때문에 반쯤 정신나가 욕정을 풀고자 나를 찾았던 전교에서 제일 부자인 3학년 여자선배와 손을 잡았다. 드로즈인지 바지인지 구분도 안 가는 검은색 핫팬츠에 뽕 두세 개는 우겨넣은 크롭티를 입고 가터벨트에 한 손에는 채찍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 채로 장기자랑 무대에 섰다. 허리까지 오는 갈색의 가발을 찰랑거리며 라니아의 Dr.feel good을 췄던 내게서 사나이 자존심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 근데 뭐."
"그때 맨 앞자리에서 니 다리 보고 헐떡였던 놈들 앞니 두세개씩 나갔었지, 아마? 그 중에 선배도 있었던 거 같은데."
............????!!!!!!!!!!!!!
"뭔 개소리야!!!!!!!"
"진짜야, 그때 박찬열 완전 미쳐 날뛰었던 거 너 몰랐음? 아 맞다 너 끝나고 바로 그 무대 찍은 사진 옆동네 학교에 파느라 바빴지. 지가 쩍벌춤 추는 사진 팔아넘기는 짝퉁 남자 라니아라니, 덕분에 학교 평판 많이 안 좋아졌다 백현아."
"...썅, 그때 내 장사 도와준다고 선생도 사갔거든? 필요없어. 그리고 말했잖아 박찬열은 그런 놈 아니라고. 걔 중딩때 농장체험 가서 달팽이가 불쌍하다고 상추 못 심은 새끼야....."
"와, 이거 존나 못 믿네? 그래 뭐 박찬열이 무슨 수만동 사대천왕 중에 익룡천왕 이런 건 아니다만 니가 생각하는 코찔찔이 동네바보는 아니라고."
"...말도안돼."
"고구마 답답이새끼."
형아 이만 간다, 배웅좀. 응 꺼져. 시커먼 멍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5교시 수업 째려고 보건실로 향하는 김종대를 멍청하게 쳐다봤다. 난 박찬열을 18년동안 봐왔으면서 대체 왜 몰랐지? 우리가 무슨 고딩 들어와서 처음 만난 사이도 아니고 나름 제일 가까운 사이라고 자부해왔던 찬열이의 다른 모습을 지인에게 들어버린 나는 그야말로 멘탈붕괴, 혼돈 그 자체였다.
그래, 그럼 그렇다고 쳐. 근데...몰래 훔쳐본 것도 아니고 많이 보고 많이 싸라 뭐 이렇게 전시해놓은 친구 다리 쳐다봤다고 강냉이 뽑는 건 또 뭐야. 니가 무슨 팝콘기계냐, 지랄맞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문득 얼마전 박찬열이 나한테 보였던 그 표정이 떠올랐다.
슬픔을 잔뜩 머금은 사춘기 소년의 징그러운 그것. 그 눈빛, 보는 사람마저 저절로 동화될 것 같은 미칠듯한 아련함. 어, 또 이런다. 갑자기 막 심장이 간질간질거리고 얼굴도 새빨개졌다. 나쁜 짓 하다 들킨 것 같은 쪽팔림. 썅, 방금까지 학교에서 담배장사 하던 놈이 뭔 추태야. 귀까지 화끈화끈거리는 바람에 허겁지겁 담배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건물 안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진짜, 진짜로 세상에서 제일 쪽팔려서 아무한테도 말 못할 것 같다.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신민아 의리미친게 본인 결혼식을 홍보중인 루이비통 쥬얼리 끼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