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봉아"
"어, 어??????"
"혹시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
마지막으로 두부를 카트에 얹으니 꽤나 묵직해져 미는데에도 팔목에 힘이들어갔다.
신중하게 이것저것을 골라담던 원우가 카트를 밀며 내게 씩 웃어보였고 나도 그에 못말린다는 웃음으로 답했다.
"할머니 치아 걱정때문에 부드러운 것 위주로 사는구나?"
"응… 부탁치고는 꽤나 거창하지? 미안해 세봉아"
"야, 친구한테 이 정도도 못해주겠어 내가? 미안해하면 죽는다 진짜"
얼른 박스 포장하는 곳에나 가 있으라며 전원우의 등을 떠밀자 그는 끝까지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멀어져갔다.
행동을 조심하고 있긴 하지만 혹시나 전원우가 안 보이는 사람은 내가 혼잣말을 하거나 물건이 둥둥 떠다니는 걸로 보여서 무서울테니까.
하지만 요즘은 전원우가 보이는 사람의 비중이 더 많을테니 안 보이는 사람이 이상한 취급을 받을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기적이긴하다만…
"원우야, 넌 정말 안가봐도 되겠어?"
"세봉아"
"응?"
"너라면 갈 수 있겠어?"
장을 봐온 봉투를 사이좋게 나눠들고 휘적휘적 운동도 할 겸 집에 걸어오다보니 어느새 해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걱정스레 물어본 나를 마주하고 전원우가 되려 내게 물었다.
사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죽은 손자가 귀신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보는 할머니는 물론이거와 그런 할머니를 마주하는 원우 또한 가슴이 무너져내릴테니까.
너무 경솔했던 질문에 당장이라도 내 주둥아리를 패버리고 싶었지만 그 대신 전원우의 눈빛을 피하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그에 피식 웃던 원우는 다시 정면을 마주했다. 좋게 넘긴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찰나 오른손에 무언의 촉감이 전해져왔다. 온기라곤 없는 차가운 손이었다.
손을 잡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활짝 웃으며 나즈막히 말했다.
"자주 이러고 걸었어. 난 비교적 손이 따뜻했었는데 우리 할머니는 언제나 차가우셨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네…"
"……"
"김세봉 니 손 참 따뜻하다. 나는 이렇게나 차가운데…"
그렇게나 듣고싶어했던 그들의 추억팔이인데 왜 내가 주책맞게 울컥하는지.
전원우를 향해 드는 마음은 동정심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우리가 다시 손을 잡았을 때 그의 손이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어리석은 상상을 하게되더라.
"원우형. 그 자식들은 찾았어?"
"아니. 대충 소문은 들었는데 요즘 잠잠하다고 하더라고. 세봉이가 내일 갔다 와주면 나도 조금은 안심되니까… 그 때부터 다시 찾아야지"
"아… 뭔가 불길한데…"
"귀신이 불길하다니까 존나 더 불길하잖아 김민규!!! 그런 소리 하지마!!"
뒷목을 매만지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 김민규에 최승철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형도 귀신이야 쫄기는…
"그래도 정말 고맙네"
김세봉이 자고 있는 안방을 흘긋 쳐다보며 원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그렇게 서운할 일인가?"
동시에 같이 안방을 쳐다본 김민규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고 그런 김민규를 보던 최승철이 몰래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세봉아, 나중에 따라갈테니까 조심해서 가!!"
"걱정하지마 나도 다 컸어~"
"진짜 바로 갈게!! 진짜 조심해!!"
팔 한가득 원우 할머니께 드릴 음식들을 안고서, 걱정이되는지 내가 멀어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는 전원우에게 얼른 들어가라고 장난스레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그에 차라리 내가 먼저 가는 편이 낫겠다 싶어 얼른 종종걸음으로 걸음을 빨리했다.
"전원우 미래 마누라는 복 받았네~"
저렇게 다정한 사윗감도 찾기 힘들겠지. 괜시리 내가 뿌듯한 마음에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르면 나는 그가 살아있지않음을 떠올리고 그대로 멈춘다.
에라 모르겠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서 버스 정류장으로 아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발을 움직였다.
"우와… 완전 달동네네?"
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반드시 멀미가 날 만큼 굽이 진 골목길을 들어서 수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전원우가 그려준 삐뚤빼뚤한 그림 지도에 설명된 작은 집이 보인다.
금방이라도 누가 톡 건드리면 쓰러질 듯한 낡고 허름한 집에는,
"계세요…?"
"…누구?"
몸이 많이 안 좋으신지 쉬어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현관으로 나오시는 연로하신 할머니가 계셨다.
"저… 원우 친구인데요"
'원우' 라는 이름을 듣자 마자 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름을 듣는 것 만으로 저렇게 놀랄 정도이니 전원우가 함께 왔다면 어찌 됬을까 가슴이 아파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할머니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으셨다. 깜짝 놀란 나는 음식이 담긴 가방을 옆으로 내팽겨치고 얼른 할머니를 붙잡고 안방으로 부축했다.
보온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이 차가운 방에 그저 얇은 이불 몇겹을 두르고 계셨던 할머니. 식사는 제대로 하시고 계신건지 비쩍 마르신 손목을 잡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이불을 할머니의 어깨에 둘러 매고 현관 옆의 음식 가방을 서둘러 들고 와 할머니 앞에 마주 앉았다.
"아가씨는 우째 알고 왔노…"
목이 메이신지 할머니의 말 끝이 떨렸다. 나는 할머니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서 말했다.
"원우에게서 편지가 도착했어요. 본인이 이렇게 될 걸 알았는지 미리 편지를 써 놓았더라구요… 편지 받으면 할머니께 맛있는 거 많이 해가달라고… 미안하다고…"
"…아이고, 아, 아이고……"
급기야 할머니는 내 손을 부여잡고 펑펑 우셨다. 애써 참으려고 했던 나도 눈물이 터졌다.
내 집에 사는 다정한 전원우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산 사람에게는 이미 죽은사람일테니까.
알고는 있지만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던 현실이 눈 앞에서 가슴으로 느껴졌다. 그가 죽었다는 걸.
"……"
그래서 난 아무 말 없이 할머니를 꼭 안았다.
그의 차가웠던 손만큼 차가워진 할머니를.
+++
"이건 옷들이구요, 이건 약들이에요. 진통제랑 감기약들!! 진통제 이거 효과 끝내줘요!! 그리고 이건 음식들~ 아! 이 두부조림은 제가 만들었어요!!"
"맞다 맞다. 내 이거 좋아하는 건 우째 알았노, 원우가 말해주드나?"
"저번에 말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길래… 할머니 치아 생각해서 부드러운 것 위주로 골랐어요. 어때요? 괜찮아요??"
"좀 짭다"
"네???!! 어, 어떡해요 다, 다시!! 다시 만들어올게요!! 짠 건 몸에 안 좋잖아요!!!"
망했다. 내가 레시피 찾아가며 새벽에 몰래 만든건데……!! 여러가지 음식들은 다 원우가 만들었지만 나도 하나정도는 내 힘으로 만들고 싶어서 인터넷 여러번 뒤져가며 고생끝에 만든 두부조림이…
당황하기도 잠시 금세 시무룩해진 날 보며 할머니는 홀홀 웃어재끼셨다. 툭툭 치시더니 인심좋은 미소로 '괜찮다. 밥이랑 같이 묵으면 된다. 그래 많이 짜지도 않다' 라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셨다.
그에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되어 울상을 짓자 할머니는 다시금 내게 웃어주셨다. 덕분에 내 입가에도 둥그런 호선이 지어졌다.
온 김에 청소나 좀 해드려야겠다 싶어 할머니께 잠깐 계시라며 거실로 나가는데 웅성웅성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엄청나게 구석진 곳이라 사람이 들끓을 일이 없을텐데…
"할머니 여기 사람 없죠?"
"없제. 마, 다 노인네들 뿐인데"
직감적으로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시끄러운 소리가 가까워질때면,
-쾅!!!
내 직감이 맞았다는 걸 확신했다.
"이 댁 아드님이… 전원우 맞지?"
검은 양복차림에 껄렁한 행동거지로 집 안에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아저씨들을 보며 난 자동적으로 할머니가 계신 안방 문 앞으로 달려가 우뚝 섰다.
"아가, 무슨 일이고?"
"하, 할머니…"
"어이쿠, 아직 살아계셨네? 할머니"
할머니의 표정만으로 난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이 사채업자라는 것을.
할머니는 두려움에 벌벌 떠시면서도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셨다.
"내 새끼 마음대로 팔아갔으면 그걸로 된거 아인교!!!! 왜 또 나타났노 왜!!!!!"
"아이 참 할머니, 다 죽어가는 마당에 목청 한번 크시네~ 목숨값이 부족했으니 온 거 아냐…"
전원우가 팔려가? 그럼 빚 때문에 할머니 대신 죽은거란 말이야…?
"어라, 아가씬 누구요?"
집에 더 뒤질 물건도 없는 지 문을 몇번 열었다 닫았다 하던 아저씨들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 다 늙은 몸뚱아리를 내다 팔아도 돈 될것도 없고…' 하며 중얼거렸다.
그 중의 한명이 날 발견하고서 툭툭 치며 기분나쁜 미소와 함께 물어왔다.
"이 집 막내 손녀인데요"
"으아씨!!"
와장창- 시끄러운 소리가 울러퍼졌다. 유리 깨지는 소리를 듣고 달려 온 최승철과 전원우가 멍하니 깨진 꽃병을 쳐다보고 있는 김민규를 불렀다.
"민규야, 뭐 해?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다쳤어??"
"형. 아 존나 불길해 뭐지?"
"너 왜 어제부터 불길 타령이야??"
"씨발… 아 진짜 이상한데… 형들 미안 이것 좀 치워줄 수 있어? 원우 형! 끝났어? 김세봉이한테 언제 갈 거야?"
"어어, 다되가는데 왜?"
"나 먼저 가볼게!!!!"
"야!!! 민규야!!!"
원우야, 우리도 이거 치우고 바로 출발하자. 덩달아 안좋은 기분이 든 승철도 물 위에 휴지를 겹겹이 쌓으며 원우에게 말했다.
"그게 뭐냐?"
"아, 그 때 형이 이 팔찌 구해다 준 곳에서 산 부적인데…"
부적이 붙은 쇠 파이프와 야구방망이, 골프채를 손에 쥔 채 원우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얘기가 빠른 아가씨네~ 할머니는 손녀손자 참 잘 뒀어?"
할머니는 숨이 넘어갈 듯 우셨다. 내가 손녀가 아니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지만 이 아저씨들은 알면서도 나를 잡아가려고 한다.
전원우… 전원우가 여기 오면 내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야 할텐데…
"분야가 뭔데요?"
"인신매매… 에서 장기매매로 바꼈는데, 아무래도 넌 쓸만한게 그냥 팔아야겠다"
"어디로 가는데요. 죽기 직전인데 그 것 정도는 알려주시죠"
"하하- 요거 좀 당돌하네? 그래! 좋다"
위치를 말 하자마자 할머니가 뒤로 넘어가셨다. 그에 식겁한 내가 달려가서 할머니를 받쳤고 남자는 기분나쁜 웃음소리로 웃어재꼈다.
할머니… 죄송해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할머니의 몸을 끌어안고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할머니 좀 눕혀드리게 나가 주세요"
"도망가면?"
"문 앞에 서 계시면 되잖아요!!!"
악에 바친 목소리로 남자를 노려보자 그는 띠꺼운 표정을 짓더니 이만 다른 남자들을 데리고 문 밖으로 나섰다.
"할머니… 제가 원우 대신 할머니를 보러 오게 되서 정말 영광이었어요… 눈 뜨시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저기 맛있는 것들 많이 드시고… 약도 꼬박꼬박 드셔야 해요 알았죠…?"
눈물 자국이 번진 얼굴의 할머니의 귓가에 속삭이고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차가운 바닥에 여러겹의 이불과 가져온 옷가지들로 할머니를 꽁꽁 덮어드리고서 황급히 거실로 나섰다.
재촉하기 전에 얼른 해야만 한다. 숨을 한번 들이마쉬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엄지 손가락을 세게 물어 뜯었다.
"아아…"
피 나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한 글자식 써내려갔다. '남해안 오른쪽 끝자락의 폐쇠된 철공소 길 앞의 부둣가' 아까 아저씨가 알려준 위치였다.
문을 열고 나가자 왜 이렇게 늦게 나오냐며 툴툴 거리는 남자들이 보였고 난 그에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 중 한 사람이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밧줄로 내 손목을 묶으려는 순간,
"김세봉!!!!!!"
바람에 머리가 미친 듯 휘날려 엉망이 된 몰골로 내 앞에서 김민규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나와 남자들을 번갈아보더니 씨발 내 이럴 줄 알았어… 를 중얼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야!! 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 새끼들은 왜 내가 안보이는거야!! 이런 짓 하는 주제에 지금 마음이 평온하다 이거야?"
"아가씨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마음이 착잡한가?"
본인이 안보이는게 답답한지 김민규가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팔을 붕붕 휘둘러도 김민규의 팔은 남자들을 통과했다.
"씨발!!!! 잡는 건 되면서 왜 안되는거야!!!!!"
"…김민규"
"야!! 김세봉, 어차피 저 새끼들 나 안보이잖아…!! 말이라도 좀 해봐!!!"
"…할머니 집 들어가봐. 그리고…"
"김세봉!!!!!"
"꼭 와야돼…?"
아가씨 지금 누구랑 얘기하는거야? 혼잣말이 취미인가? 어라, 울고 있네? 능글거리는 말투로 내 심기를 건드리는 아저씨를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난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팔찌를 차고 있어 사람과 물건을 잡을 수 있는 전원우라면 몰라도,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김민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그의 눈빛이 딱 그랬다. 나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지만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간 김민규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정도로 참담했다.
"김세봉!!!!!!! 너 존나 내가 죽게 안놔둬!!…알았어??!! 딱 기다려…!!!!!!!"
멀리서 김민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눈을 감은채로 그저 그들이 향하는 곳으로 걸었다.
할머니 집 안으로 헐레벌떡 들어간 김민규는 현관 앞에 적힌 빨간 글씨를 발견했다.
"…피?"
김세봉이의 노트에서 본 것과 같은 글씨체. 세봉이가 쓴 글임이 분명했다. '남해안 오른쪽 끝자락의 폐쇠된 철공소 길 앞의 부둣가' 그녀가 지금 가고 있는 곳이라 판단한 민규가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끙끙거리며 앓으시는 할머니를 발견하고서 민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할머니 분명 여기저기 아프실테니까 약도 좀 챙겨가야지'
분명 약이 있을것이었다. 세봉이의 가방을 찾은 민규는 약봉지를 꺼내들어 물과 함께 할머니의 머리맡에 조심스레 두었다.
잠들며조차도 편안히 못주무시는 할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다 할머니 위에 여러겹 덮어져있는 익숙한 옷가지들을 발견했다.
'웬 옷들이야? 구석에서 꺼내는 것 같던데'
'옛날에 우리 할머니 살아계실 때 입던 옷들이야.'
' 세봉아… 안 그래도 돼!! 니 소중한 물건들이잖아!!'
'내 추억 내가 쓰겠다는데 누가 뭐래?'
쓸데없이 상냥해… 잠시 어제일을 생각하다 이내 끌려간 그녀를 떠올리고서 민규가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김세봉… 찾아올겁니다. 아, 그리고… 원우형도 잘 있어요. 여기선 걱정하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문턱에서 할머니를 바라보고 중얼거린 민규가 꾸벅 목례를 하고, 서둘러 문밖을 빠져나갔다.
빠른걸음으로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그 밑에는 올라오려다 내려오는 민규를 발견하고서 의아한 표정을 짓는 원우와 승철이 있었다.
"형들… 진정하고 들어. 김세봉 지금 할머니 대신 팔려갔어"
"…뭐???? 그걸 어떻게 진정하고 들어!!!!!"
깜짝 놀란 승철이 소리를 질렀고 원우가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떨어트렸다.
아… 받아온다는게 이 부적이었나… 황급히 원우대신 쇠파이프를 챙기고 민규가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형 정신챙겨!!!!!! 내가 어딨는지 아니까 빨리 가야 돼 빨리!!!!!"
비도 오지 않았는데 뻥 뚫린 철공소의 안은 상당히 축축했다. 눈 앞에 보이는 건 경치좋은 부둣가였지만 불어오는 바람만큼 쌀쌀한 건 더 없었다.
입술이 새파래지고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온 몸이 밧줄로 꽁꽁 묶인 채 의자에 앉아있는 나는 그 두목이 저 좋다고 피워놓은 모닥불 앞에서도 비맞은 생쥐마냥 벌벌 떨고 있었다.
이상한 긴 막대기를 매만지던 두목은 입술을 몇번 매만지더니 내게 걸어와서 내 턱을 움켜잡았다.
"아가씨, 일 잘해?"
"……"
"뭐 청소 잘 해? 요리는? 춤은?"
"……"
"뭔 씨발 말을 못해. 벙어리년이야?"
대답하지 않고 그저 눈을 내리깔고만 있자 두목은 화가난 듯 의자를 걷어찼고 난 맥락없이 넘어져서 오른쪽 다리와 팔, 그리고 볼이 다 까지고 말았다.
"물어 봤으면"
"……아아악…!!!!!!"
"대답.을.해야.할.것.아냐…!!"
말을 끊어서 할 때마다 내 몸을 밟아대는 남자에 처음엔 고통스러운 비명이 나왔으나 갈수록 무뎌지는 것인지 소리를 내 지를 힘조차 없어지는 것인지 어떠한 목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한참을 밟아대던 두목에게 날 데리고 온 남자가 굽신거리며 다가와 상품에 스크래치가 나면 안된다며 두목을 저지했다.
"장기 매매는 폼이야?"
"안 팔리면 그러기로 했잖습니까… 일단 좀 진정하십쇼!!"
그는 소매를 걷어올리고서 짜증난다는 표정을 하고서 마지막으로 날 한번 걷어차고 자리로 향했다.
덕분에 내 몸은 만신창이. 입과 얼굴에선 피가 흐르고 있고 뭐, 뼈가 부러지진 않았겠지만 인대 한 두개쯤은 늘어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하, 사람도 아니고 귀신인데……"
아무것도 못했던 아까의 김민규를 떠올리면서 괜시리 불안해졌다. 뭔지는 몰라도 전원우가 꼭 와줄꺼라는 확신때문에 여기 끌려온건데.
전원우도 아무것도 못하면…? 아냐아냐, 불안한 마음 먹지 말자. 날 믿고 할머니를 부탁한건데 나도 끝까지 믿어야하는게 맞잖아.
"알단 밖으로 끌어내. 먹잇감 하나밖에 안 찾아 낸것도 성질나는데 게다가 독한년이야…? 한숨 좀 자야겠어. 30분 뒤에 깨워"
두목은 말을 끝으로 의자에 기대 눈을 붙였다. 날 거칠게 일으켜 세우는 남자들은 질질 끌고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부둣가 한 가운데에 앉혀놓았다.
불 앞에 있어도 그렇게 추웠는데 이젠 몸이 팔려 죽기전에 얼어죽을 것만 같았다.
저 남자가 깨고나면. 그 30분 뒤에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이, 아가씨. 꼴이 엉망이네? 피투성이야 피투성이"
벌벌 떨리는 몸을 고사하고 고개를 들어 짜증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면 아까 집으로 쳐들어왔던 아저씨 중 하나가 내 앞에 쪼그려 앉으며 기분나쁜 미소를 지었다.
"놀리려는거면 꺼지세요"
"하하, 내가 또 이런 모진 말 듣는데에는 익숙해서 말이지. 근데… 아까 누구랑 얘기한거야? 진짜 귀신볼 줄 알아? 어우~ 나 막 소름 돋았잖아 아까!!"
"…귀신 무서워요?"
"우리 조직이 또 사람을 가지고 막 장사를 하는 그런 조직 아니냐. 그런 것 때문인지 난 오한을 느낀 적이 몇번 있지만 뭐, 우리 두목님은 그딴 거 무서워하지 말자는 주의셔서"
"귀신이 왜 없어…? 있어요 귀신. 해코지도 할 걸요"
"그러니까~ 귀신되어 해코지 할까봐 그게 제일 무서운거라니깐?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적은 한번도 없었네요! 뭐 나중에 귀신보게되면 그 땐 미안했다고 좀 전해달라고~"
"…허, 참"
전원우가 들으면 진짜 기가 찰 노릇이군… 그럼 수고~ 끝까지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멀어져가는 남자를 향해 난 묶인 채로 조용히 엿을 날렸다.
"…진짜 죽는 건 저런 새끼들이 죽어야 하는데……왜 전원우가……"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면 망가진 얼굴의 상처에 들어가 미칠듯이 따끔거린다. 아픈 건 얼굴 뿐만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욱씬 거리고 피투성이었다.
더러운 놈들에게 여자에 대한 매너를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실제로 당하고 나니 내가 얼마나 편안한 세상속에 살았나 새삼 와닿았다.
이지훈놈은 꼴에 남자랍시고 내 옆에 이상한 놈이 들끓으면 경계해주고 아니다 싶으면 자기가 쳐 내주고. 권순영은 비가 올 때면 내 걱정을 먼저 해주고…
'야 넌 왜 원우형만 성 빼고 불러'
'놀러가자!'
'김세봉!!!!!!! 너 존나 내가 죽게 안놔둬!!…알았어??!! 딱 기다려…!!!!!!!'
갑작스레 귓가에 김민규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그 때문인지 피가 터져나오는 마른 입가에 픽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허, 진짜 죽을 때가 다 됬나… 김민규도 그리워지네…"
야속하게도 맑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지긋이 감았다. 온 몸은 춥고 아팠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이로써 적어도 전원우의 할머니는 무사할 수 있었으니까…
"ㅁ, 뭐야…!!!! 이 새끼들 뭐야…!!!!!!!!"
"두목님!!!! 두목님!!!!"
"씨발 이것들 뭐야…!!!!"
"잡히지가 않슴다!!!!!!"
무언가가 깨지고, 떨어지고, 부딪히는 소리. 시끌벅적한 소리에 천천히 철공소 안으로 시선을 돌리면 난…
"어어- 당황하니까 우리가 보이지?"
"와… 완전 드라마에서 보던거랑 존나 똑같네. 근데 아저씨들 나이 몇이야?"
"김세봉 어딨어!!!!!!!!"
그제서야 참았던 눈물을 다시 터트린다.
쇠파이프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미친 듯 나를 찾는 전원우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안심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이기적이지만 날 발견하고 일으켜세워주며 '괜찮아' 라고 말해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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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 의외로 악필이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