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감은 눈을 절로 떠지게 하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빛에 눈을 부비며 삼십 분 정도를 더 뒤척이다 일어났다.
오후 1시, 넘어가지 않는 밥을 꾸역꾸역 먹는다. 엄마의 잔소리는 덤이다. 영어 학원이라도 좀 다녀라, 운전 면허라도 따라. 밥을 먹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오후 3시, 컴퓨터를 켠다. 딱히 할 일이 있어서 키는 건 아니고. 화젯거리나 인터넷 뉴스를 대충 눈으로 한 번 스윽 읽고 게임을 한다.
오후 6시, 문자가 왔다.「세훈아 안 와?」
한창 게임에 열중하고 있던 터라 문자를 무시하고 다시 화면을 들여다보려고 했지만,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 그만 헉,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급하게 컴퓨터를 강제 종료 시킨 뒤 후다닥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다. 바로 어제 새로 산 진청색의 와이셔츠를 걸치고 조금 헐렁한 블랙 스키니진을 입었다.
거울 앞에서 대충 머리를 한 번 만져준 뒤 컨버스를 꼬깃하게 구겨신고 밖을 나섰다. 한 시간이나 늦어 버렸다.
이 지루하고 따분한 여름방학에 한 우물 오아시스가 되어주는 이 황금 같은 시간을 한 시간이나 잃었단 말이다.
“어, 왔어?”
“하아, 네. 죄송해요.”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세훈이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헥헥거렸다.
낮기온 30도가 넘는 이 무더위에 멋좀 부려보겠다고 긴팔을 입고 뛰어 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근데 정작 제가 잘 보이고 싶어하는 당사자는 제 새로산 옷에는 관심도 없는 듯 뻐끔거리며 웃고만 있으니, 조금 밉기도 하다.
자신은 준면이 어떤 샴푸를 쓰는지, 어떤 브랜드의 옷을 좋아하는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어느 분위기를 좋아하는지. 하나도 모르는 게 없는데.
이게 바로 사랑의 빠진 자의 말로인 것인가.
“손님 많았어요?”
“아니, 없었어. 앉아서 좀 쉬어도 돼.”
헤실 거리며 웃는 그 하얀 웃음은 언제 봐도 반할 것 같다. 아니 사실 매 순간마다 반하는 게 맞다. 그 찰나의 순간마다 가슴 떨리는 것도 사실이고.
정말 신이 정성스레 빚어놓은 듯한 그 얼굴은 넋을 놓고 쳐다볼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조금 상투스러운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청색 도자기처럼 곱고 희게 반짝이는 피부에 적당히 높은 코. 빤히 쳐다보면 퐁당 빠질 것 같은 깊고 매력적인 눈.
그리고, 앵두같은 입술은 정말 딱 저 입술을 두고 하는 말이다. 분명 아무 것도 바르지 않는데 남자 입술이 어떻게 저렇게 붉고, 생기있는지.
이러니 내가 안 반해ㅡ 라는 어느 드라마의 다소 오글거리는 명대사가 절로 생각난다.
준면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동네의 작은 화원이었다. 준면은 선물용 꽃다발이나 꽃바구니를 포장하는 일을 했고, 자신은 손님을 받았다. 가끔 배달도 가고.
일하게 된 건 올해 3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다. 대학생이 되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아르바이트와 예쁜 여자친구 사귀기였는데, 전자를 이룬 다음 후자는 실패했다.
예쁜 여자는 무슨, 준면을 만나고 난 뒤로는 머리카락 긴 생물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안타깝게도 20살 청춘의 심장은 어여쁜 남자에게로 향했다.
아니 내가 게이라니!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게이, 동성애자, 이반. 이런 것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에 대한 생각은 해봤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다른 남자들에겐 눈곱만치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냥 그가 좋은 것이다. 그 자체가.
“세훈아, 땀 많이 난다.”
“네…?!”
바로 제 아래서 하얗고 고운 손이 손수건으로 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지만, 그건 히익, 하는 바보같은 소리를 낸 것으로 그쳤다.
군데군데 정성스럽게도 닦아주는 그 작은 손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니, 거짓말이다. 실은 그 손 뒤로 싱글거리는 입술이 더….
가끔 꽃다발을 포장하는 일에 집중해서 입술을 비죽거릴 땐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고, 높은 찬장에 있는 포장지를 꺼내려고 발 뒷꿈치를 들땐 뒤에서 끌어안고 싶다.
제가 어리다고 꼬마애 대하는 마냥 놀릴 땐 김준면, 하고 낮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고 세훈아, 하고 부르는 그 입술에는ㅡ 입을 맞추고 싶다.
20대 팔팔한 청춘이니 만큼 달달한 연애도 해보고 싶고, 절절한 사랑도 해보고 싶다. 그저 한낱 짝사랑으로 이 시기를 보내기는 아깝지 않은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짝사랑 상대인 준면은 26살이 되도록 제대로 된 여자친구 하나를 사귀지 못했단다. 눈이 높은 건지, 워낙에 조심스러운 건지.
그래서인지 더 쉽게 다가갈 수 없고, 섣불리 고백할 수 없었다. 고고한 성벽에 둘러싸인 채 자신만의 공간에 사는 것 같아서.
“세훈아, 이것 좀 잘라주라.”
“네? 아, 네.”
준면이 길게 늘어진 리본끈을 한 손에 잡고 가위를 세훈에게 내밀었다. 나 지금 왼손에 접착제가 붙어서, 여기 좀 잘라줘.
여기요? 아니, 거기 말고. 여기? 아니 좀 더 아래. 그럼 여기?
“아니이, 여기.”
보다 못한 준면이 제 왼손으로 세훈이 가위를 잡고 있는 손에 제 손을 포개어 대신 가위질을 해주었다. 됐다ㅡ 하고 말갛게 웃는 얼굴은 그저 해사하기만 하다.
마주보며 웃어줘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사람 심장이 이렇게 뛸 수가 있나? 나 죽는 거 아냐? 바보같은 생각을 하는 얼굴이 땡볕 아래 있을 때보다 더 붉게 달아올랐다.
준면의 손이 닿았던 부분이 뜨거웠다. 뭐에 데인 것처럼. 그 야릇한 체온이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진정하자. 진정해, 오세훈.
준면은 가끔 그랬다. 저는 그저 소중하기만 하고 닿으면 깨질까해서 만지지도 못하는 손을 덥석덥석 잡고.
저를 버릇없다고 여기진 않을까해서 한 번도 쓰다듬은 적 없던 머리인데 준면은 수시로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뒷꿈치를 조금 들고서.
그럴 때마다 세훈은 정말 딱 죽을 맛이었다. 싫은 게 아니다. 단지 지극히 설레는 제 마음을 숨기기에 급급해서, 행여나 제 붉은 얼굴을 보고서 눈치라도 챌까봐.
“벌써 열 시네.”
매번 이런 식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눈 앞에 두고 마냥 조심스러워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걸어보고, 꽃을 포장하는 옆모습만 멍하니 내다보다 보면 집에 갈 시간이다.
세훈아 고개 좀 숙여봐. 준면이 손짓을 했다. 그에 세훈이 살짝 머리를 숙이니 찬찬히 제 머리를 쓰담았다. 조심히 들어가. 겨우 진정시킨 가슴이 또 말썽이다.
머뭇머뭇 가게를 나설까 말까 하다가 제 바지 주머니에 있는 공연 티켓 두 장이 생각났다. 매번 오늘은 줘야지, 내일은 줘야지 하다가 한 달째 그대로인 티켓이다.
그래도 오늘은 새옷도 입었고, 머리도 했고. 몸에서 좋은 향도 나는 것 같고. 그리고 형도… 예쁘니까.
“저기, 형.”
등 뒤로 티켓 두 장을 숨긴 채 준면의 앞에 성큼성큼 다가갔다. 뭐라고 하지? 대뜸 같이 연극 보자고 하면 당황할 텐데. 그것도 남자 둘이. 어떡하지.
아무 말도 않고 입술만 떼었다 붙였다 하는 세훈에 준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 이번주 토요일에 시간 있어요…?”
멋있게 내뱉는다고 뱉은 말이 고작 이거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내민 티켓 두 장이 그렇게 초라해보일 수가 없었다. 아, 그냥 말하지 말 걸.
뻔하디 뻔한 대학로의 로맨스 연극이었다. 세훈이 건넨 티켓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준면이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애를 어떻게 할까. 진짜로, 귀엽다. 너무.
“세훈아.”
“네…?”
“고개 좀 들어봐.”
그에 죄진 사람 마냥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겨우 들었다. 눈에 보이는 준면의 얼굴은 예상 밖으로 웃음이 그득했다.
“이거 형이랑 보려고 산 거야?”
“…네.”
“흠, 근데 어쩌지. 나 이번주 주말엔 시간 없는데.”
아쉽다는 듯이 입을 비죽이는 준면에 세훈이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방금 전까지 설렘으로 들떴던 기분이 저 아래까지 추락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용기를 내어 내민 첫 데이트 신청은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했다. 정말 준면이 바빠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제가 부담스러운 건지는 모르겠다.
이걸 어쩌지. 김종인이랑 가서 봐야하나. 이제 쓸모 없어진 티켓의 용도에 대해서 고민하던 찰나 준면이 세훈아, 하고 나긋한 음성으로 저를 불렀다.
“대신 형이랑 다른 거 할까?”
“…네?”
어벙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니 준면이 또 가지런한 이를 다 드러내고 눈을 잔뜩 접으며 웃었다. 이 형이 오늘따라 왜이렇게 웃어, 사람 설레게.
뜻을 알 수 없는 미소에 세훈이 눈만 멀뚱멀뚱하게 뜨고 있으니 곧이어 준면이 세훈의 어깨에 양 손을 척, 하고 올렸다. 그것도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아, 눈은 감는 게 좋을 걸?”
그 말을 끝으로 세훈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차마 감지 못한 눈은 살짝 까치발을 든 채 가만히 제 입술에 입술을 맞대고 있는 준면의 속눈썹으로 향한다.
이게, 뭐지? 지금. 이게 뭐지…?
분명 제 입술에 닿은 건 그토록 닿고 싶었던 준면의 입술이다. 앵두같이 붉고, 예쁜 그 입술 말이다.
쪽, 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그 말캉한 촉감이 제게서 떨어졌다.
팔을 세게 꼬집으니 아픈 게 그대로 느껴지는 걸 보면 꿈은 아니다. 그렇다고 생시도 아니다. 준면이 제게 입을 맞출 리가 없지 않은가.
대체 왜? 하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손만 닿아도 하루종일 심장이 떨릴 판에, 입술이 닿았으니. 지금 쓰러지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이다.
“얼굴 빨개. 귀여워, 세훈이.”
“…예?”
준면이 그 토끼같은 눈을 또 곱게 접고선 저를 올려다본다
마냥 곰같은 사람인 줄 알았건만, 사실은 저보다도 더 여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순해보이던 눈꼬리가 가만히 보니 조금 약아 보이기도 한다.
곰이면 어떻고 여우면 또 어떤가. 그렇게 바래왔던 짝사랑의 상대가 제게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거면 됐다.
코끝으로 꽃내음인지 준면의 샴푸 냄새인지 모를 향이 스멀스멀 기어 들어왔고, 세훈은 고개를 숙여 다시 한 번 준면의 입술을 천천히 머금었다.
어둑해진 하늘에는 회색빛 안갯 자락이 자욱하게 깔려있고, 선홍빛 선율 한 자락이 기분 좋게 가슴을 울렸다.
Dream, We're floating on the clouds.
꿈, 우리는 구름 위를 떠다니지.
Dream, You're smiling face is bright.
꿈, 네 웃는 얼굴이 빛나.
Dream, Dream. We're happy anyway.
꿈, 꿈. 우리는 그저 행복해.
| 사담 :-) |
죄송해요 많이 늦었죠ㅠㅠ 아는 분이 상을 당하셔서 부모님과 며칠 내려갔다가 왔어요. 그래서 아직도 기분이 싱숭생숭하고 멍하답니다. 이 기분대로 글을 썼다가는 정말 극도로 우울한 글이 나올 것만 같아 달달한 영화도 보고 밝은 음악도 듣고 하니까 좀 나아지더라구요ㅠㅠ 그래서 지금 나오는 이 노래 덕에 이 글을 썼습니다. 멜로디는 좋지만 알고 보면 가사는 참 슬프다는... 요즘 날씨 너무 덥지 않아요? 진짜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도 모자랄 판이에요.. 선풍기만으로는 이 무더위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ㅠㅠ 이 찜통에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것에 새삼 안도하며... 벌써 개학하신 분들 많으려나. 폭염때문에 개학 늦춘 학교들도 많더라구요. 정말 두서 없는 글이네요.... 글도 그렇고 사담도....★ 오늘도 역시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하며. 암호닉 신청은 항상 감사하게 받아요! 좋은 독자님들을 많이 얻은 것 같아서 기뻐요. 더욱 더 열심히 글 쓰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계세요! 다음에 봐요 :-) 알로에님, 매미님, 팥님, 둘리님, 당근님, 나비님, 휴지통님, 베이비슈님, 치즈마우스님, 캐케님, 빙수님, 초코푸딩님, 연두님, 바이디어님, 수호워더님, 뚜시뚜시님, 선풍기님, 칙촉님, 샤시니님, 사과님 그 외 댓글 남겨주시는 모든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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