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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부터였을까,
잠을 자려 침대에 누우면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괜히 오싹해져 불을 켜고 이곳저곳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
음, 이상해
+
"세봉아- 너 어젯밤에 부엌 찬장 열었었니?"
침대에 누워 살랑살랑 불어오는 여름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던 도중,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부엌 찬장?"
"응"
부엌 찬장이라, 평소엔 잘 열어보지도 않는,
설탕이나 말린 과일, 각종 양념들이 자리한 곳
"아-니"
"그래? 이상하다"
"왜?"
한숨을 내쉬며 내뱉는 엄마의 말투에 읽던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방 밖으로 나갔다.
더운 여름이라 그런지 발바닥에 쩍쩍 달라붙는 장판.
"아니, 양념들이 다 넘어져있어서"
엄마의 말에 부엌 찬장을 열어보니
자리를 잃고 넘어져있는
소금, 설탕, 후추.
"엄마가 어제 닫을때 너무 세게 닫은거 아냐?"
"그런가?"
"그런가보지 뭐, 여기 훔쳐갈게 뭐가 있어-
도둑 아닐거야. 걱정하지마"
"알겠어"
작년, 살던 집에 도둑이 든 이후로,
엄마는 부쩍 물건의 위치나 개수에 집착하셨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진정시키는 건 나의 몫.
설마, 도둑이 양념을 훔쳐가겠어?
+
엄마를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읽던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들.
아, 정말 도둑이면 어쩌지?
읽던 책을 얼굴에 올려놓곤 눈을 감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적당히 내리쬐는 햇볕.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을까,
잠에 들기 직전, 귓가에 들리는 조그마한 목소리,
"야, 쟤 자는데?"
"오키, 그럼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저기 책상에 있는 사탕 끌고 오기 하자"
"아, 싫어- 저번에 내가 했잖아"
"야야, 조용히 해! 쟤 깨면 어쩌려고!"
"야, 쟤 자."
아주아주 조그마한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알 수 있어.
저건 도둑이야.
몸을 뒤척이는 척하며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리고,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아무도 없어.
분명히 목소리는 두명의 목소리였는데?
다시 숨을 죽이고 이불의 틈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이게 뭐하는거야. 이젠 환청도 들리나보다.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걷어차곤 책상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책상 끝에 가지런히 쌓여있는 책을 뒤적거리다 깨달은,
사탕이 없어졌다.
너무 놀라 입을 막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디선가 들리는, 툭. 하는 소리
그리고 쌓여있는 책을 옆으로 조심스레 밀자,
똑같이 입을 막고 날 보고 있는.
아주 조그마한 사람.
"끄아아아아아아!!!"
+
"#세봉아 무슨 일이야!"
내가 소리를 꽥꽥 질러대자 엄마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
그리고, 더 다급하게 날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조그마한 사람.
".......어?"
"무슨 일이야"
"..............책!...책을 읽는데, 너무 무서운 장면이 나와서"
"........피터팬에서?"
엄마가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피터팬 책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그..있잖아, 후크선장이 악어한테 손 먹히는 부분! 그게 너무 잔인해서....하하.."
"자꾸 엄마 놀라게 할거야?"
"............미안"
"잘 자고 있었는데 정말,"
엄마가 나를 장난스레 노려보곤 밖으로 걸어나간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긴장이 풀려 의자에 풀썩, 주저 앉아버린 나.
그리고, 너무 놀랐었는지 사탕 위에 걸터앉곤 마른 세수를 하는
아주, 작은 사람
한참을 그 광경을 살펴보다,
그 작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그 사람의 눈동자.
그리고, 내가 먼저 조심스레 꺼낸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아니예요"
그리고 찾아온 긴 정적
사탕 껍질을 만지작거리는 아주 조그마한 손
".......그.........그 사탕 저한테 엄청 많아요"
"............"
"더 드릴까요?"
급해진 마음에 사탕을 꺼내려 침대옆의 서랍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손에 가득 사탕을 들고 와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자 여ㄱ........."
사라진 그 사람.
그리고 없어진 사탕까지.
+
어느새 밤이 찾아왔고,
여전히 책상 위에 사탕을 가득 놓아둔 채로 침대에 누웠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아까의 기억
이리저리 뒤척이다 배게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헛것을 본건가?'
괜히 신경이 쓰여 복잡해지는 머리.
한참을 눈을 말똥거리다 또다시 옆으로 돌아누웠다.
옆으로 돌아눕자 보이는,
"저기........"
서랍 위에 올라서있는 아까 그 사람.
"........!"
"아깐 미안했어요, 친구가 겁을 먹어서"
"................"
"근데요, 이거 딴 사람에게 말하면 안돼요..제발.."
"................."
"소인들은 인간에게 들키면 떠나야하거든요.
근데요, 여기는요 저희 부모님이 힘들게 찾아낸 안전한 공간이라서....."
"........그럴게요"
"하, 다행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등으로 이마를 닦으며 내 안경닦이 위에 드러눕는 그 사람.
"근데요, 이렇게보니까, 인간은 참 예쁘네요.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소인의 입에서 나온,
"예쁘다구요?"
"예, 인간은 참 아름다운것 같아요"
칭찬.
방 불이 꺼져있어서 다행이야.
켜져있었다면 빨개진 얼굴이 보였겠지.
"내 이름은 이석민이예요. 그쪽은요?"
여전히 안경닦이 위에 누워선 천진난만하게 묻는 그 사람
"인간한테 들키면 안됀다면서요"
"그쪽은 다르잖아요, 날 구해줬고, 또 사탕도 잔뜩 줬고"
석민이 사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푸흐흐 웃었다.
그에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
"난 김세봉이예요"
"그렇구나, 아. 세봉아. 나 앞으로 밤마다 여기 와도 돼요?
마음 맞는 사람을 찾은 것 같아 기뻐요"
그리고 수줍게 웃으며 건네는.
"그럼요"
+
"엄마, 혹시 클립어디있는지 알아?"
석민을 만난지 며칠이 지났을까,
어느새 난 석민을 위한 여러가지 물건들을 서랍 위에 준비해놓곤 했고,
엄마는 그에 의아해했지만,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
내가 그런 물건들을 잔뜩 준비해두면,
석민은 고맙다는 표시로 내 손가락에 입을 맞춰주곤 했고,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 둘의 볼은 잔뜩 빨개지곤 했다.
그래, 우리는 사랑해선 안되는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했던거다.
머리로는 그걸 알면서도, 한번 시작된 마음은 주체할 수 없었다.
"석민아, 오늘은 뭘 했어요?"
"오늘은, 어제 세봉이가 준 클립으로 친구랑 썰매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자랑스레 이야기 하며 활짝 웃는 석민.
"다행이다. 또 뭐 필요한건 없어요?"
"이제 없어요"
"부모님한테는 잘 둘러댄거죠?"
"그럼요. 걱정하지마요"
그리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행복한 시간.
+
한참을 행복하게 석민과 지내던 나날,
내가 석민과 대화하는 것을 우연히 들은 엄마는
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고,
그런 엄마의 눈엔 안경닦이 위에 누워있던 석민이 비쳤다.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빠지셨고,
그런 엄마를 일으키고 나니, 석민은 이내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너, 아까 그거 뭐야, 엄마가 잘못본거지..?"
"..............."
나는 잔뜩 놀라 묻는 엄마에게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너와 헤어지게 되는게 무서워서,
너를 다시 볼 수 없게 될까봐.
그리고 그런 나의 걱정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석민은 더 이상 내 밤이 되어주지 않았고, 내 밤은 다시 칙칙하게 물들어갔다.
석민을 기다리며 챙겨놓은 물건들과
고이 접혀있는 안경닦이는 서랍 위에서 먼지만 쌓여갔고,
시간은 금새 흘러, 어느새 난 성인이 되어버렸다.
+
책상에 앉아, 그를 처음 만났던 3년 전의 그 날 처럼,
피터팬을 펼쳐보았다.
눈물을 꾹꾹 참으며 읽다가, 이내 터진 눈물
그러면 안 되는걸 아는데, 네가 너무 보고 싶어.
한참을 엉엉 울다가 툭,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 눈 앞에 보이는 건.
![[세븐틴/이석민] 소인 이석민 X 인간 너봉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5/12/08/23/375c7e3ea2c29dc381c5278302003c93.gif)
"나 보고 싶다고 이렇게 울면 어떡해,
나도 너 잠들었을때만 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때 내가 주었던, 이미 하얗게 곰팡이 펴버린 사탕을 발치에 내려놓곤 해사하게 웃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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