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아빠는 가을과 초겨울을 넘기고, 이제야 좀 추위가 찾아왔다 싶은 날 돌아가셨다. 애석하게도 그 날은 11월 29일인 민혁오빠의 생일이었다. 오빠는 왠지 모를 죄책감 때문인지 그 어린 나이부터 더 어린 나를 위해 우리 엄마를 도와 같이 아빠의 제사상을 차리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멀찌감치 떨어져 엄마와 오빠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일 밖에 없었다. 어려서도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에 빼먹는 것 하나 없이 주부 못지 않은 제사상을 차렸다. 오빠는 항상 그렇게 완벽하고, 멋있고, 자상했다.
오빠의 생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빠는 나가서 친구들과 놀지 않고 우리 집에 딱 달라 붙어있었다. 엄마는 항상 오빠를 집으로 되돌려 보낸다고 타일렀지만 오빠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 내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에 엄마까지 병원에 입원을 하셨고, 어째서인지 제사날이 항상 평일이었던 탓에 학교가 끝나고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나를 대신해 오빠가 제사상을 차렸다. 아빠의 기일 뿐 아니라 생일까지도 꼭 챙겼다. 결국 오빠는 초등학생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생일을 크게 챙긴 적 없었고, 끽 해봐야 집에서 케이크에 초 하나 키는 것이 다였다. 내가 오빠를 말리려고 해도,
"오빠, 진짜 안 해도 돼. 돌아가신 날은 그렇다 쳐도 생일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거 잖아……."
"떽!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버지가 속상해 하시겠다. 오빠는 괜찮으니까 우리 ○○는 공부나 열심히 하세요~"
라는 말도 안 되는 말로 오빠는 그냥 넘어갔다. 오빠의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이 태어나 축복 받아야 할 생일 날에 얼굴 한 번 못 본 아저씨의 제사를 지내는 것에 화를 낼 법도 했지만 가끔 일이 적은 날에는 남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우리 집에 오셔서 방 청소를 해주셨다. 창섭이는 11월 즈음이 되면 예민하고, 우울해하는 나를 알았고 나를 제 눈에 벗어나지도 못하게 했다. 옆에서 계속 챙겨주고, 가끔 가방 앞 주머니에 사탕이나 초콜릿을 가득 넣어 놓기도 했다. 내가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몰라 안절부절 할 때면 아저씨ㅡ민혁 오빠와 창섭의 아버지ㅡ께선 "그렇게 고마우면 민혁이나 창섭이, 둘 중에 한명한테 시집 와서 이 아저씨 딸내미나 해줘." 라고 농담을 하셨다.
내가 엄마의 병문안을 갈 때마다 엄마는 평소 우는 것 보다 열 배는 더 목 놓아 울었고, 그 눈물엔 아빠를 잃고 나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엄마의 서러움도 담겨있지만, 분명 내가 여느 여고생처럼 다닐 수 있게 보살펴주는 이 가족들에게 고마움이 더 큰 것이 분명하다.
05-2
4시 10분, 민혁오빠와 약속시간에 벌써 10분이나 늦었다. 약속 장소인 커피숍까지는 횡단보도 2개가 남아있었고 빨간 불이, 초록 불로 바뀌길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다. 핸드폰에 진동이 울려 슬쩍 본 액정엔 [나도 좀 늦을 거 같으니까 천천히 와.] 라는 오빠의 문자가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약속이 있는 날엔 일찍 나와 있으면 일찍 나왔지, 절대 늦을만한 군번이 못 되는 사람이다. 첫 번째 횡단보도를 통과하고 곧 바로 켜진 두번 째 횡단보도로 전력을 다해 뛰었다. 한 여름의 쨍쨍한 햇빛이 나를 때렸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안 그래도 쉬는 날에 쉬지도 못하는 바쁜 사람 불러내서 공짜로 과외 받기로 한 주제에 이 정도 뜀박질은 최소한의 예의였다.
아니나 다를까 커피숍에 가까워지며 보인 오빠는 창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나는 오빠가 보이는 창으로 달려가 숨을 돌리고 있었다. 오빠는 핸드폰 게임에 푹 빠졌는지 내 쪽엔 관심도 없어 보였다. 나는 창에 똑똑 노크를 하였고 그제서야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곤 씨익 웃었다. 숨이 가빠 힘든 나 까지 웃게 만드는 미소였다. 어서 들어오라는 오빠의 손짓에 커피숍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시원한 에어콘 바람이 안 좋았던 기분을 좋게 만들어줬다.
"어쭈, 뛰지말라고 문자까지 친히 보냈건만……."
"으아, 늦어서 미안해……."
오빠는 괜찮다는 말을 빼먹지 않고, 테이블 위에 있던 냅킨을 곱게 접어 이마에 난 땀을 닦아주었다. 오빠는 곧 주문을 한다며 카운터로 갔고, 나는 오늘은 내가 계산하겠다며 오빠를 막아섰다. 오빠는 당황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이내 눈을 접어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나는 당당히 카운터로 걸어가 아메리카노 하나와 딸기주스 하나를 시켰다. 오빠는 커피숍에 올 때면 항상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중학교 1학년 때 그 까만 커피가 무슨 맛인지 너무 궁금해 오빠를 졸라 한 입 마신 뒤론 커피는 한 모금도 입에 대질 않았다. 으, 그 쓴 걸 왜 먹는지…….
주문을 마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내가 의자에 앉자 오빠는 어제 계란말이 하나를 두고 창섭이와 싸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나는 그만 싸우라며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진동벨이 울렸고 오빠가 트레이를 들고왔다.
"으이구, ○○○. 누가 애기 아니랄까봐, 애기 입 맛은 어디 안 가네."
"근데 커피는 너무 쓰단 말이야……."
"그래, 건강에 좋지도 않은 거 먹어봤자 뭐해. 애기는 딸기주스만 먹어요~"
오빠는 내 앞머리를 흐트리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애써 꾸민 앞머리를 다시 정리하며 오빠를 노려보았지만, 오빠는 애교라도 부리듯이 두 손을 턱 밑에 대고는 나 몰라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내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자 오빠는 내 가방을 열어 수 많은 책 중에 영어책을 꺼냈다. 오늘은 영어가 땡긴다며 책을 펴자 제일 허름한 페이지가 나왔다. 계속 밑줄을 쳐서 이제 너덜너덜 해진 페이지였다. 오빠는 한동안 그 페이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손을 뻗어 내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흔들었다.
"우리 ○○, 진짜 예쁘네. 공부도 열심히 하구."
"……."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엄청 엄청 좋아하시겠다."
"……."
나는 다른 곳을 쳐다보며 눈을 돌렸지만, 내가 빨갛게 별 표시를 해둔 곳을 설명해준다며 이번엔 반대편 볼을 꼬집었다. 볼을 꼬집혀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내가 하지말라고 하자, 오빠는 우스꽝스럽게 나를 따라했다. 나도 따라서 오빠 볼을 잡으려 손을 뻗자 그제서야 내 볼을 놔주었다. 그렇게 몇 분을 서로 장난만 치며 보내다 결국 오빠는 세 시간 동안 내가 별 표시를 해둔 열 개의 페이지를 설명해주었다. 집중하느라 뻐근해진 목과 허리를 피며 스트레칭 하자 오빠는 내 책을 덮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빠 뭐해?"
"우리 장 보러 가야지."
"웬 갑자기 장?"
"내일 아버지 생신이시잖아. 보니까 집에 아무 것도 없던데, 간단하게라도 차려야지."
"……."
오빠는 한참을 말 없이 가만히 있던 나를 일으켜 주고, 그 새 챙긴 짐을 들어주며 내 등을 두어번 토닥이더니 내 손을 잡고는 끌다시피해서 커피숍을 나왔다. 커피숍 옆에 있던 주차장에서 오빠는 차를 빼고는 나를 태웠다. 오빠는 평소에 가까운 곳은 걸어다니지, 차를 끌고오진 않는다. 그런데도 오늘 차를 끌고 온 이유는 집에 없던 음식들과 생활용품을 장을 보고 집 까지 날 태워다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결국 오빠는 또 이렇게 날 빚 지게 만든다. 게다가 바쁘다는 핑계로 아빠 생일까지 잊고 있었다니, 정말 최악이었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빠는 우리 애기 덥나보네~ 하며 나를 위해 차 창문을 내렸다. 저녁의 차가운 공기가 내 뺨을 감쌌다.
"언제까지 그렇게 고개 숙이고 있을 거야?"
"……. 나 너무 챙피해, 오빠."
오빠는 말 없이 내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05-3
마트에 도착한 우리는 카트 하나를 빼 생활용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빠에게 왜 먹을 것 먼저 사지 않냐고 묻자, 큰 짐 부터 담아야 음식들이 안 망가진다고 했다. 휴지, 세제 등을 카트에 담고, 다시 과일과 야채가 있는 쪽으로 카트를 돌렸다. 오빠는 요령있게 맛있는 과일들을 찾아냈다. 사과를 천장 조명에 비추어보기도 하고, 두드려보기도 했다. 사과는 전체적으로 붉고 흰색 반점이 많아야 맛있고, 배는 동그랗고 큰 것이 맛있다면서 한 번도 이런 것을 배워 본 적 없는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오빠는 과일에 대해서도, 야채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갑자기 오빠가 엄청 높게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넋이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오빠의 뒷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녔다.
"왜 이렇게 쳐다보실까, 그렇게 멋있어?"
"음…, 조금!"
"이런 것들 다 아주머니가 알려주신 거야."
"엄마가?"
"응, 너 나한테 시집 오려면 이런 건 알아둬야지."
"ㅅ, 시집은 무슨!"
"하지만, 진짜 그러셨는 걸? 내가 대신 알려줬으면 좋으시겠다면서."
저렇게 당황스러운 말로 사람 혼 빼놓는 건 저 형제들 집안 내력인가 보다. 창섭이는 조금 익숙해졌다곤 하지만 오빠는 요새 특히 안 하던 짓을 계속 하면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괜히 가만히 있던 얼굴이 빨개지고,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몰라 고개를 계속 움직였다. 오빠는 방황하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고정 시켰고, 다시 내 어깨에 손을 올려 보던 장을 계속 보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부끄러운데 저는 하나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시치미를 떼니 얄미웠다.
걸음을 옮기던 중 오빠는 맛있어 보이니 한 번 먹어보자며 군만두 시식코너 앞에 섰다. 가만히 만두를 잘라주던 아주머니는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시더니 "남자친구는 훤칠하고, 여자친구는 예쁘게도 생겼네" 하며 인자한 미소를 띄셨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뜨거운 군만두를 입에 바로 넣어버렸다. 나는 입 안이 뜨거운지도 모르고 손사레를 치며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싫어? 오빠 서운하잖아."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걸음을 서둘러 황급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오빠는 빠른 걸음으로 나를 따라오며 오빠가 좋아서 부끄러운 거냐며 놀려댔다. 나는 더 빠른 걸음으로 계산대로 향했고 오빠는 다시 커피숍에서의 그 사람 기분 좋아지는 미소를 지었다.
05-4
"오늘, 오빠가 공부 봐주니까 좋았어?"
"신기하게 혼자 할 때는 하나도 모르겠던데, 오빠랑 하면 바로바로 머릿 속에 들어 와!"
"…… 어떡하지?"
"응? 왜?"
"너무 귀여워."
또 이렇게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다시 얼굴이 빨개지는 것만 같았다. 마트에서의 긴 여정이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벌써 아홉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마트에서 집이 꽤 가까워 금방 도착했다. 오빠와 나는 양 손 가득히 짐을 들고 우리 집 안에 놓았다. 음식들은 냉장고에, 다른 것들은 창고에 넣어 놓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고 오빠는 운전 때문에 앞을 봐야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웃지마!"
"귀여워서 그러지. 우리집에서 밥 먹고 갈래?"
"……그럴까?"
오빠와 익숙한 놀이터를 지나, 몇 걸음 걷지 않고 바로 옆 동인 오빠네 집 앞에 도착했다. 순간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려서 확인해보니 창섭이에게서 온 전화였고 고개를 들어 전화를 받자마자 창섭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야?]
"나 너희 집 가는 중이야. 왜?"
[우리 집?]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엘레베이터 쪽으로 꺾자 창섭이가 서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서있었다. 짧은 바지에 다 드러나는 나시 그리고 진한 화장으로 강한 인상을 주는, 누가봐도 좋은 여자는 아니었다.
"뭐야, 여기서 뭐해?"
"…알아서 뭐하시게?"
"옆에는? 여자친군가."
"닥쳐 이민혁."
창섭이가 다른 여자와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나는 반에서 나가질 않고 매일 창섭이가 우리 반으로 오는 편이라 창섭이네 반 여자아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또 항상 내 옆에만 있어서 다른 여자와 있는 걸 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생각났다. 창섭이가 내게 고백을 했고, 나는 거절을 했다. 머리가 돌아가길 시작했다. 내가 서운해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얼굴을 했지만 분명 내 얼굴에 티가 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여전히 민혁오빠와 창섭이는 서로를 보며 으르렁댔고, 옆에 있던 여자는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아, 맞아. 빨래 안 걷었다."
"뭐?"
"오빠, 창섭아. 나 집에 가봐야겠다. 밥은 다음에 먹자!"
"야, ○○○!"
숨이 가빠와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오늘 평소엔 느끼지 않는 감정들을 너무 많이 겪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ㅠㅡㅠ... 와써요.. 드디어 친정에 온 기분입니다.... (
노양심이지만 정말이에요.. 여러분들 저 잊지 않아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저번처럼 일주일에 한 번 오고 이런 짓 절대 안하겠숨미다..!!!!
앗 그리고ㅎㅎ... 친절하신 주르륵님께서 사진 파불 문제 해결해주셨네요..!!!
저만 안 뜨는 줄 알았는데 독자님들도 사진이 안 뜨신다길래 그제, 어제 이틀 꼬박 걸려서 짱친 스물 여섯화에 사진 새로 다 넣었는데ㅎㅎㅎㅎㅎㅎㅎ...........
어쨋든 드리고픈 말은 이제 짱친들 사진 안 보이시는 것 없이 잘 보이실 거예요!!
독자님들 혹시 불마크 글 보이세요?! 저는 제 글이라 보이는데.. 불마크 이제 못 쓴다고 들었는데 댓글은 계속 달리더라구용?
그리구.. 염치 없지만 암호닉 새로 받아두 될까요? 암호닉 까먹으신 분들도 꽤 계신 거 같아서 ㅎㅎ..
너무너무 늦었지만 독자님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