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경성, 그리고 크리스마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야심한 밤이었다. 나는 며칠 뒤에 있는 상해 독립 운동에 쓸 태극기를 친구들과 학당에 모여 같이 찍고 있던 중이었다. 일제에 끌려간 부모님 대신에 어린 동생들을 재우고 뒤늦게 온 진리가 내게 밖에서 어느 도련님이 날 찾는다고 전해 주었다. 내 옆에서 가만히 태극기를 찍고 있던 수정이는 환히 웃고는 얼른 나가 보라며 나를 내보냈다.
"…도련님?"
"너봉아. 왜 이제야 나온 것이야. 아까부터 한참을 너만 기다렸단 말이다."
"그냥 들어오셔도 되는데."
"여학당에 어찌 사내가 들어갈 수 있겠느냐. 오늘도 밤을 새워 태극기를 찍는 것이냐."
"그래야할 것 같습니다. 상해에서 생각보다 태극기를 많이 요구해서요."
"밥은 먹었고?"
"잘 챙겨 먹었습니다. 끼니 걱정은 하지 마셔요. 제가 알아서 잘 먹고 있어요."
"다행이구나. 힘들지는 않으냐?"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힘들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럴테지. …근데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고 그렇게 열심히 태극기를 찍어대는 것이냐?"
"오늘이 무슨 날인데요?"
"오늘이 바로 크리스마스지 않느냐."
"…크리스마스요?"
"학교에서 일본 몰래 천주교 활동을 지원해주었는데 그 선교사가 알려 주었다. 예수라는 사람이 태어난 날인데, 서양에서는 연정을 나눈 남녀가 사랑을 확인한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조심하시어요. 아무리 학교에서 지원해주신다 해도 일본 놈들 몰래 종교 활동을 하는 건 절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너는 어찌 그런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이냐."
"제가 생각할 게 도련님의 안전 말고는 뭐가 있겠습니까."
"서양에서 크리스마스는 연정을 나눈 남녀가 사랑을 확인하는 날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예?"
"너봉아, 메리 크리스마스."
그 말을 끝으로 도련님의 입술과 내 입술이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