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의 실수
평소처럼 실없는 농담을 하며 깔깔거리고 난리였다. 네가 뭔가 만들어왔었는데, 소세지 야채볶음이었다. 소세지만 집어먹는 날 보며 네가 양파를 꾸역꾸역 먹여댔었고. 야, 술안주에 왜 술이 없어. 내 말에 너는 몸을 일으켜 냉장고에서 초록색병 두어개를 가져왔었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텐션이 높았고 소세지는 진짜 맛있었다. '양파도 먹으랬지.' 네 타박만 빼면 진짜 기분이 좋았던 날이었다.
흐흥- 콧노래를 부르는 날 보며 너는 피식피식 웃어댔다. 날보고 돼지라고 하며, 동이난 접시를 내려다보다가 네가 뭔가를 더 가져왔는데. 아 맞다, 구운 오징어였다. 술때문인지 유난히 더워서 티셔츠의 목덜미를 쥐고 펄럭거렸다. 너도 취해서 얼굴이 빨간 주제에 마치 어른인양, 그러게 작작 마시랬지. 어이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통에 마주보고 또 한차례 웃었다.
오징어의 몸통을 주욱, 찢는 널 보다가 그렇게
기억이
뚝-
-하룻밤의 실수
우응, 내 신음과 함께 숨이 트였다. 몇번 뒤척거렸을까 다시 잘 수는 없을 느낌에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욱신거리더라. 아, 얼마나 마신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관자놀이를 한손으로 꾸욱 눌렀다. 아직 눈은 뜨지 못한채로 옆 책상에 손을 더듬어 물컵을 찾는데, 물컵이 없었다. 책상도 없었고.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눈을 겨우 떴을때는 낯선 이불, 낯선 천장, 낯선 가구. 술먹고 집에 잘못찾아들어왔나. 에휴, 술이 원수라니까.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에 인상을 쓰며 침대를 짚고 일어나려는데, 따듯한 감촉이 생경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밑을 내려다 보자, 그건 다름아닌
"..부..승관..?"
부승관이었다. 부승관의 이름을 내뱉고는 나도모르게 입을 턱 막았다. 미쳤어, 혹시라도 깨면 어떡하려고. 조금 찌푸려진 부승관의 눈썹을 보니 실감이 확 나더라, 꿈이 아니라는게. 대충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내 짐을 쓸어모아 가방에 구겨넣었다. 두리번 거리며 빠진 짐이 있는지 빠르게 스캔했고. 아마 수능때 이 긴박감으로 풀었으면 서울대갔겠다, 하는 심정이었다. 살금살금 침대 옆을 지나치려는데 언제 일어난건지 부승관이 내 팔을 잡았다.
"어디가."
"스, 승관아. 나 먼저 가볼게."
"잠깐만, 김.."
무슨 정신인지 부승관에게서 잡힌 팔을 급하게 빼며 허둥지둥 빠져나왔다. 덩달아 다급하게 날 부르는 부승관을 뒤로하고. 그렇게 허겁지겁 현관문을 나서서 우리집에 도착하고 바로 든 생각은 아, 망했다. 이거였다.
"야. 무슨일인데."
저런일이야. 저게 바로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이라고. 멍한 내 표정에 경리는 혀를 끌끌 찼다.
"..있어. 그런거."
"진짜 말안해?"
내 말에 경리는 눈을 잠시 흘기며 내 어깨를 툭 밀쳤다. '너 지금 완전 얼빠진 표정인거 알아? 웃겨.' 하며 경리는 빨대로 휘핑크림을 잔뜩 떠서 입에 털어넣었다. 넌 웃기냐. 나 지금 웃을 상황 아니라고. 재촉하듯 눈을 부릅뜨는 경리를 무시하자 입을 쭉 빼놓고는 툴툴 거렸다. 아무리 너라도 어떻게 말하냐. 술마시고 눈떴더니 기억은 삭제된채로 소꿉친구랑 같이 일어났다고. 하아.. 한숨만 푹 쉬며 카페탁자에 몸을 엎드렸다.
"어? 부승관이다."
"..."
이마가 탁자에 눌릴정도로 탁자에 꾸욱 붙었다. '야, 부를까?' 묻는 경리의 말에 경리의 손목을 꾸욱 눌렀다.
"야, 아파!"
"부르지마라."
"왜, 갑자기."
"있어. 그런게."
"..성격 진짜 이상해."
아, 거참 엄청 툴툴거리네. 오만상을 쓰며 경리에게 눈치를 주자 경리는 입을 꾸욱, 다물고는 다시 빨대를 물었다.
"갔어?"
"뭐가."
"아, 부승관 갔냐고."
"간지가 언젠데 뒷북이야 진짜."
"시끄러워. 애가 좀 고분고분한 맛이 없어."
"..지는."
갑자기 부승관은 왜 신경쓰고 난리. 다시 사춘기야? 비꼬며 던진 경리의 말에 이마에 핏줄이 선게 느껴졌다. '다 그런게 있으니까 재촉하지마!' 내 말에 경리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왜 저렇게 웃어. 눈을 흘기며 얼음을 아그작아그작 씹었다. 아, 속 시원하다. 식도로 찬얼음이 쑤욱 내려가는 걸 느끼면서 후우- 크게 숨을 내쉬자 경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깜짝이야. 이건 또 무슨 자신감. 각질제거 했다고 자랑하는 거야?" "..." "알았어. 농담." "..너말이야." "어." "드디어 부승관을 향한 네 마음을 알게됐다던가?" "미쳤어, 진짜." 내가 무슨 부승관을 좋아해. 아님 말구. 시시하게 끝난 이야기에 남몰래 가슴을 쓸었다. 하여간 박경리 쟤는 평소엔 둔하다가 가끔 예리하단 말이야. 아무렇지않은 척 다른 얘기로 넘어가자 경리는 또 덥석 물고는 신나게 씹었다. "맞지. 그선배 일부러 조장 안한거라니까. 나 지연이랑 따질뻔 했는데 참았잖아." "잘했어. 그 선배 소문도 구리고 괜히 잘못 건," 한창 경리와 한선배를 까고 있을때였다. 조별과제 같이 하기 싫은 순위 1위쯤 될까.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좀 남아 수다를 떨고 있을때 갑자기 턱- 내 어깨위에 올려진 손에 말문이 막혔다. 왠지 불안한 기운에 고개를 느리게 돌렸을때는 "김여주." "..." "얘기 좀 해." 불안한 예감이 적중했고, 예상했듯 부승관이었다. "..무슨?" "..." 조심스레 모르는 척하며 '무슨?' 뜸들이다 꺼낸 내 말에 부승관은 어이없는듯 '허.' 작게 웃었다. "너야말로 알텐데. 내가 무슨말을 할지." "잘 모르겠어. 내가 이따 다시 연락," "그럼, 여주야. 여기서 말할까?" "...." 당했다. 눈을 흘기며 핸드백에 짐을 쓸어담는 내 모습에 경리는 이상한 눈빛을, 부승관은 알듯말듯한 표정을 보냈다. "김여주 너 어디가. 부승관 넌 얘 왜 데려가." 눈을 동그랗게 뜬 경리. "..이따 내가 연락할게. 미안." "어어.. 그래, 뭐." 경리는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분명 속으로는 궁금해 미쳐할게 뻔했지만. -하룻밤의 실수 "할말이 뭔데." 부승관이 데려온 곳은 인적드문 골목길이었다. 어지간히 급해서였는지 대충 두리번 거리다가 날 끌고는 골목에 밀어넣었다. 둘이 있으니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눈을 내리깔고 무심히 묻는 내 말에 부승관은 대답보다 한숨을 먼저 쉬었다. "..왜 자꾸 나 피해." 생각외로 식상하다면 식상할 물음이었다. "그런 적 없어." 고개를 들고 대답했지만 마주할 자신은 없어 눈은 왼쪽을 향한 채였다. 비켜나간 초점에서는 부승관이 혀로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거짓말치지마." "..." "너 아까도 카페에서 나 피했잖아." "아닌데." "..아까 찾았는데 박경리가 가라고 손짓해서 간거야." 경리 아까는 생각외로 신경써줬구나. "피하지마." 부승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어젯밤일때문에 그래?" "..." 들었던 고개를 다시 푸욱 숙였다. "김여주." "그럼?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 "나도 뭘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단말이야. 어차피..!" "..어차피?" "서로 의미없는 일이었잖아." 답답했다. 기억도 안나지만 알것도 같은 어젯밤일이 가슴 한복판을 무겁게 짓눌렀다. 생각과는 다르게 날카롭게 쏟아지는 말에 당황한건 마찬가지였다. 전하고 싶은건 분명 이게 아니었는데. 아랫입술을 꾸욱 물었다. "그래 그럼." "..." "없었던 일로 하면 되겠네." 쿵- 가슴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발밑으로 떨어졌다. "어차피 둘다 의미없는 일이었던 거면. 어젯밤도, 오늘아침도 전부다 없었던 일로 해." 궁궁- 가슴은 불안한 리듬으로 다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