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k Cliche 04
새카만 직사각형의 서류 가방을 한 손에 들고 터덜터덜 천천히 지하로 가는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갔다.
입구에 조명이라도 좀 달았으면 좋겠건만, 계단도 온통 까만색이라 이거 자칫하면 넘어질 위험성이 다분했다.
왼쪽 벽에는 커다랗게 가게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고, 오른쪽 벽면에는 빈티지하지만 어떻게 보면 괴상한 페인팅들이 그려져 있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그저께 바에서 만난 남자와 다소 격한 관계를 가진 이후로 몸이며 정신이며 남아나질 않았다.
관계 후에 몸에 남은 그 찝찝함이 소름 끼치도록 짜증이 났다. 항상 이런 식이다. 제가 먼저 사람이 필요해서 다가가지만 남는 건 씻쳐낼 수 없는 역겨움 뿐이다.
난 더러운 게 아니다.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다. 따뜻한 체온이, 진실된 눈빛이. 바라는 건 그게 다인데, 사람들은 저를 질타한다.
행복에 겨운 사람들은 저가 행복한 줄 모르고 자신의 인생을 한탄한다. 사랑에 배부른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자만하고 오만해진다.
역겨운 건 그런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자신이 아니다ㅡ
라고 믿고싶다. 라고 누군가 제게 말해주길 간절히 원했다.
“왔어요?”
준면이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뒤 의자에 앉았다. 살짝 습한 공기에 걸치고 있던 마이를 벗고 답답한 넥타이를 풀렀다.
마른 몸매가 무방비하게 그대로 드러나는 흰 와이셔츠에 세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쳐다보지.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에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는 어째 잔뜩 금단적이어서 누구든 한 번쯤 고개를 돌리게 될 상이었다.
두 번째 단추가 풀려 아슬아슬하게 드러난 그의 쇄골에 붉은 자욱이 남아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게 모기 따위에 물린 자국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잠깐만 이리 와봐요.”
가까이 오라는듯한 손짓에 준면이 살짝 상체를 숙였다. 세훈이 바 너머로 긴 팔을 뻗어 그의 두 번째 단추를 여며주었다.
뭐야, 하고 준면이 싱겁다는 듯이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양 팔의 소매를 살짝 걷은 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쓸 데 없이 후각이 예민한 탓에 온갖 독한 향수냄새들과 지독한 알코올 냄새들이 코를 찔렀다. 오늘따라 더 기분이 아래로 치달았다.
“뭐 줄까요?”
“아무거나.”
안색이 안 좋았다. 원래 잘 웃는 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뭔가 조금 더… 고독해보이고, 쓸쓸해보였다. 당장이라도 제 품에 안고 보듬어주고 싶을 만큼.
세훈이 찬장에서 투명한 글래스를 꺼내들어 커다란 조각의 얼음을 뭉텅이로 넣었다. 얼음이 글라스에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가 귀를 깨웠다.
중간 크기의 쉐이커를 꺼낸 다음 푸른 빛의 블루 퀴라소를 정량보다 적게 넣고 라임 주스와 사이다를 넣었다.
원래는 피치트리까지 넣어야 완성이지만 접때 과일 안주를 내어줬을 때 복숭아에는 입도 안 대던 것이 생각나 복숭아 향만 내주는 리큐르를 넣었다.
쉐이커를 흔들고 찬찬히 잔에 따르니 푸른빛 글라스에 반짝이는 얼음이 꽤나 보기에 좋았다.
“자요.”
“…뭐야?”
“블루 사파이어라는 거예요. 도수 안 높으니까 마셔봐요.”
준면이 코로 한 번 향을 맡더니 조심스레 입을 갖다대었다. 라임 주스와 사이다가 들어 있어서 달콤한 청량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술에 약하고 알콜 향을 싫어하는 저를 배려한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항상 제가 오면 아로마 향이 나는 향초를 하나 피우는 것도, 시끄러운 음악에 인상을 찌푸리기라도 하면 곧바로 잔잔한 재즈 음악을 틀어놓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배려를 해주는 이유는 도통 모르겠지만, 그게 결코 기분 나쁘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맛있죠? 하고 웃는 그의 이름을 아직 알지 못한다. 얼굴을 익힌지는 반 년 정도가 다 되어가지만 사실 제대로 된 대화는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여느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믿고싶은 것인지, 그게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거 그쪽한테 되게 잘 어울려요.“
세훈이 눈짓으로 준면이 들고 있는 글라스를 가리켰다.
원래 블루 사파이어란 칵테일은 잔에 가득 담긴 얼음들이 꼭 사파이어 보석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얼마나 깊은 지 가늠할 수 조차 없는 끝없는 심연을 닮아 있는 푸른 빛의 차가움과 포근한 느낌이 동시에 느껴지는 색깔이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투명한 글라스를 감돌아 눈 앞에서 햇살이 반짝이는 듯한 그런 느낌의 칵테일.
그것이 준면의 모습과 꼭 닮아있었다. 지독히 차갑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온화한 얼굴을 가진 그의 모습과, 그의 아늑한 깊이감과.
푸른색 글라스에 대비되는 그의 붉은 입술을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던 중 테이블에 앉아 준면을 힐끔거리던 남자가 그의 옆에 앉았다.
슬쩍 눈인사를 하고는 준면의 옆에 노골적으로 몸을 붙였다. 뻔한 수법이다.
반 년 동안 그런 모습을 지켜봤지만 항상 짜증이 났다. 답답하고, 미련했다. 제가 아닌 준면이.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고. 사람들이 주는 손길을 그게 약인지 독인지도 모르고 그저 가만히 받고만 있는 그가 짜증났다.
아무 감정도 없이 텅 빈 눈동자로 사람을 바라보고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그 순수한 눈동자가 더러운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진다는 것이 싫었다.
고작 이름과 나이밖에 모르는 주제에, 심지어 당사자는 제 이름조차 모르는데 이렇게 저 혼자 속앓이를 해야겠냐 묻는다면은 저는 해야겠다.
그에게 딱히 뭐라 할 명분이 없었던 지라 가만히 있었지만 오늘도 그 마른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자니 끔찍했다.
“가지마요.”
그래서 제법 무서운 표정을 짓는다고 하고선 의자에서 막 일어나려는 그를 불러 세웠지만, 그 목소리가 잔뜩 떨리는 건 저만의 착각일 것이다.
가지 말라구요. 반복해서 말하는 세훈에 준면과 그의 옆에 있던 남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검은 앞치마를 벗어 제끼고 세훈이 바에서 나왔다. 그의 어깨 위에 음흉하게 얹힌 남자의 손을 잡아 뺐다.
“…? 뭐야?”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직도 바보같이 뚱한 표정만 짓고있는 준면과 노골적으로 저를 째려보며 기분 나쁜 콧김을 내뱉는 남자에 세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막무가내로 세훈이 준면의 팔목을 잡고 나가니 아마 오늘밤 준면과의 잠자리를 기대했을 남자가 어이 없다는 식으로 비소를 지었다.
어이 없는 건 준면도 마찬가지였다. 계단을 올라 입구까지 달하자 세훈의 팔을 탁 쳐냈다.
“뭐야, 너?”
조금 화가 난 눈빛이었다. 그래, 저가 뭐라고 가겠다는 사람 붙잡고 여기까지 왔는지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 사실 뺨 맞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새 또 풀려버린 준면의 두 번째 단추를 본 세훈이 이번엔 첫 번째 단추까지 단정하게 잠궈주었다. 날씨가 조금 쌀쌀한 지라 제가 걸치고 있던 가디건도 벗어주었다.
준면은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다는듯 멀뚱히 세훈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정말로,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건지 자신은 잘 모르겠다.
왜 그렇게 다정한 손길로 저한테 옷을 걸쳐주고, 왜 그렇게 다정한 눈빛을 하고선 제 어깨에 양 손을 올리고 저와 눈을 맞춰오는지. 잘 모르겠단 말이다.
뭐라고 말이라도 꺼내면 좋겠건만, 그렇게 제 눈을 보고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있다가 어렵게 말을 꺼내는 듯 했다.
“저기, 앞으로는 아무 사람이랑 막 그러지 마요.”
“…왜?”
“어, 음. 그게…. 저도 왜 이런 말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분명 어이없게 생각할 거 아는데요.”
근데?
차가운 공기를 한껏 더 얼게 만드는 준면의 낮은 목소리와 텅 빈 눈빛에 세훈이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그의 눈을 끝까지 마주쳤다.
무슨 말부터 해야할 지 모르겠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전해주고 싶은 감정은 많은데.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사실 아직 제 감정과 생각들도 정리가 채 되지 않았는데 무작정 그를 끌고 나온 것에 조금 미련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부터 말해야 그가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말부터 해야 그가 놀라지 않을까.
“그쪽이 뭘 원하는지 저는 잘 몰라요.“
“…?”
“그쪽이 사람을 원하는 건지 아니면 사랑을 원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무슨 말이야.”
“그게 뭐가 됐든 나랑 해요.”
겨우겨우 힘겹게 한 글자씩 말을 꺼냈다. 그리고 나서 눈을 꽉 감았다. 준면의 어깨를 잡고 있는 두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말의 요지를 잘 모르겠다. 그래서 한참이나 그가 내뱉은 말을 곱씹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끝은 역시나…였다. 이번엔 조금 다를 줄 알았다.
저만의 착각이더라도 그는 남들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물음은 이번에도 역시나, 하는 허탈한 대답으로 끝났다.
“무슨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해.”
“…네?”
“너도 나랑 자고싶다는 거잖아. 길게 말할 것도 없네.”
하고 준면이 뒤를 돌아섰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분명 나름 멋있게 말했다고 생각했건만 돌아오는 반응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영 딴판이다. 자고 싶다니,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다.
꼭 안아주고 싶고, 손을 잡아주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다. 하지만 그를 상대로 저런 상스러운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단 말이다.
자신의 말이 그에게는 그렇게 들렸나보다. 사랑이라는 말이, 사람이라는 말이. 그에겐 결국 다 똑같은 것이었나보다.
세훈이 준면의 몸을 돌려세웠다. 그의 눈이 살짝 붉어 보였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스스로를 매일매일 고통 속에 집어넣어야 하는지. 왜 아무 의미도 없는 관계를 갖고 몸과 정신을 허비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알고 싶고, 그 상처를 천천히 보듬어주고 싶다. 그가 편히 쉴 수 있도록, 그 예쁜 얼굴만큼이나 예쁘게 웃을 수 있도록.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또한 잘 모르겠다. 이 감정이 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랑을 말한 게 아니에요.”
세훈이 준면의 하얀 손을 잡고 그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이런 사랑이요.”
지금 당장은 몰라도 상관 없다. 지금부터 천천히 알아가면 된다. 그에 대해서,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준면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무언의 눈물이 나오려는 순간 세훈이 그렇게도 품에 안고 싶었던 그를 천천히 안았다.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건 알고 있다. 그의 잔뜩 허물어진 마음을 보듬고, 높디 높은 성벽을 올라 온연한 그의 구역에 닿기 까지는.
하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릴 것이다. 그가 먼저 제게 다가오기까지 그 힘든 걸음을 행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다가갈 것이다.
“통성명부터 시작할까요?”
“…어?”
“오세훈이에요, 내 이름. 기억해요.”
진실된 사랑은, 용기 있는 자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
| 사담 :-) |
안녕하세요. 요 몇일 시골에 다녀와서 글이 좀 늦었네요ㅠㅠ 죄송합니다. 뭐 얼마나 썼다고 소재가 딸리고 머리가 딸려서 이번엔 뭘 쓰지 막 고민하다가 정말 갑자기 떠오른 소재라... 으아 제가 봐도 똥글망글이네요. 이런 글에도 길게 댓글 남겨주시고 예쁜 말들 해주시는 독자님들은 천사세요...? 너무 과분한 사랑인 것 같아서 얼떨떨해요ㅠㅠ 독자님들이 제 글에 대해서 얘기해주시는 게 좋고, 또 이런저런 사담 듣는 것도 좋아해서 댓글 보면은 항상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요. 가장 행복한 순간이랄까. 알로에님, 매미님, 팥님, 둘리님, 당근님, 나비님, 휴지통님, 베이비슈님, 치즈마우스님, 캐케님, 빙수님, 초코푸딩님,연두님, 바이디어님, 수호워더님, 뚜시뚜시님, 선풍기님, 칙촉님! 암호닉 분들 항상 감사드려요. 암호닉 신청은 언제든지 감사하게 받으니까 물어보지 말고 신청해주세요! 쉬운 여자랍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굿밤하세요! 아 참고로 또 말씀 드리지만 핑크 클리셰는 연재글이 아닌 에피소드 형식의 조각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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