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iniscence
w.기분이나쁠땐
빛바랜 책과도 같은 너와의 첫만남. 깊이 깊이 내 가슴속에 사무쳐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는 너와의 길고 짧은 연애.
그 이야기 지금 내 눈 앞에서 아빠의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며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는 내 딸에게 해주려고 해.
아마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 딸은 울 것 같아. 우리 이야기는 슬프잖아? 그치?
아 맞다. 넌 처음 듣는 이야기지? 나 결혼했어. 아내는 지금 부엌에서 저녁설거지하고 있고. 아내 말이야. 너랑 무척 많이 닮았다. 엄청난 미인이지?
너한테 한번 보여주고 싶은데. 그러고 싶은데.....
"자.... 이제 시작할께.. 민지야.."
여차여차 해서 겨우겨우 얻어낸 일자리는 어느 동네의 어느 병원의 심리치료사였다. 심리학과를 여차저차 졸업해 대학원을 거쳐 나오니 그 동안의 시간과 쏟아부은 돈보다 훨씬 더 보잘 것 없는 일자리를 얻었다. 그래도 백수처럼 집에서 밥만 축내는 동기들과는 다르게 일자리를 얻은 것이 어딘가. 하며 병원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어느 동네의 어느 병원이였지만 그래도 제법 시내에 있는 병원이라 그런지 병원 구색은 갖춰져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있는 곳은 정신병동. 역시나 정신병동은 혼잡하고 시끄러웠다. 그래도 다른 병동보다는 제법 사람이 있는 곳 같아 마음에 들었다.
"선생님! 지금 상담 시간인데요.."
조간호사의 외침에 정신병동을 지나 신경외과쪽으로 가려던 내 몸이 반자동적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2시. 제일 나른할 시간에 상담이라. 언제 잡았는 지도 기억안나는 상담이지만 일단은 몸을 돌려 다시 내 진료실로 들어가 앉았다.
찰칵. 문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환자를 맞이했다.
환자치고는 좀 곱상한 모습과 기껏해봐야 내 또래같은 생김새에 과연 이 환자는 무슨 일로 이 곳을 찾아온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의 개인정보가 담긴 진료증이 환자의 손을타고 내게 왔다.
이름은...루한... 특이하네.... 아시아권 사람인것 같은데...
나이는... 30살... 역시 예상했던 대로 내 또래였다.
그 외에는 전부 항상 봐와던 지루한 내용뿐이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루한을 바라보았다.
"루한군, 뭐가 가장 당신을 힘들게 하죠?"
"....외로움이요.."
그의 넘실거리는 두 눈동자 속에 가득 담긴 외로움. 과연 얼마나 외로웠길래 그는 이곳까지 온 것일까. 나는 그의 자초지종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외로움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주실수 있나요..?"
"외로움은요.... 끊임없이 저를 따라왔어요. 중국에서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나는 혼자였고 그런 혼자인 나를 언제나 달래주던 건 외로움이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부턴가 외로움은 저에게 혼자를 강요했고 자신만이 언제나 저를 달래주고 자신만이 저를 위해주길 바랬어요. 그리고 자신이 제가 되고 제가 자신이 되길 바랬죠. 여기 온 것도 많이 두려워요. 또 외로움은 저에게 강요를 하고 저를 죽이려들겠죠. 절 구해주세요. 이제 외로움은 저를 달래다 못해 저를 죽이려고해요. 전 죽기 싫어요. 저도 친구라는 걸 사귀어보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고..."
그는 끝내 말을 잇지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심란했다. 이곳에서 일한지 이주일도 안됬는 데 벌써부터 시련의 시작이라니.
사실 난 우울증환자일줄 알았다. 차라리 우울증환자였더라면.. 그렇다면 좀 더 도와주기도 수월했을텐데.. 그렇다면 접근하기가 좀 더 쉬웠을 텐데.. 이 환자는 모호하다. 외로움..? 그게 어디있다는 걸까.. 이 환자는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실존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일까..식물일까? 동물일까? 사람일까? 귀신일까? 이 환자의 모호함 만큼 모호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꽉꽉 채웠다.
"루한군.. 루한군이 원하는 건 뭐에요?"
"저는....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요...선생님 도와주세요.."
"그럼 물어볼께요. 루한군이 말하는 외로움이란 건 뭐에요? 제가 잘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실 수 있으세요?"
나의 물음에 루한은 잠시 고민하더니 목을 살짝 가다듬고 물을 한모금 마셔 목을 축이더니 이내 눈빛이 차분해졌다. 그리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중학교에 입학 할 무렵에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어요. 이유는 으레 예측하듯이 친구들간의 다툼이였죠. 그런데 그 다툼이 조금 심해서 따돌림이 조금 오래 지속되었어요. 언제나 혼자의 연속이였죠.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혼자 집에가는 길이였어요.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오더라구요. 그 말소리를 따라가보니 저희동네 사람들도 잘 안가는 으슥한 놀이터였어요. 그 때 제가 뭐에 홀렸는 지는 몰라도 그 놀이터로 들어가 다 녹슬어 버린 그네에 앉아서 그 말소리를 들으며 그 말소리와 얘기했어요. 무려 3시간 동안이나. 어린 마음에 그 동안 담아왔던 모든 서운함을 술술 풀어냈죠. 전 그 때 처음 알았어요. 나도 이렇게 당당하게 내 불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뒤로 2시간을 더 이야기하고 그 말소리는 자신을 외로움이라고 소개했어요. 왜 외로움이냐고 물어봐도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은 채 힘들때마다 매번 이곳으로와 자신에게 모두 털어놓으라 했어요. 그리고 전 자주자주 그곳을 들락날락했죠. 물론 가끔씩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 때문에. 벤치에 앉아 말씀을 나누시는 할머니들 때문에 자주 간만큼 많은 이야기는 하지 못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외로움이 저에게 물었어요. 자신이 좋냐고. 그래서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좋다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제가 좋다고 한 것 때문에 외로움이 절 따라오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때 당시에는 정말 제 하루의 스트레스와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오직 그 외로움 뿐이였고 어찌보면 따돌림 당하는 저에게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죠. 물론 그 때 뿐만이였지만요..
그 뒤로 외로움은 어느센가 말도 없이 제 주위를 맴돌았어요. 따돌림당하는 저를 위해 제 옆자리에 앉아서 얘기를 해주기도하고.. 형체도 얼굴도 오로지 목소리만 들렸지만 저는 마냥 좋았어요. 학교에서 더 이상 외롭지도 않았죠. 그리고 문제는 터졌어요. 싸웠던 친구들과 화해하면서 그 친구들이 다시 같이 놀자며 제안을 해왔죠. 아이들 싸움이 으레 그렇잖아요? 싸웠다가 화해하고 금방 다시 친해지고. 저 역시 그랬죠. 아니 그러고 싶었죠. 근데 그 때마다 제 옆에서 자꾸만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외로움 덕분에 그러지 못했어요. 그 아이들과 놀지말라며 저를 끝없이 괴롭혔어요. 밤낮 가리지 않고. 심지어 잠을 잘때에도 저를 괴롭혔어요. 그렇게 밤낮을 잠을 설치고 공부를 망쳐가며 얻은 결과는 결국 친구들과 멀어지는 거였죠. 그 뒤로 쭈욱 혼자였어요. 그리고 외로움은 그런 혼자가 된 저의 모습에 기뻐하며 저에게 더욱 더 많이 말을 하고 제가 대답하기를 원했죠. 그리고 저는 어쩔 수 없이 그 대답을 다 들어주고. 여기까지 얘기하니 목이 조금 마르네요.
물론 부모님께는 말씀드렸어요. 외로움 덕분에 혼자가 된 이후에. 그러자 부모님께서는 무슨 헛소리냐며 공부나 똑바로해서 성적이나 올리라 말씀하셨죠. 저는 외동이라 말할 형제도 남매도 없었어요. 오로지 부모님뿐이였는 데 부모님 마저도 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죠. 힘들다고 호소했어요. 그리고 언젠가 저희 부모님께서는 저의 심각성을 느끼고 정신병원에 상담을 맡기셨죠. 지금처럼요. 아니, 지금과는 조금 다른 저를요. 그 때는 뭐가 뭔지 몰랐어요. 그냥 앞뒷말 다 짤라먹고 얘기하기도하고 따돌림 당했던 게 부끄럽기도 해서 그것은 빼놓고 말하고. 그렇게 말하고 나니 얻어지는 결과는 약처방이였어요. 몸이 허해져서. 기가 약해져서 그런거라고. 저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진짜 나를 괴롭히는 외로움이 있다고 말했지만 이미 의사선생님의 진료를 듣고 약까지 받으신 부모님은 저를 약과 물과 함께 저를 방으로 밀어넣으셨죠. 그리고 잔말말고 공부해. 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저를 16년동안. 기나긴 수렁속에 밀어넣으셨어요. 저는 참다 참다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우렁이와도 같고요."
루한의 이야기를 한자도 빼놓지 않고 경청하며 노트에 조심스럽게 핵심내용을 필기했다. 아직 좀 더 남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지만 일단은 나도 정리가 필요한 것 같아 잠시만 이때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한다고 하며 그의 말을 막았다.
그는 기나긴 얘기에 말라버린 목을 축였다. 종이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물이 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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