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트/현성] 자존심 : 3
W. jh23
나는 그대로 푹 쓰러졌던 것 같다. 얼굴에 무엇이 왔다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김성규의 품에 안겨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안겨,있었다고? 적어도 내 기억이 맞다면, 김성규는 나를 안아주었다. 김성규의 품에 안기자마자 -혹은 안긴 느낌을 받자마자- 무엇인가 몽롱해지며 나른해지는 것이 내가 내 몸을 제어할 수 없어서 눈을 감았고, 항상 술에 취해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던 나에게 그것은 큰 위안이 되었다.
***
눈을 뜨니 김성규는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저녁 때를 가리키고 있었고, 아까와의 따뜻함이 없음에 몸서리치며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려도 김성규는 없었다. 순간적인 불안감에 거칠게 방문을 열고 나오니, 다행스럽게도 혹은 놀랍게도 김성규는 부엌에서 분주히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제 기능을 하는 식탁엔 된장찌개가 놓여있었다. 또 터져오르는 기억.
「ㅡ김성규 너 나한테 시집 오면 안돼?
지랄하네. 내가 왜 시집을 가. 니가 와.
ㅡ너 진짜 된장찌개 너무 잘 끓여. 이거 비밀인데, 우리 엄마가 끓여준 것보다 맛있어.
무슨. 엄마가 끓여준게 제일 맛있는거지.
ㅡ암튼, 너 된장찌개는 이제 된짱찌개야. 네이밍 센스 죽이지?
된짱찌개가 뭐냐? 딱 남우현 수준이다.
ㅡ아 몰라 몰라. 너 된장찌개만 맨날 맨날 먹고 싶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매일 기름기 낀 음식을 먹었던 내 위장이 구수한 냄새에 요동치는 것 같았다. 김성규는 내 인기척을 들었음이 분명함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또 무슨 반찬거리를 하는지 도마 위에 바쁘게 움직이는 손. 예쁘다ㅡ 멀리서 봐도 가녀린 흰 손이 춤을 추고 있었다. 나를 위해 누군가가 음식을 해준다는 것, 작지만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나는 그래서, 무작정 김성규를 안아버렸다. 싱크대에 딱 붙은 김성규의 몸이 뒤에 피어오르는 나의 숨결에 잠식당하길 빌면서. 예상대로 뒤에서 안아오는 내 덕에 김성규는 숨을 쉬지 않았다. 파를 썰던 손도 멈췄다. 나는 이 순간, 지금 이 소소한 순간이 너무 그리웠던 것일까. 여자를 옆에 두고도 이런 행복을 누리고 싶었던 욕망이 있던 것일까. 그러나 내치지 않는 김성규는, 또 나에게 희망을 갖게하잖아. 김성규의 배에 내 팔을 둘렀다. 남자 허리가 이렇게 얇다니, 또 가슴이 아파온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팔을 풀진 않았다. 한참 후에야 김성규가 몸을 비틀었다. 죽어도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다. 김성규의 행동에 서운하면서도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라 나는 머쓱하게 팔을 빼냈다. 몸이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파를 다시 썰고, 소세지를 굽고, 계란말이를 한다. 식탁엔 된장찌개와 계란말이, 그리고 밥그릇은 하나.
"밥그릇이 왜 하나야?"
"……"
"내가 밥 떠올테니까 너 여기 앉……"
"생각 없어."
김성규는 고개를 저었다. 나만 부엌에 남긴 채, 김성규는 거실 소파에 앉아 다시 TV를 보았다. 그 와중에도 말라비틀어진 빵을 챙기는 것을 잊진 않았다. 내가 오피스텔에 들어오지 않는 와중에 김성규가 밥을 챙겨먹지 않은 것은 안 봐도 비디오. 김성규에게 무엇이라도 먹여야만 했다. 내가 소파로 다가가 TV를 끄고 빵을 빼앗고, 식탁을 눈짓으로 가리키자 시선을 피한다. 밥 먹자. 나 싫어도 너 밥은 먹어야하잖아ㅡ 내 말에 대답이 없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재촉하자 그제서야 느릿하게 움직이는 모양. 김성규를 식탁에 앉히고 밥그릇에 밥을 떠와 그 앞에 내밀자 고개를 다시 젓는다.
"너 살 엄청 빠진건 알아? 밥 좀 먹고 그래."
"……생각 없다니까."
"생각 없어도 먹어. 너 그러다 죽겠다."
"……이러다 죽으면, 너한텐 좋은거 아냐?"
심장 쿵.
나는 억지로 들었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김성규는 이미 밥그릇을 밀어놓은지 오래였다. 굳이 내 앞에서 빵을 뜯는 저 손. 그리고 이런 위험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입술. 예전엔 못먹어서 안달이던 된장찌개가 서서히 식어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음식을 삼킬 수가 없었다. 김성규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눈물이 다시 차오를 것 같다. 아니, 이미 차오르는 중이었다. 괜히 천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꾹 삼키고 김성규 앞에 밥그릇을 다시 밀어놓았다. 좀, 먹어ㅡ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길이 없었다. 김성규는 빵을 참새마냥 뜯어먹고 있었다. 차마 빵을 빼앗지 못한 것은, 그것이라도 없으면 김성규가 정말 죽어버릴까봐. 그래서였다. 겨우 진정된 얼굴을 숨기고 나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자꾸 목이 막혀오는 이유는, 아마,
김성규.
오랜만의 제대로 된 식사. 그러나 좋지 못한 분위기. 본인이 힘든 와중에도, 애인이 미운 와중에도 애인을 위해 굳이 밥을 차려놓은 그 정성이 갸륵하고 고맙고, 사랑스럽지만 그 감정을 표출하지 않은 내가 참 밉기도 했다. 김성규는 결국 먼저 자리를 떴다. 나와 마주보고 있는 것이 그렇게 불편했을까. 불편하겠지……싶다가도 김성규가 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꾸역꾸역 밥을 밀어넣었다. 김성규에 대한 예의의 일종이었다. 내 식습관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김성규에 대한 예의. 간이며 온도까지 모두 알맞게 해놓은 김성규에게 다시 울컥함이 밀려와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었다. 최대한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개수대에 담고 급하게 설거지를 마친 후 양치질을 하고, 그리고, 또 떠오르는 기억들. 세면대 앞에 나란히 서 김성규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양치질을 하면 무겁다며 내치던 그 손, 가끔의 이벤트라며 양치질 도중 뽀뽀를 하고 튀어나가던 그 얼굴. 모두, 아련하고……나는. 지금 혼자였다. 답답함이 밀려와 예정에도 없던 세수를 벌컥 했다. 다 젖은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와 눈물이 섞여 나오는 이유는 혼자라는 외로움 때문에. 단지 이틀 뿐인 외로움이라, 6개월 동안 외로웠을 김성규 앞에 자신있게 나서지 못한 나의 비참함. 나는 황급히 침실로 뛰어들어갔다. 김성규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뒤돌아 누워있었다. 시침은 외로움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
"……"
"김성규, 자?"
"……아, 미안……내가 소파에서 잘게."
정말 자고 있던 것인지, 김성규는 눈을 비비며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예전처럼 누워있는 내가 불편한걸까. 아까만해도 아프다던 머리는 괜찮은걸까. 김성규는 주섬주섬 담요를 챙겼다. 나는 이대로 김성규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손은 잡지 않더라도, 어떤 대화는 없더라도 그저 김성규와 같은 침대에서 밤을 보내고 싶었다. 이 큰 침대를 도저히 혼자 쓸 자신이 없었다. 김성규, 가지마ㅡ 내 말에 잠깐의 멈칫하는 기색도 없이 굳이 방을 빠져나가는 김성규. 나는 헛웃음과 함께 또 다시 패배감을 맛보아야 했다. 나도 이불을 박차고 나가 소파에 웅크리고 누운 김성규를 보았다. 그리고 무슨 생각인지 모르게, 김성규를 번쩍 안아들고 침실로 들어와버렸다. 졸지에 다시 침대에 눕게 된 김성규가 의아한 얼굴로, 그러나 조금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김성규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빨리 자. 너 머리 아프다고 했었잖아."
"……"
"불 끄고 올게."
"……너……"
소등하려던 내 발걸음을 멈춘 김성규의 한 마디. 너……, 그 뒤에 나올 말이 무서워 나는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방이 완전히 어둠에 잠기고 나서 나는 이불 안으로 들어와 김성규를 보았다. 김성규는 나에게 뒷통수만 보이고 있었지만. 끝맺음 없는 김성규의 말은 차라리 안듣는 것이 나을 거란 생각에 나도 구태여 질문하진 않았다. 완전한 정적, 어둠이다. 우리 연애에 절대 없을 줄 알았던 정적과 어둠. 하지만 모두 내가 자초한 일.
"……나한테 왜 이렇게……"
"……"
"잘해줘?"
끓어오르는 물음이었다. 김성규의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물음. 그리고, 이 어색함 동안 김성규가 나에게 건 첫 대화. 나는 일부러 듣지 못한 척 했다. 뒤척이기만 할 뿐 어떤 대답도 없는 내게 김성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잠들지 못했다. 옆에서 죽은 듯 미동 없는 김성규를 한참 보면서 잠을 청하지 못했다. 그저 눈만 감고 있었는데, 김성규도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나보다. 감긴 눈 위로 무엇인가 미동하는 것이 느껴져 실눈을 떠보니, 담요를 챙기고 다시 소파로 나갈 준비를 하는 김성규. 내가 깨지않도록 최대한 소리를 죽이는 김성규. 끝까지……
나를 배려하는 김성규.
"……가지마."
"……"
"그냥 내 옆에 있어."
나는 눈을 감고 대답했다. 사각거리는 발걸음이 우뚝,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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