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은 코트를 챙겨입고 작업실을 나섰다. 품 안에 가득 스케치북과 노트를 안고서 뒤뚱이며 건물을 나왔다. "저도 같이 갈까요?" 하고 묻는 수정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이고서 백현은 다시 한번 품 안에 안은 스케치북을 고쳐 안았다. 전부 다 옷감이며, 단추며, 지퍼며 이것저것 디테일한 것들을 디자이너가 직접 알아봐야 하는 디자인들이었다. 그 정도로 중요한 디자인들이었다. 작년에는 단추 색이 미스라서 다시 바꾸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백현은 버스 정류장 벤치에 스케치북과 노트들을 내려놓았다. 종이뭉치를 조금 옆으로 치워낸 백현이 조금 남은 공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시장부터 가야겠다." 백현이 핸드폰을 꺼내 지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시장? 어디 시장?"
갑자기 난데없이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백현이 몸을 움찔 떨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찬열이었다. 찬열은 Passion B 코트를 입고 있었다. 정말로, 저 더블코트는 찬열이를 위해 디자인 한 거 같아. 백현은 다시 한번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보람을 느꼈다. 찬열은 백현의 옆에 쌓아둔 스케치북과 노트 뭉치를 들어 품 안에 안고, 종이 뭉치들이 있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렇게 짐이 많으면 날 부르지 그랬어요."
찬열이 뭉치를 제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너 안 바빠?" 백현의 물음에 찬열이 그간 제 스케줄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너무 바빴지. 요새 잘나가는 대세 모델이라는 찬열은 화보 촬영 뿐만 아니라 각종 행사, CF, 방송까지 다 섭렵하고 있었다. 저번 주말엔 엄마도 못 만나러 갔어. 이제 아주 준면이 형이 엄마 같다니까. 찬열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 맞다. 나 드라마 찍어요."
찬열이 활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얗게 반짝이는 찬열의 이를 보며 백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텁, 하고 찬열의 입을 제 손바닥으로 막아버린 백현이 찬열을 타박하기 시작했다. "너 그렇게 웃지마. 바보같으니까. 드라마도 찍는다며." 백현이 타박하자 울상을 지은 찬열이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내밀어 제 입을 막은 백현의 손바닥에 쪽, 쪽, 쪽, 하고 뽀뽀 쓰리 콤보를 날렸다. 눈꼬리가 이쁘게 내려간 백현의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하얗고 모찌모찌한 볼은 잘익은 복숭아처럼 분홍빛이 맴돌았다.
"디자이너님 앞에서만 이렇게 웃는데?"
"어쨌든, 그렇게 웃지마."
백현은 어찌됐건 바보같은 찬열의 웃음에 마음이 홀랑 넘어간 제 옛날 모습을 회상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도 넘어가면 어떡해. 백현은 찬열의 쓰리 콤보 뽀뽀에 놀라 손을 얼른 내렸다. 찬열의 입술이 닿았던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후다닥 내린 백현의 손을 다시 쥔 찬열이 백현의 손등에 다시 쓰리 콤보 뽀뽀를 날렸다. 아주 그냥, 달달해서 죽겠어. 꿀이라도 발라 놨나봐. 찬열이 마지막으로 도장을 찍듯이 꾹, 뽀뽀를 하고 백현의 손을 잡고 홀랑 제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따뜻하죠?"
백현은 그렇게 물으며 저를 보고 웃는 찬열을 보며 애써 웃어보였다. 병원에 가서 건강 검진이라도 받아봐야할 판이었다.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뛰면 곤란한데. 쿵, 쾅, 쿵, 쾅. 무지막지하게 뛰어대는 심장박동소리에 백현은 숨을 들이켰다. 소리가 너무나도 커서 찬열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나 몰라! 백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귀여워. 예뻐."
발갛게 달아오른 백현의 귀를 매만지며 찬열이 말했다. 어쩜 저렇게 낯부끄러운 말을 이렇게 잘 하는 거지? 진짜 얘는 어디 학원이라도 다니나봐! 백현이 마음 속에서 퐁퐁 샘솟아 오르는 부끄러움에 울상을 지었다.
"얼굴 빨개진 것도 예쁘니까 고개 숙이지마요, 알았죠?"
찬열은 기어이 마지막으로 핵폭탄을 백현에게 발사했다. 찬열의 말에 백현은 흰 수건을 흔들었다. 으앙. 항복이야,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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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열은 시장에 와 옷감이며 자재들이며 하나하나 확인하며 바쁘게 왔다갔다 하는 백현의 비서 역할을 충실히 잘 해냈다. 짐도 잘 받아들고, 가끔 소비자로써의 의견도 제시하고. 어쨌든간에 하나보단 둘이라고, 백현이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일찍 일이 끝났다. 물건상태도 정말 맘에 들고! 여러모로 기분이 좋아진 백현이 활짝 웃었다. "내가 밥 살게, 뭐 먹을래?" 얼굴에 가득 예쁘게 방긋방긋 웃음기를 매달고 제 팔을 잡는 백현을 찬열이 마냥 귀엽다는 듯 웃으며 내려다봤다.
칼날같이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찬열은 이미 백현과 봄날의 꽃동산에 와있는 것 같았다. 하긴, 백현과 함께 하는 날은 언제나 하루도 빠짐없이 봄날같았다. 백현을 못 보는 날이 겨울날이고. 어느새 찬열의 사계는 백현에 의해서 돌아갔다. 찬열의 사계에는 변백현의 존재유무의 차이인 봄날과 겨울날만이 존재했다. 백현의 사계에는 저가 존재할지, 찬열은 잠시 생각했지만 아무렴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니까, 내가 사랑하니까.
"막창 먹으러갈까? 그래! 먹으러가자!"
백현이 봄날 우리나라를 찾아온 남녘의 작은 새처럼 연신 재잘거렸다.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찬열의 마음 속에도 찾아온 봄날의 작은 새의 울림이 짤랑짤랑 들렸다. 백현은 "뭐 먹을래?" 하고 물을 땐 언제고 찬열이 대답도 채 하기 전에 자기 맘대로 덜컹 정해버렸다. 그러고 보니 찬열이랑 밥을 처음 먹을 때도 막창이었는데. 백현이 활짝 웃으며 찬열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은 술 안돼요!" 꽤나 단호하게 말하는 찬열에게 백현은 아무 말 없이 웃어보였다. 먹을 건데! 백현이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목구멍으로 꼴깍, 삼켰다.
"저번에 디자이너님 업고 가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몰라요. 난 그때 필름 끊겨있었어."
"어쨌든 술 마시기만 해봐!"
눈을 부릅뜨고 으름장을 놓는 찬열에게 백현이 혀를 쏙, 내밀었다. "마시면 어쩔건데?" 백현의 물음에 찬열이 피시시 웃었다.
"확 뽀뽀해버릴거야, 그냥!"
으앙. 제 입술을 손으로 가리는 백현을 보며 찬열이 낄낄 웃었다. 전에 잔뜩 술에 취한 백현에게 도둑뽀뽀를 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때 자기 혼자 부끄러워 얼굴이 불판에 데인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었다. 찬열이 그 때를 생각하며 피실피실 웃었다.
"그래요, 오늘 술 마셔. 뽀뽀해버리게."
"아냐. 안 마실게."
뽀뽀를 해버린다는 찬열의 말에 백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꼭 잡은 손을 빼려 백현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찬열은 더 힘을 주어 손을 잡았다. "손 빼지마. 손 시리니까." 그대로 제 코트 주머니에 맞잡은 손을 쏙 넣은 찬열이 씽긋 웃어보였다.
"근데 너 은근슬쩍 말 놓는다?"
"내가 언제요?"
가자미눈을 뜨고 저를 흘겨보는 백현을 보며 찬열이 빙글빙글 웃었다. "증거 있어요? 난 기억이 안나는데." 시치미를 뚝 떼는 찬열을 보며 백현이 눈을 흘겼다. 말이나 못하면. 백현이 열심히 찬열을 쏘아보는 동안 찬열은 열심히 백현의 손을 조물락거렸다. 백현은 남자치고 손이 엄청 예쁜 편이었다. 아니, 왠만한 여자들보다도 더 손이 고운 편이었다. 그래서 저가 백현의 손에 입을 맞추는 걸 좋아하는 걸지도. 찬열은 백현의 손을 한참동안 조물락거리다 다시 맞잡았다. 작은 주머니 안에서 주인이 다른 두 손이 달싹 달라붙어있었다. 따뜻하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하는 이번 겨울은 유난히 따뜻했다. 이러다 북극에 빙산이 녹는 거 아닌가 몰라. 찬열이 그렇게 생각하며 마주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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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레녹입니다!
어제 오고 또 왔지롱ㅋㅋㅋ
이제 주말마다 글이 한편 또는 두편씩 올라올 거 같네요!
구독료를 달까, 말까 고민하다 달지 않기로 했습니다.
전에도 구독료 없이 연재를 했었으니까요 그냥 그대로 가려구요ㅎㅎ
그리고 앞으로는 찬백이들의 소소한 연애담이 주로 올라갈 것 같습니다.
정말 소소하고 달달합니다. 달달하게 쓰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어요.
닭살 돋아도 이해 바람.
댓글 달아주시는 행쇼님, 백구배켠님, 패릿님, 니은님, 아봄님, 아몬드봉봉님 감사드립니다.
그 외에도 댓글달아주신 분들도 또한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댓글을 보며 힘을 내고 있어요.
제가 연재를 다시 하게 된 것도 여러분 덕분이고, 계속해서 연재를 하려는 것도 여러분들 때문이랍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날게요, 좋은 밤 되세요! 비록 내일이 월요일이지만...!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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