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k Cliche 03
넓디 넓은 운동장에 환영 인사를 시작하는 교장 선생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원래 미국의 졸업식에서는 졸업장을 한 명 한 명에게 나누어 주는 게 일반적인지라 그것을 모두 기다리는 것은 곤욕이 따로 없었다.
스탠드에는 약 400명 가량의 학부모들이 착석했다. 재학생으로만 이루어진 교내 밴드가 졸업 축하를 위한 짧은 공연을 하고, 차석 졸업생이 미국 국가를 불렀다.
그리고 나서 수석 졸업생이 학생들을 대표해서 고별 연설을 했다. 판에 박힌 내용들 뿐이었다. 따분하고, 지루한.
“All our dreams can come true if we have the courage to pursue them. So, have the courage.”
우리의 모든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들을 밀고 나갈 용기만 있다면. 그러니, 용기를 가지세요ㅡ
졸업생 대표의 연설이 끝나고 합창부의 노래가 이어졌다. 그것을 끝으로 졸업생들은 쓰고 있던 검정 학사모를 높이 던졌다.
드디어, 끝이다.
스탠드에 있던 부모님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내려와서 장미꽃을 건네주기 시작했다.
준면의 부모님도 빨간 장미꽃 한 다발을 건네주며 그의 양 볼에 가벼운 버드키스를 해주었다. 졸업 축하한다.
대충 꽃다발을 받아들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뒤 준면이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보러온다고 했었는데.
“어, 저 잠시만 세훈이좀 보고 올게요!”
운동장 구석의 큰 버드나무 아래에 기대어 이쪽을 보고 있던 세훈을 발견한 준면이 꽃다발을 엄마에게 건네주곤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후에 있을 졸업식 파티 때문에 블랙 수트로 한껏 멋을 부린 준면이 어색한지 세훈이 이리저리 옷을 만져보더니 신기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오, 형 좀 멋있는데요? 하고 개구진 웃음으로 준면의 머리를 스윽 쓰다듬는 세훈의 왼손에는 꽃다발과 사진첩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그거 뭐야?”
“아, 졸업 선물인데. 볼래요?”
사진첩을 건네 받은 준면이 의아한 표정으로 흰색의 깔끔한 하드 커버를 넘겼다.
약 백 장 정도 되는 사진첩에는 세훈과 준면이 찍은 사진이 가득이었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길 때마다 눈가에 무언가 핑 돌았다.
사진들에는 약 3년 동안의 때묻지 않은 추억의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세훈을 처음 만난 건 미국에 유학을 오고 난 뒤 이 고등학교에서였다. 아마 그때 자신은 11학년, 세훈은 10학년이었을 것이다.
학년별이 아닌 수준별로 진행되는 수업인지라 우연히 그와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고, 한국인이 반가웠던지 세훈은 자신을 살갑게 대해주었다.
낯가림이 유독 심해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준면은 세훈의 덕에 자연스레 학교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친한 선후배 사이로서 1년, 정말 오래된 친구같은 사이로 2년. 그리고 첫사랑이자, 가슴 아린 짝사랑의 상대로 3년.
미국에서의 생활 3년은 온통 세훈과 함께였다. 몸도, 마음도.
뜨거운 여름을 세 번 추운 겨울을 세 번 세훈과 함께하는 동안 그 비밀스런 감정은 점점 자신의 온 신경회로를 엄습해왔다.
그리고 두 번째 여름을 맞이하던 바닷가에서, 칵테일에 조금 취해있던 세훈은 자신에게 키스를 했었다.
그 내리쬐는 햇빛만큼이나 강렬하고 뜨거운 키스를.
“……아.”
그리고 그의 입에선ㅡ 언젠가 준면에게 들려줬었던 좋아하는 한국인 여자 아이의 이름이 나왔다. 그것도 아주 애타게. 애달프고, 달큰하게.
화가 나는 것보다도 정신이 혼미해질만큼의 두근거림에 준면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멍청하게도 그 감정을, 그 순간을 가만히 느끼고만 있었다.
저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었으면 좋겠다고. 난생 처음으로 자신이 남자인 게 원망스럽다고 생각하는 순간, 깨달았다.
이미 제 감정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졌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말 많이. 세훈을 좋아하고 있다고.
동생이 아닌 남자로써, 우정이 아닌 사랑으로써.
쓰라린 눈물과 함께, 너무나 큰 상처와 그것을 동반하는 설레임과 함께. 그렇게 준면은 그 감정을 오롯이 혼자서 품고선 그날 밤 잠든 세훈의 볼에 몰래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유난히도 뜨거웠던 그 해 여름은 갔고, 세훈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끙끙 열병을 앓듯이 그를 앓았던 준면은 차라리 그가 저를 알아줬으면, 눈치 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더 쉽게 정리하고 이곳을 떠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끝끝내 세훈은 알아채지 못하고, 준면은 제 감정의 단 한 부분도 그에게 드러내지 못했다. 자신은 나약했고, 겁이 났다.
제 감정을 눈치 채고 자신을 피할 세훈이. 차가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볼 그 눈동자가.
“형? 다 봤어요?”
볼에 한 줄기 눈물이 느껴지는 것을 황급히 닦아내고 겨우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세훈아, 하고 밝게 웃었다.
그에 세훈이 천천히 준면을 품에 안았다. 자꾸만 눈치 없이 새어 나오려는 눈물에 입술을 꽉 깨물어야했다. 여태껏 잘 참아왔고, 잘 숨겨왔다.
아까 교장 선생님께 졸업장을 받으며 같이 받았던 꽃 한 송이를 세훈에게 건네주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마음을 전해주라고 받은 꽃이었다.
“뭐에요 이거?”
“그냥, 고마운 사람한테 주래.”
“오오ㅡ 내가 고마운 사람이에요?”
아니, 소중한 사람. 가장 소중한 사람. 좋아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 너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라고 세훈이 말하는 순간 이번엔 제가 먼저 세훈의 허리를 껴안았다. 마지막이니까, 이제 끝이니까.
제 감정을 덮기 위해 구차한 변명을 속으로 읊으며 세훈이 주는 다정한 손길을 받고만 있었다.
한국 가서도 꼬박꼬박 연락해요. 가끔 놀러오구요, 잠은 우리집에서 자면 되니까. 우리 그 정도 사이는 되잖아요.
그 친절한 말은 은근한 상처로 자신의 가슴에 깊숙히 파고 들었다. 그래, 우리는 그런 사이니까. 친한 친구니까.
그냥… 우린 그냥 그 정도니까.
“세훈아.”
혼잣말이라서 미안해.
“고마웠어.”
사실은 널 사랑해ㅡ
그렇게 가장 뜨거웠던 그 해의 여름은, 가장 뜨거웠던 자신의 소년기는. 푸르른 녹음과 함께, 이 비밀스러운 감정과 함께 끝이 나버렸다.
안녕, 내 뜨거운 여름.
안녕, 내 뜨거웠던 첫사랑아ㅡ
친구라는 이름, 어느새 미워진 이름. 감추던 감정은 지금도 아픈 비밀의 기억일 뿐.
우리 사인 정리할 수 없는 사진. 보면 가슴 아린 Story, I'm sorry. 여름아 이젠 Goodbye.
‘숨기고 있던 오랜 비밀들 차라리 들켰다면 너를 품에 안아줄텐데.’
안녕하세요! 먼저 마침 소재 때문에 고민하던 중 이렇게 좋은 노래 덕에 저에게 글을 쓸 수 있게 해주신 굿바이 썸머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꾸벅.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정말 많았는데 제 필력이 부족해서 이런 모자란 표현력으로 이 좋은 소재를...! 망쳤어요....! 어떻게 설정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미국의 고등학교 졸업식을 바탕으로 했는데요. 한국은 겨울과 봄 사이 즈음에 졸업식을 하는 반면에 미국은 여름이 졸업 시즌이거든요. 그리고 9월달 쯤에 대학교 입학을 하구요. 그래서 이 굿바이 썸머라는 제목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고 해서...^-^ 아무튼 전 오늘도 이렇게 부끄러운 조각글을 내놓고 갑니다. 아 저번에도 계속 말씀 드렸지만 핑크 클리셰는 절대 연재물이 아니라 에피소드입니다. 조각글! 제목만 하나로 통일하는 거구요. 그러니 이전 편을 봐도 전혀 이어지지 않습니다. 아 왜때문에 또 사담이 이렇게나 길어졌죠?ㅠㅠ 그리고 1편, 2편에 암호닉 신청해주신 알로에님, 매미님, 팥님, 둘리님, 당근님, 나비님, 휴지통님, 베이비슈님, 치즈마우스님, 캐케님, 빙수님, 초코푸딩님. 모두 정말 정말 정말 많이 감사합니다. 항상 댓글 남겨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에 행복한 마음으로 글 쓰는 것 같아요 하하하. 암호닉은 항상 받습니다. 전 쉬운 여자니 언제든지 신청해주시고, 말 걸어주세요. 독자 한분 한분 모두 기억하고 싶어서 암호닉 받는 거 좋아해요. 그럼 오늘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구요, 굿밤하세요! ^-^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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