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끝이네." 새파랗게 맑은 하늘 아래, 봄바람에 꽃잎들은 흩날렸다. 따뜻한 기운이 넘쳐났고 푸른 잔디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이별보다는 만남에 더 어울리는 날씨가 지금 이 상황과 뒤섞여 묘하게 느껴졌다.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인체 신발코를 바닥에 비비고있는 준면을 바라보며 여자는 말했다. 잘있어, 밥 잘 챙겨먹고. 발장난을 멈추고 문득 올려다본 여자의 얼굴이 햇빛을 등져 까맣게만 보였다. 자연스레 찌푸려지는 눈을 가늘게 뜨자 여자의 뒤로 쏟아져내리는 햇살이 눈부셨다. 준면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고마워 수정아."
입술사이로 나온 잔뜩 뭉게진 말에 여자는 가볍게 웃었다. 뭐가 고마워, 내가 더 고맙지. 여자의 다정한 목소리에 준면은 안도했다. 준면의 시선이 수정의 하이힐로 향했다. 분명 제가 선물해준 구두를 즐겨신던 수정은 언제부턴가 다른 구두를 더 곁에 두고있었다. 서로를 열렬히 사랑해서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막상 다른남자에게 간다고 하니 조금 섭섭한 느낌이 드는건 사실이었다. 준면의 시선이 오래도록 빨간 하이힐에서 머물렀다. 무심코 느낀거지만 지금보니 수정은 유독 빨간색이 참 잘 어울렸다. 수정의 하얀발을 감싸고 있는 반짝이는 빨간 하이힐을 의식한 준면이 실소했다. 8년간의 결혼생활을 충실히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수정에게 무심했음을 영락 없이 증명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은 일이었다. 수정씨, 잘 끝났어요? 둘 사이의 정적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준면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 어느새 수정의 빨간구두 옆에는 단정한 갈색 로퍼가 다가와있었다.
"응, 다 끝났어요." "잘 끝나서 다행이다. 준면씨, 정말 감사해요."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준면이 고개를 들었다. 환하게 웃고있는 남자의 모습에 자신도 살짝 웃어보이는 준면이었다. 어려운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요. 남자의 선한 목소리와 인상에 준면은 안심했다. 적어도 수정이가 나와 있을 때 보다는 행복하겠구나. 수정의 어깨를 감싸고있는 남자의 손길은 다정하다 못해 따뜻하게 느껴졌다. 수정이, 잘부탁드려요. 준면의 말에 남자의 눈이 곱게 반달로 접혔다. 네, 수정이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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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열씨, 이만 가요." "그래 얼른 가봐. 오늘 신혼집 들어간다며." 조수석 창문이 시원하게 내려가며 찬열이 준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만 갈게요, 준면씨 다음에 꼭 놀러오세요. 차는 출발했고, 준면은 대답없이 웃어보였다. 어느새 저 멀리가버린 수정의 차가 점처럼 작아져갔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준면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메탈재질의 시계는 준면이 예상했던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늦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준면이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평소보다 서두른 덕에 준면은 늦지 않고 가게에 도착할수있었다. 셔터를 올리고 가게오픈 준비를 시작하는 준면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가게의 바닥을 쓸고 닦느라 몽땅 열어 놓은 창문 너머로 따가운 봄 햇살이 밀려들어왔다. 준면의 꼼꼼한 손길을 거치며 카페는 점점 활기를 띄어갔다. 로스팅 머신을 점검하려던 찰나, 탁자위에 올려둔 준면의 핸드폰에서 진동음이 울려퍼졌다. 테이블과 의자를 세팅한 후 였다. 서둘러 핸드폰을 들어 수신자를 확인한 준면의 표정은 썩 좋지못했다. 요란스럽게 진동하는 핸드폰 액정에 비친 변백현 세글자에 준면은 잠시 고민했다. 조금후면 손님들이 들이닥칠 시간이었다. 아직 준비를 덜 끝낸 가게안을 쓱 훑어 보던 준면이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바쁠때만 골라 귀신같이 전화하는 백현이 오늘따라 더 야속하게 느껴졌다. 액정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눈치만 보던 준면의 손이 마지못해 통화버튼으로 향했다. "여보세요." '김준면, 어떻게 됐어? 잘 끝났어?' "어. 잘 끝났어." '와 그럼 김준면 다시 솔로 복귀한거야? 돌싱?' "용건뭔데. 나 지금바빠 백현아."
에이, 딱딱하게 왜그래. 익살스러운 백현의 말투에 준면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장난스러운 백현의 목소리에 울컥 짜증이 밀려왔다. 백현아, 가게 오픈시간 한시간도 안남았어. 급한거 아니면 전화끊을게.
'어, 어? 야 준면아 잠깐만!'
백현의 다급한 목소리에 종류버튼을 누르려던 준면의 손이 멈췄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어버리면 가게 오픈시간을 맞추지 못 할게 뻔했다. 준면이 지끈거리는 두통에 한숨을 쉬며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눌렀다. 뭔데, 얼른 말해. 준면의 짜증에 백현은 슬슬 눈치를 봤다. 준면의 재촉에 백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끝을 흐렸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준면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말할까 말까 고민하면서도 어느새 백현의 입술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음 준면아, 세훈이 있잖아. 백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대답하던 준면의 몸이 한순간 굳었다. 오세훈? 세훈이가 왜, 딱딱하게 굳은 준면의 목소리에 우물쭈물거리던 백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훈이 한국 돌아온지 한달 쯤 됐나봐.' "..." '이번에 한국지사로 발령났는데 아예 정착한데.'
준면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달싹거리는 입술은 아무 말도 뱉어내지 못한채 굳어버렸고, 뒤죽박죽 엉킨 생각들은 정리되지 못한 채 머리속을 붕붕 떠다녔다. 김준면, 듣고 있어? 준면아! 준면이 대답이 없자 당황한 백현이 계속해서 준면을불렀다. 탁자를 닦던 행주를 손에 쥔채로 멍하니서있던 준면이 이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준면은 답답하기만했다. 얼굴을 쓸어내리자 푸석해진 피부가 손 끝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먹먹해져오며, 이상하게도 목구멍이 시큰한게 꼭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백현아 내가,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잔뜩 떨리는 목소리의 준면이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1분 34초, 짧게 오고갔던 대화의 시간은 깜빡이는 액정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물끄러미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준면의 머리위로 따듯한 봄볕이 내려앉았다. 온화하고 따듯한 세상과는 달리 준면에게 오늘 하루는 괜찮은척하기엔 너무 힘들게만 느껴졌다. 잔뜩 엉켜버린 생각들을 정리하며 준면은 굳어서 뒤틀린 입가를 매만졌다. 세훈이가, 돌아왔구나. 준면이 손가락을 차례대로 헤아렸다. 하나, 둘, 셋, 넷.. 천천히 구부러진 손가락은 어느새 전부 곱게 접혀있었다. 준면은 눈을 감았다.
그 날로부터 벌써 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있었다. 기억의 저편으로 물러나있던 청춘의 끝자락은 다시금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