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트/현성] 자존심
W. jh23
04.
사각거리는 발걸음이 우뚝 멈추고 나서도, 한동안은 정적이었다. 똑딱거리는 시계의 초침소리만 가득한 정적. 김성규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아예 눈을 뜨고 김성규를 보았다. 어둠에 가리워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깜깜함에 슬슬 적응한 눈은 실루엣 정돈 구별을 가능케 했다. 김성규의 인영이 내게 등 돌린 채 서있는 것을 보고 괜히 헛기침을 했다. 김성규의 눈치라면 내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 정도는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김성규는 끝까지 내게 오지 않았다. 내 옆에 있으라는 말을 듣고도, 나의 헛기침 소리를 듣고도 끝내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버렸다. 담요만 덮고 자면 추울텐데. 여름이어도 밤엔 꽤 쌀쌀한 날씨였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침대에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의 반복인지 모르겠다. 김성규의 웅크림을 참지 못하고 다시 침대로 데려오려 한 것이. 예상대로 김성규는 소파에 웅크리고 담요를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생긴 것답지 않게 꼬물거렸던 그 손. 그리고 그 손장난은 여전했다. 발끝을 가리지 못하는 담요는 제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나는 거실의 불을 켰다. 어두웠다가 갑자기 밝아진 탓인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김성규. 김성규는 나를 의아하단 듯이 쳐다보았다. 들어가서 자, 나랑 있는거 불편하면 내가 여기서 잘게ㅡ 내 말에 김성규는 고개만 저었다. 아무튼 저 고집불통인 것 여전했다. 고집불통이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상체를 일으키고 무릎을 껴안은 채로 고개를 숙인 김성규와,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나. 저 안쓰러운 자태. 허리에 손을 짚고 한숨을 쉬자 그제서야 내 얼굴을 바라본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새벽으로 잠드는 이 시간에 한 번이라도 김성규의 얼굴을 보고싶어서. 그러나 저렇게 슬픈 얼굴은……힘들잖아.
"너가 침대에서 안자면 나도 안 잘래."
"……"
" 그냥 밤 새지 뭐."
완전히 오기였다. 언제부터 그렇게 본인의 잠자리에 신경 썼었냐고 따질 법도 하지만 김성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자꾸만 나에게 미안하다는 저 입술. 미안할 사람은 오로지 나였는데. 냉수를 들이키던 나에게 미안하다는 그 말이 가시가 되었다. 기도로 넘어간 물 때문에 텁텁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잔기침을 할 수 없었다. 저 때문에 괜히 내 잠을 설칠까봐 걱정하던 김성규는 그제서야 다시 담요를 챙겨들고 침실로 향했다.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김성규, 그리고 그 향. 여자에게 풍겼던 싸구려 향수와는 비교도 안 될, 그런 아늑한 향이었다. 나는 컵을 던지듯이 내려놓고 김성규의 뒤를 쫓았다. 최대한 침대 구석에 붙어 누워있는 김성규는 여전히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거실과는 반대로 깜깜한 방에 아련히 누워있는 모습이 서글펐다. 나는, 웃기게도 지금 김성규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어차피 한 번 진솔한 이야기는 했어야 했으니까. 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던 김성규와, 그러고도 내게 미안하다던 김성규. 어떤 것이 진짜 모습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지금이 아니면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딱 그뿐이었다. 나는 침실 불을 켜고 김성규 옆에 다가가 앉았다. 빛이 들어오는게 싫었는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는 아이 같은 모양.
"김성규. 자?"
"……"
"대답만 해줘."
"……자려고."
"나랑 지금 대화 좀 할래?'
"……"
"그냥. 내가 다 미안하니까……네 속마음도 듣고 싶고 그래."
대답이 없었다. 대화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내가 미운걸까. 당연히 밉겠지만서도……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나에겐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대답 없던 김성규가 몸을 벌떡 일으킨 것은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도 단념하고 잠자리에 드려는데, 이불을 걷어버린 김성규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 것이었다. 조금 놀랐지만 담담한 척, 그러나 김성규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두려웠다. 혹시 헤어짐을 고하려는 것일까.
"……자꾸 나한테 기대감 심어주지마."
"그게 무슨 말이야."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고서, 결국엔……여자 다시 만날거잖아."
내가 이렇게 하고도 자신을 버릴까봐, 또 설레게 해놓고 여자를 만날까봐, 김성규는 그것이 두려웠나보다. 나에게 설레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나로선 기분 좋은 말이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김성규는 스스로 벽을 치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벽 그 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빗장까지 채워 나를 막아서고 있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당연함이지만, 그 와중에도 나를 좋아하고 있는 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랬나보다. 나는 김성규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여자……안 만날거야ㅡ 신뢰하지 못하겠지. 내 말에 김성규는 고개를 숙였다. 김성규ㅡ 내 목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못하다가……어,
"울어?"
"……"
"야, 김성규. 나 봐봐."
김성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한순간이었다. 화장실로 달려가는 뒷모습을 잡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던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너무 늦었을 때. 화장실 문을 잠가도 엉엉 우는 소리가 내 귓가에 도착했다. 김성규가 우는 것은 실로 오랜만, 아니, 처음이었다. 자존심 세고 고집 세고, 제 멋대로 되지 않으면 퍽퍽 때리기도 했던 김성규였다. 그래서, 김성규는 눈물도 흘리지 않을 줄 알았던 나의 오만을 비웃기라도 하듯. 펑펑 울고 있었다. 화장실 열쇠조차 어디있는지 모르는 나는 여기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김성규가 나오길, 그저 그러길 바랄 뿐이었다. 세면대에 물이 쏟아지는 소리도 들렸지만 그 소리론 김성규의 아픔과 외로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이사이 끅끅대는 저 애처로운 울음이 내 심장을 후벼파서, 나도 눈물이 나올 뻔했다.
"성규야, 문 열어봐."
"……"
"응? 얼굴 보고 얘기하자. 나 너 울리려고 대화하자는거 아니였어."
"……"
"얼른 나와. 일단 나와. 나 꼴보기 싫으면 집 나가 있을게. 응?"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지껄인 소리하고는 참 수준 떨어진다. 김성규가 화장실 안에서 유리라도 깨 나쁜 짓을 할까봐 덜컥 겁이 나서, 나는 입에서 나오는 그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나는 나쁜 놈이었다. 그렇게 상처 받은 애인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그런 개새끼였다. 아무리 두드려도 나오지 않는 김성규. 그래도 얼굴이라도 보려고 나는 식탁 의자를 끌어다놓고 그 위에 앉아서 하염없이 화장실만 쳐다보고 있었다. 세면대에서 더 이상 물소리가 나지 않았다. 김성규의 울음소리도 서서히 그쳐가고 있었다. 슬슬 나오겠지, 싶어 의자를 다시 갖다놓고 김성규를 안아줄 준비를 했다. 그냥, 너무 안고싶었다. 김성규를 설레게 하는 나의 품 안에서 울기를. 그냥……다 미안해서.
정확히 십 분 뒤에 나온 김성규의 눈은 탱탱 부어있었다. 벌개진 얼굴과 아직도 히끅거리는 목소리는 내 옆을 지나 곧장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쫓아, 뒤에서 와락 김성규를 안아버렸다. 다행히도 어떤 반항도 없었다. 나는 김성규 등에 내 얼굴을 묻었다. 성규야……. 김성규가 좋아하던 내 목소리. 이게 힐링시켜줄 수 있다면. 성규야……. 김성규……. 나는 주문처럼 이름을 읊어댔다. 김성규의 어깨는 여전히 들썩이고 있었다. 대답이 없지만, 그 들썩거림이 오히려 내게 따뜻함을 주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김성규가 아직 살아있다고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아서, 그래서 좋았다.
"미안해. 진짜. 여자 안 만나."
"……"
"나 정말 후회 많이 하고 생각도 많이 했어. 내가 너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도 알았고, 내가 미친 놈이야. 나쁜 놈이고."
"……"
"다시 시작하자. 응? 우리 맨 처음에 설렜던 것처럼……너는 나한테 화도 내고, 삐지기도 하고, 고집도 부리고 다 해. 내가 다 받아주고 싶어."
"……"
"대답해줘. 응?"
대답 대신, 김성규는 내게서 빠져나갔다. 내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지만 그 사이로 스쳐보인 얼굴이 너무 슬퍼보여서,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란히 누워 등을 돌렸다.
밤은 길었다.
너도 그 동안 이런 밤을 보냈던거니.
***
동이 트는 것을 보다가, 잠깐 졸았는데, 어느 새 정오가 되어있었다. 옆자리는 말끔했다. 나는 그 부재에 정신이 반짝 들어 거실로 나가보았다. 김성규는 제 일상처럼 담요를 덮고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김성규는 지금 무슨 생각 중일까.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옆에 앉았다. 김성규가 엉덩이를 살짝 들어 피했다. 그 공간으로 내가 다시 파고들자, 조금 더 옆으로 가며 끝내 나를 밀어내는 저 태도. 그만큼 내가 불편하구나……. 쓰라려도 어쩔 수 없는 일. 간단한 샤워를 할 요량으로 걸려있던 수건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게 따끔한 시선이 따라붙는다. 그 시선에 등을 돌리자 따라오는 첫 마디.
"……내가 어제 대답 안해줘서……"
"?"
"여자 만나러 가는거야……?"
김성규는 자꾸만, 내 심장을 쿵하게 한다.
밀어내면서도 멀어지면 불안해하는 저……
김성규는 이미 무릎에 얼굴을 묻은 상태였다.
늦어서 뎨동함다; 분량도 똥이네요ㅠㅠㅠ 그래도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고 ,신알신 해주시는 모든 독자분들 감사해요!더보기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