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6월 11일
모의고사를 봤다. 수험실에서 보는 시험은 처음이라서 중간,기말고사보다 성적이 안좋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건 아니었다.
한아미는 역시나 못봤다.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서 그러려니 생각했다.
사실 모의고사도 늘 민윤기 대신 봤지만, 다른 사환들에게 들키지 않게 청소구역으로 가서 몰래몰래 시험을 봤다.
처음으로 학생답게 시험을 본 느낌이 들어 기분이 꽤 좋았다.
20xx년 6월 20일
한아미가 내 성적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아까 정호석이 내 성적표를 뺏어 다른 애들한테 내 성적을 퍼트렸다보다.
다행히 한아미가 오늘은 나를 믿어주고 넘어갔다.
20xx년 7월 15일
오랜만에 수업이 없는 여유로운 하루였다.
한아미 덕분에 축제도 가보고, 잔뜩 먹기만 하는 한아미도 보고 재밌었다.
학교로 다시 돌아와서 일하고 있는데, 한아미가 갑자기 물어봤다. 일탈해보고 싶은 적이 없냐고.
갑자기 하고 싶어졌다. 내가 하고 있는 유일한 일탈이.
한아미를 도서관에 두고, 학교 밖으로 나갔다.
그 애를 위해 처음으로 일탈을 했다.
20xx년 8월 1일
새로운 사감이 왔다. 뭔가 많이 수상했다.
괜히 다른 사환들처럼 묻는대로 답해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호의를 거절했다.
20xx년 8월 20일
교실에 들어갔다. 남학생들은 방학이 끝나서 그런지 여학생들과 여자 사환들의 외모에 대해 더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신경을 건드리는 말이 계속 내 귀에 들려왔다.
"한아미?"
"한아미 걔는 너무 마르지 않았냐"
"뚱뚱한 거보다 훨씬 낫지. 그리고 얼굴도 쪼~그마한데 눈도 크고"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래봤자 사환. 어차피 그런애들 엔조이로 즐길 수 있잖아 너희들."
"밖에 나가서 만나는 애들이랑 학교에 갇힌 애들이랑은 뭔가 좀 다르지 안그래?"
"한아미같은 애랑 자면 무슨 느낌일까?"
"걔 한번 불러낼까? 재밌을거 같은데. 해보자. 광란의 파티."
참을 수 없었다. 사과하라고 민윤기한테 말했다.
그러다 사람 많은 데서 결국 얻어터졌지만, 그리고 갖은 비웃음 다 샀지만, 참지 않았기 때문에 후련했다.
20xx년 8월 26일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학생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다 혼나고 욕을 들었다.
동료 사환들에게는 주제 넘게 굴어서 자신들에게 괜히 불똥튀었다고 욕먹었다.
사감한테는 사환관리 못해서 윗선에서 주의하라고 했다며 혼났다.
민윤기의 담임에게는 자기 반 학생 건드렸다고 혼났다.
이사장님한테는 사환이 학생에게 덤볐다고 혼났다. 그리고 그 사건 때문에 민원이 들어와서 입장이 곤란해졌다고 혼났다.
그리고...자신의 아들을 건드렸다고 혼났다.
"네 어미한테 뭐라고 할까. 정국아."
내가 팔려온 애라는 걸 이렇게까지 각인시켜주는 이 학교 이 사람들이 너무 미웠다.
20xx년 9월 1일
어머니한테 말씀드리지 않는 걸 조건으로 이사장님께 받은 벌은 상당했다.
다들 놀랐고, 난 다만 피곤할 뿐이었다.
20xx년 9월 6일
내가 이렇게 살아온 이래로 가장 부끄럽고 가장 미안한 날이었다.
나 살겠다고 한아미를 고된 업무현장으로 내몰았다.
절대로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여자인데, 내가 고생을 시키고 있다.
이런 내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20xx년 9월 7일
의심스럽던 사감이 드디어 일을 냈다.
신고를 하겠단다.
그 사람이 무엇을 목적으로 우리한테 접근해서 TH를 위협하려는진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우리는 이 일에 엮여봤자 하나도 도움이 될 게 없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환들에게 당부했지만, 내 말을 들을 지는 모르는 일이다.
한아미만 그 명부에 싸인하지 않으면 된다.
그 생각만 가지고 여느때와 같은 하루를 보내는데 이사장실에서 호출이 왔어.
"부르셨습니까"
"사감이 수상한 거. 넌 알고 있었니"
"..."
"있는대로 다 말한다면, 수능을 볼 수 있게 해주겠다."
".....수능..말씀이십니까"
"그래. 물론 수능성적이 좋다면 대학진학까지도 지원해주겠다."
그 말을 철썩같이 믿고 이사장님께 모든 일을 다 고했다.
뒤늦게 이사장실을 나와서 확신없는 약속에 바보처럼 넘어간 것에 대해 후회했다.
20xx년 9월 8일
사감이 끌려나가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해져 있는데, 한아미가 왔다.
그 여자애랑 이야기하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
20xx년 9월 9일
한아미가 민윤기와 사귄다는 말도 안되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말도안되는 이유로 한아미를 불러내서 평정심을 갖지 못하고 어찌 된 일이냐며 몰아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민윤기가 그 여자애를 데리고 갔고, 그 날은 어쩐 일인지 한아미를 보지 못했다.
20xx년 9월 10일
늦은 저녁에 자기 몸뚱이만한 쓰레기봉투를 가지고 쓰레기처리장에 가는 한아미를 멀리서 발견했다.
한아미는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건지 제대로 걷지도 않고 비틀거리면서 갔다.
도와줄까 하다가 지금은 붙어봤자 한아미에게 해가 될 것 같아 그냥 돌아섰다.
20xx년 9월 15일
오랜만에 한아미를 보았다.
다가가고 싶었지만 뒤에 바로 민윤기가 쫓아와서 그냥 지나가버렸다.
슬쩍 돌아보니 한아미가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정말 견딜 수 없어 기숙사 계단으로 오라고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갔다.
기숙사 계단에서 한아미가 털어놓은 모든 얘기들과 그 여자애의 속마음을 듣고나니 미안했다.
못난 나 때문에 여러모로 고생하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
그러나 한아미가 민윤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해서 행복했다.
20xx년 10월 12일
한아미가 민윤기한테 꽉 잡혀서 도통 일을 못하는 것 같길래 부담주기 싫어 잠시 미뤄뒀던 내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한아미가 와서 공부나 하라고 밀치긴 했지만.
오늘은 평화롭게 한아미의 뒷모습을 보고 숙소로 돌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20xx년 10월 13일
성적이 잘 나와 기분이 좋았지만, 민윤기에 의해 음악실에서 쫓겨나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한아미한테 또 추근덕거릴게 분명해서 화가 나기도 했다.
그냥 공부하러 가야겠다 하고 음악실을 벗어나려는데,
"어이, 사환"
"예.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학생들, 선생님들이 부르면 사환은 뛰어가서 도움이 필요한 지 여쭤야 한다.
"따라와"
무슨 일인가 싶어 따라갔다.
갈수록 음침한 곳이었다.
"저...이곳엔 무슨 일로"
"윤기가 저 여자애 가지고 놀겠다잖아. 왜 자꾸 방해해서 심기를 건드려 건드리길"
"...."
"사과 안해?"
"...."
"어쭈 말 씹겠다 이거냐?"
뭐라고 해야할지 생각중이었다.
생각이 끝나기 전에 뺨을 수차례 맞았다.
"씨발. 넌 사환이라고 사환. 학교의 노예. 감히 주인님들 심기를 건드려? 수능도 얼마 안남았는데."
"...."
"끝까지 말 한마디 안하네. 그래 어디 살려달라고 할 때까지 맞아봐."
그들이 나를 때리려고 했다. 민윤기와 어울리는 두세명의 학생들이었다.
저번처럼 맞았다가는 수능도 못보고 죽을 것 같아서 도망쳤다.
그 학생들은 몇 걸음 쫓아오다 욕만 하고 더는 쫓아오지 않았다.
분명 다음 날 교실에서 된통 맞겠지만, 최소한 시선이 많은 곳에서는 꼴에 체면챙긴다고 마구잡이로 때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도망쳤다.
체육관에서 한아미를 봤는데, 차마 맞아 부어오른 뺨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걸 또 들키고 싶지 않았고, 눈물이나 흘리는 찌질한 사람이라는 것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나답지 못하게 한아미에게 등을 돌렸다.
20xx년 11월 12일
너무 기쁘다. 실수없이 수능을 만점받으면서 그동안의 고생을 마무리지었다.
한아미가 날 보는 눈빛이 아주 기대감에 가득 찬 눈빛이었고, 놀려줄까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고 좋아했다.
걔도 나도 오늘은 행복했다.
20xx년 11월 13일
민윤기가 한아미에게 같이 외국으로 갈 것을 제안했다.
이젠 당당해질 수 있었다.
수능이 끝났고, 대학을 못 갈 수가 없는 상황에서 나는 이제 TH재단으로부터 떳떳해질 수 있었다.
수능만점자 명단에 올랐는데 사환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못간다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다면, 엄청난 이미지 실추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난 이 사실을 간파했다. 그래서 민윤기한테 이제는 맞설 수 있었다.
천한 사환새끼라는 민윤기의 말은 결국 한아미에게 또 상처가 됐다. 나때문에 그 말을 듣게 한 것 같아 또 한 번 미안했다.
20xx년 12월 2일
한아미에게 다 들켰다.
그리고 난 오늘 한아미에게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다.
엄마가 죽었다? 협박?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기만 한 거짓말이다.
그런 거짓말에 눈물까지 흘린 내 자신을 돌아보니 정말 연기자로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가 돈 때문에 단돈 200만원에 나를 어떻게 해도 좋다는 말과 함께 TH로 팔아버렸다는 그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팔려온 애보단 끌려온 애가 훨씬 덜 창피했다.
한아미가 내 손을 처음 잡았다. 손이 작고 너무 얇아 마치 아기같았다.
난 한아미의 왼손을 잡았다. 힘없는 그 애의 왼손은 내 오른손 안으로 한 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가 기필코 의대에 가려고 했던 이유를 처음으로 한아미에게 고백했다.
20xx년 12월 8일
민윤기가 결국 강제로 나에게서 한아미를 앗아갔다.
한아미가 본 나의 마지막 모습은 목이 졸려 살려달라고 버둥대는 비참한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 애가 떠난 후, 난 죽을만큼 맞고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너무 울어 눈물이 나오지도 않을 만큼. 그만큼 울었고, 아파했다.
-----------------------------------------------여기까지 정국의 일기-------------------------------------------------------
매일 일어나면 전정국은 민윤기의 부하들에게 두드려맞았다.
조금만 어딜 나가려고 해도 탈출을 시도한다면서 말도 안되는 이유로 숙소에서 끊임없이 구타당했다.
"야. 얼굴은 때리지마"
"예."
"다들 멈춰봐. 사진 찍어야 돼."
그들은 전정국을 도서관으로 끌고갔다. 전정국은 제대로 걷지도 못한 채로 질질 끌려갔다.
전정국은 도서관에서 책 읽는 모습, 교실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강요당한 채 사진찍혔다.
숙소에 도착해서 또 이리저리 치이고 있던 전정국에게 민윤기가 보낸 편지라며 사환이 편지를 한 장 가져다주었고,
전정국은 그 편지를 읽었다.
< 정국이에게.
꼭 너가 원하는 의사 되서 너가 나한테 해줬던 그 약속, 꼭 지켜야 해. 기다릴게.
나 보고싶다고 울지 말고. 내 걱정하지 말고. 늘 말했던 것처럼 난 널 믿어. 알겠지? >
힘없는 그는, 또 한 번 오열했다.
글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갑니다. 계속 사랑해주시는 분들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번외는 글 특성상 당연히 있을거고, 원하시는 분들은 신청해주세요!!(번외는 신청하신 분들께만 따로 드리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