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과 다시 마주하는 상상을 수 없이 해왔다. 그가 미치도록 증오스러울 때는 하루에 열 댓 번도 넘게 울분을 삭였다.
남보다 못한 사이
"안녕, 윤이."
증오보다 공포가 더 컸던 걸까. 막상 면전 앞에선 사지가 굳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시선만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는 내게 미끄러지듯이 걸어왔다. 이 다음엔. 이 다음엔 늘 하던 상상처럼 내가 그를 목 졸라 죽일까? 둔탁한 무기로 머리통을 내려칠까? 내 애인을 죽인 살인자.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떨어뜨린 살인자. 그러나 나는 무기력했다.
"아......."
멍청한 신음만이 나올 뿐이었다. 김종인은 다시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으며 내쪽으로 걸었다. 내 바로 앞에 멈춰 선 그는 내 정수리에 손바닥을 얹었다. 나는 고개를 조금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김종인은 여전히 입을 샐룩였다.
"많이 컸네."
못 보던 사이에. 중얼거린 김종인이 내 볼을 꼬집었다. 으으, 나는 이상한 목소리를 내면서 김종인의 손을 팩 쳐냈다. 김종인은 맞은 손이 아픈지 다른 쪽 손으로 그 손을 감싸더니 다시 두 손 모두 내렸다.
"나는 이런 성장을 기대한 게 아닌데."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김종인은 그 손을 점점 밑으로 내리더니 가슴 부근까지 아주 천천히 미끄러졌다. 뱀 같은 손은 그치지 않고 계속... 계속해서 내려왔다. 나는 하지 말라고 크게 성을 내며 손을 다시 쳐냈다.
"많이 컸다더니.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야?"
하.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귀에 꽂았던 머리칼이 흘러나왔다. 없는 앞머리를 위로 쓸어올리며 말했다.
"뻔뻔하다, 종인아."
그러자 김종인은 제 검지로 저를 가리키면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디가?
"미안하지도 않아?"
"뭐가?"
김종인은 천장을 보며 무언가 골똘이 생각하는 듯 싶더니 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박수를 쳤다.
"..뭐, 설마 니 애인?
생각보다 괜찮은 애 만나는 거 같아서 안심은 했었는데.
걔가 왜? 내가 걔한테 왜 미안해?
아, 아님 걔가 나한테 뭐 미안하대?
착하네. 그래도.
근데 아직도 잘 만나고 있지?"
김종인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를 이해시켜주기에 나는 생각보다 더 감정이 북받쳐 오를까 봐 꾹 참고 한숨만 내뱉었다. 이에 김종인이 지금 왜, 뭔데 그러는 거냐면서 살짝 짜증을 내었다.
"아, 너 이번 영화 남자 주인공 이름이 무슨 형준이더라? 그 사람 이름이지?
듣기론 남자 주인공 이름 안 고쳐주면 안 하겠다고 했다던대.
윤이치고 너무 프로패셔널하지 않은 거 아니야?
근데 그래놓고 인터뷰엔 상대 배우랑 전 남자친구가 닮아?
글쎄. 난 잘 모르겠더라? 그 김종대 씨랑 무슨 형준."
"김종인!!"
"어. 듣고 있어. 말해."
"니가 나랑 약혼 한다고. 그 말만 안 했어도 걔 안 죽었어."
"무슨 소리야. 우리 약혼이랑 그 사람 죽, 뭐? 죽었다고?"
죽었어. 자살했어. 그 사람의 배려를 넌 쉽게 포기하고 떠났잖아. 네가 죽인 거야. 넌 살인자고.
"죽었다고? 왜?"
"자살했어. 우리 파혼한 거 듣고. 너 독일 간 그 날에."
"........."
"미안해? 이제?"
"...아니."
"뭐?"
"내가 왜 미안해?"
"......"
"내가 죽인 건가? 내가 뭐라도 했나."
"말해 봐."
"...."
"윤이. 말해 봐."
내가 죽였어 정말?
*
김종인은 그렇게 나를 휩쓸고 갔다. 공허한 마음에 쇼파에 가만 앉아 멍을 때렸다. 휴대폰이 울렸고, 발신자는 세훈이었다. 오세훈은 많이 다운된 내 목소리에 이것저것 걱정을 하더니 기어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안 괜찮지."
얼굴을 들이밀더니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괜찮지가 아니라 안 괜찮지. 오세훈은 하마터면 김종인이 이곳에 다녀간 것 또한 알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 사실 나보다 더 소식을 이르게 접했을 것이다. 김종인이 입국했다는 것과 나를 만났다는 것. 오늘 입국하는 건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럭저럭 잘 지내던 내가 이렇게 혼 빠진 모습을 보인다는 건 후자도 알아달란 소리나 마찬가지다.
"말해."
"뭘."
"김종인이야?"
너 이렇게 만든 사람. 또, 김종인이야?
아니야. 김종인, 아니야.
"그럼 왜 그러는 건데, 왜. 도대체, 왜 갑자기 또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걱정되게 진짜."
"그냥 생각 나서 그래."
"그러니까 너 그 작품 하지 말라고 했잖아. 왜 떠난 사람 붙잡고 회상하고 있어 일하면서."
"추억하는 거야, 내 딴엔."
"세훈아, 우리. 아니 나, 오늘 위로 좀 해줘."
"뭐?"
"너 이렇게 만든 사람, 또 김종인이야?"
"아니야. 김종인, 아니야."
"내가 혼내줘?"
그의 말에 웃음이 터졌고 장난 치지 말라면서 가슴팍을 때렸다.
"진짜 혼낼 거야, 임형준? 김종인 혼낼 수 있어?"
"혼내달라면. 난 잃을 게 없으니 더 용감해."
"네가 뭘 잃을 게 없냐. 잘못 되면 나도 망가지는데 그래도 괜찮아?"
"그런 부분이었냐? 너도 망가지는 그런 부분이었어?"
"......세훈아."
자는 듯 들려오는 건 새근새근한 숨소리였다. 나는 팔뚝까지 내려간 속옷을 끌어올렸다. 혹시나 감기들까 이불을 세훈이 턱 밑까지 올려줬다.
이제 정말 자보겠다고 그렇게 꼭 눈을 감았지만 정신은 온전해 이만 숙면을 포기하고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마냥 자는 줄 알았던 오세훈이 내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말아뜨고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니 오세훈은 나를 더 세게 끌어안고 품안에서 놔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한동안 그렇게 있다보니 또 다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눈 감은 오세훈 얼굴 앞에 손을 흔들며 자는지 확인을 하고 미동이 없자 날 껴안은 손을 조금 밀어냈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블라우스를 속옷 위에 걸쳐 입고는 베란다로 향했다.
차라리 담배를 필 줄 알았다면 이 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어릴 적, 내게 무심한 표정으로 담배를 권했던 김종인을 회상했다. 그때 김종인은 남색 교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고동색의 교복 조끼만을 걸쳤고, 담배를 피워대는 김종인 옆에서 기침을 삼키며 추위에 견뎠다.
김종인이 나를 쿡 찔렀다. 나는 이를 덜덜거리며 그를 쳐다봤고 김종인은 어느 사이 벗은 제 재킷을 내 품에 던졌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 씩 웃었고 김종인은 다시 앞을 바라봤다. 김종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
"웬일이야. 오랜 만이네, 이런 곳에서 보고."
"여긴 시끄럽잖아."
"왜, 뭐 스트레스라도 받았어?"
언더락 잔에 양주를 따르던 김민석이 곧 잔에 얼음을 떨어뜨리며 물었다. 나는 다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김민석은 흐음, 하며 길게 음을 빼더니 잔을 쥐러 가는 내 손보다 더 빠르게 내 잔을 빼앗아갔다.
"김종인. 왔다며."
"너도 아네."
"모를리가."
"그렇지."
"기분은 어때."
"굳이 들어야겠어?"
"재밌잖아. 파혼 그리고 그 후. 머잖아 내 미래가 될 수도 있으니까?"
".........."
"하― 그래서 약속은 피곤한 거야. 무엇이 됐든."
"너 답다."
그렇지? 하며 빙그레 웃은 김민석이 손에 쥔 내 술을 마셨다. 사실 이 이상 더 마시면 골로 갈 거 같았는데 김민석은 용케도 그런 날 파악하고 잔을 뺏어갔다.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라 그런지 이젠 풍기는 분위기 만으로도 서로를 파악했다.
"안 나갈 거야?"
"갈까."
"맘대로. 뭐, 가서 몸 흔들고 술이라도 깨."
"그러지 뭐."
하며 일어났으나 휘청였다. 김민석은 내게 빠르게 다가와 내 몸을 지탱했고 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쥐며 다른 손으론 벽을 짚고 룸을 나왔다. 문득 지금 내 집, 내 침대에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을 오세훈이 생각났다.
생각을 덜어내고자 머리를 털었다. 룸 밖은 안보다 역시나 더 시끄러웠다. 일렉트릭과 이상한 믹스 음악으로 범벅된 곳에서 사람들은 몸을 흔들고 부대끼고, 술을 마시고 약을 했다. 외부와 차단된 은폐된 곳이라 아는 사람들과 그들의 지인만이 올 수 있는 이곳은 스크린관에서나 볼 법한 사람들로 북적였고 가끔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이 걸음하기도 했다. 나는 약에 절은 그들의 눈빛을 무심히 보고 난관을 잡으며 1층으로 내려왔다.
"윤이."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도 유난히 또렷이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김종인이 있었다. 나는 두 겹, 세 겹으로 겹쳐 보이던 사람들과 사물의 형상이 갑자기 원래대로 뚜렷하게 보이는 걸 짧은 순간 느꼈다. 나는 아무 표정 없이 다시 등을 돌려 몸을 흔들었고 어쩐지 그가 내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받았다.
김종인은 역시나 추잡하게 굴었다. 뒤에서 내 어깨를 잡고 제 중심부를 비비는 거 같았다. 나는 여러 번 싫다는 의사를 표현했으나 그는 완강하게 굴었다.
"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남성의 높은 톤의 고함을 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가 난 곳. 바로 뒤로 돌았고 그곳에는 어떤 남자와 김종인이 있었다. 김종인은 찢어 죽일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쏘아봤고, 남자는 터진 입가를 닦으며 피 묻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김종인..."
김종인이 너무나도 쉽게 내 목소리에 반응했다. 아주 매섭고 무서웠던 표정이 쉽사리 풀어지며 예전 그대로 나른한 얼굴로 돌아갔다. 나는 새삼 그가 이곳과 굉장히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좋았어?"
"뭐가."
"내가 팼어."
김종인은 저를 쳐다보던 입 터진 남자를 턱짓했다. 더 할까?
"왜 그랬, 왜 때렸어."
"싫더라. 수작부리는 거."
"너한테."
"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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