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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민윤기는 여전하다
이른 봄 바람이 살랑이자 박지민의 흑갈색 머리칼이 흩어지고 반듯한 이마가 약간 드러난다. 무려 바람도 도와주는 박지민의 잘생김이라고 생각했다. 자꾸만 열릴 듯 말듯한 박지민의 입술을 보며 슬슬 애가 타기 시작하는데, 박지민이 내가 선 쪽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오다 멈추더니 입을 연다.
“ 나여주 너 “
“ 나 좋아하는 거, 아니지? “
그리고 정적.
박지민의 어두운 갈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굳어 있었다. 마치, 아닐꺼야 그치? 라고 묻는 듯해서 마음이 조금 아려왔다. 내가 처음 박지민을 마음에 담은 순간부터 수 없이 상상했던 것은 고백하는 장면이 아닌 박지민이 내게 등을 돌리고 우리의 시간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장면이었다. 박지민에게 내 마음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15년 그 안에서 커가던 작은 아이들 그리고 함께 시간을 보내던 소년 소녀를 배신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건 박지민에게 이렇게 어이없이 들킬줄 몰랐을 때의 얘기다.
“ 맞는데. 너 좋아해. “
“ 우리는 항상 서로가 당연하잖아. 난 매일매일 니가 연락 오는거 답해주려고 목숨 걸고 몰래 폰 만지는데, 넌 그거 당연하게 생각하잖아. 그리고 넌 내가 집에 혼자 있으면 새벽에 무서워하는거 아니까, 다음 날 시험이라도 새벽까지 있다가고. 근데 그게 나한텐 당연하거든. 우리 친구라기엔 이상하지 않아? 난 이상하다고 생각해. "
...그리고 박지민에게 들킨 지금도, 고백할 생각은 전혀 없다.
" 그러니까 우리는 피를 나눴다고 생각한다 박지민. 널 형이라고 불러도 되겠니? "
“ 아... 장난하지 말고. “
그 짧은 순간동안, 이 자리에서 고백하고 혹시라도 모를 너와 함께 달달한 시간을 보내는 나를 상상해본건 맞다. 그래서 박지민에게 미안하다. 박지민은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을 한번 깜빡였다.
“ 질문부터가 장난 아니었음? 혹시 진담이야? 너 약했어? “
“ 그래 아니지?! “
박지민이 너털 웃음을 지으며 내가 서있는 곳으로 다다다 뛰어왔다. 아니- 순간 나도 내가 미친 줄 알았어. 근데 너도 알잖아. 내가 어릴 때부터 누가 누구 좋아하는 거 빼박캔트로 때려 맞추는 거. 나 좋아했던 여자애들도 눈만 스캔 하면 다 맞추잖아. 근데 요즘 니가 그런 애들이랑 겹치는 거야... 랩하듯 말했다. 나는 박지민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상한 놈 보듯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지금 내가 느껴야할 비참한 기분은 나중으로 미뤄야한다. 박지민은 또 아무렇지 않게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특유의 섬유유연제 냄새가 끼쳤다.
“ 우리 여주, 혹시 무의식적으로 나 좋아하는 거 아님? 시나브로 같은 거. “
“ 미쳐도 곱게 미쳐. “
“ 좀 많이 미친 것 같지? “
“ 응. “
내가 미칠 것 같다, 내가!!!!!!!!!!!!!!!!!!!! 어떻게 알았지…? 박지민이 눈치가 빠른 편인 건 맞지만, 우리 사이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을줄 알고 방심 했던게 화근인 것 같다. 야 조수연 내가 고백만 안하면 괜찮다며 이 샛기야... 나는 박지민이고 뭐고 주저앉아서 울고싶었다. 내 상황을 텍스트로 정리하자면 짝남은 내가 자길 좋아할까봐 걱정했던 거다. 나처럼 정신력 강한 여자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고싶다. 쉬지않고 재잘거리는 박지민의 입을 봤다. 근데 형은 싫어. 오빠라고 해줘, 진지하게 말하는 박지민을 빤히 보다가 진심으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래 박지민. 너랑 나는 앞으로도 부랄친구 하자. 내 마음은 내가 알아서 정리할테니까 조금만 더 속아줘.
딱 이틀만 울었다. 그 후로 나는 최대한 예전처럼 박지민을 대했다. 물론 박지민을 향한 내 마음이 예전같지 않아서 예전 기억들을 애써 끌어 올리고 연습하고 흉내를 내면서 말이다.
고등학교를 빨리 졸업하고싶은 이유 중 하나가 체육이었다. 다른 학교는 체육시간에 자습을 한다는데 이 학교 체육 선생은 고삼인 우리를 굳이 바득바득 끌고나와 체력을 길러준다며 운동을 시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래 달리기를 시키는건 좀 오버 아니냐?!! 입안으로 체육선생을 잔뜩 씹으며 마지막 바퀴를 달리는데,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돌았다. 나는 교실로 걸어갈 힘도 없어서 스탠드에 널부러졌다. 가자며 나를 툭툭치는 반 애들에게 먼저 가라고 한 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 ...아, 먼지!!!!!! "
" 야야야 나여주! 대박!!! "
" 아씨 니가 코뿔소야? 그냥 좀 걸어다녀! "
내가 여기 있는건 어떻게 알았는지, 한손에 빵을 쥔 김혜림이 운동장을 달려오며 일으킨 흙먼지에 나는 기침을 했다. 여전히 누운채로 팔을 휘두르면서 먼지에서 벗어나려 하는데 김혜림이 자꾸만 대박대박, 중얼거리는 거다. 말을 해 말을. 작은 것에도 호들갑 떠는 김혜림을 잘 알아서 뭐 때문에 저러는지 정말 하나도 안궁금했지만 예의상 반응해줬다. 김혜림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누운 계단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 내가 매점 갔다 오는 길에 뭘 봤는줄 알아?! "
" 몰라... 신상 빵이라도 봤니 "
" 민윤기 봤어. "
심드렁하게 머리카락에 묻은 모래 알갱이를 털던 내가 벌떡 일어나 김혜림을 멍하게 쳐다봤다. 민윤기? 나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민윤기. 정말 오랜만에 들은 이름이다. 그 날 이후 누구도 그 이름을 꺼낸적이 없었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없는 사람과 같았다. 가끔 소식이 궁금했던 건 어디서든 잘있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었지 내 눈 앞에 나타나주길 바란 건 아니었다. 김혜림은 내 눈치를 보며 자초지종 설명해주었다.
" 걔랑 다른 선배들 학교 왔더라. 우리 학년 남자애들이랑 얘기하고 있는거야. 난 오도가도 못하는데 마침 너희반 애들 지나가길래 너 어딨냐고 물어봤어. 알려주러 온거임. "
" 근데 나 민윤기랑 눈 마주쳐서 도망왔어. 설마 따라오진 않겠지? "
" 설마 따라왔는데. "
완벽히 잊은줄 알았던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김혜림이 숨을 크게 들이키며 입을 멈추는걸 보면 나만 들은건 아닌 것 같다. 현기증이 나는 걸 느꼈다. 아까 바로 양호실 가서 두통약 챙겨 먹을껄. 김혜림 뒤로 오후의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운동장에 민윤기가 서있었다. 살은 더 빠진 모습이었고 머리는 탈색을 했는지 은회색 빛이었다.
내 기억에 남은, 운동장에 서있던 수 없이 많은 민윤기처럼 하얀 민윤기가 웃었다.
“ 나여주. “
민윤기는 여전하다. 내가 좋아했던 입 꼬리에 생기는 조그만 동굴도,
“ 나 뻥 차놓고 잘 지냈어? “
아직도 본인이 내게 차인거라 생각하는 것도.
쾅-
갑작스런 굉음에 나는 빨래를 널다말고 바구니를 떨어뜨렸다. 손으로 벽을 짚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박지민 저게 남의 집 현관문을 부술 작정인가. 안그래도 몸도 기분도 별로라 박지민이 보고싶어서 치킨 사와라 떼쓰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박지민이 와준 것 같다. 만약 손에 치킨까지 들고있으면 옹동이 두드려줘야지. 나는 남은 빨래를 아무렇게나 널어 던지고 나갔다. 박지민은 거실에 서서 나를 찾는듯 두리번거리다 큰방에서 나오는 나를 봤고 눈이 마주쳤다.
근데 지민이 눈이 왜 저렇게... 갑자기 박지민이 내 손목을 낚아채서 끌어냈다. 하마터면 앞으로 엎어질 뻔했다. 미쳤나 왜이래.
" 너 민윤기 만났냐? "
"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아? "
" 왜 말안했어? "
" 어떻게 알았냐고. "
" 김태형 형이 민윤기 친구잖아. 학교 같이갔대. 됐냐? "
만났으면 그게 뭐 어쨌단 거야. 박지민은 내 상태를 살피는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나를 과소 평가하고 있는게 틀림없다. 오늘 내가 민윤기 때문에 종일 우울했던 건 사실이다. 기쁠리 없잖아. 또 민윤기의 등장이 상처인 것도 맞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박지민을 보고싶은 마음이 더 컸고 만약 박지민과 시간을 보낸다면 쉽게 털어버릴 수 있는 오늘의 안 좋은 일진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박지민이 저렇게 예민해져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예민해졌다. 어둡고 우울한 기억들이 순식간에 나를 덮친다. 그 때의 내가 떠오른다. 나는 소파에 힘없이 앉았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 ...아니지? "
대체 뭐가 아니냐는 거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면 내 감정 상태와 박지민을 향한 마음까지 다 털어놓을 것만 같았다. 수연이 말이 맞다. 마음은 어린애와 같다. 박지민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아무리 예전처럼 대하려고 애써도 자꾸만 그 어린애가 불쑥불쑥 튀어 나왔다. 튀어나와서는 나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민윤기는 나에게 영향력이 별로 없어. 사실 나는 너 때문에 힘들어 지민아, 이 말을 지민이에게 다 쏟을 것 같아서 해명하려는 입을 다물었다.
" 맞으면. "
" 뭐? "
" 맞아도 그게 뭐 대수라고 그래? "
" 대수? 너 또 그 때처럼- "
" 그 때 얘기 꺼내지마! "
" 그 때랑 똑같은 사람이야. 착각하지마. "
내가 언성을 높이자 박지민은 정말로 화가 난 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그 사람을 보호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민이는 화낼 때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다. 눈꼬리가 서늘하게 올라가고 눈빛이 탁해진다. 착각은 박지민이 하고있다.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냥 너만 평소처럼 있어주면 되는데. 너는 자꾸 나를 약한 애로 보니까.
" 착각 아니야. "
" ...그래. 아니면 좋겠다. "
박지민은 내가 앉은 소파 끝에 털썩, 앉았다. 저렇게 화났으면서 집은 나가지 않는다. 나는 소파에 웅크려 누워서, 박지민이 집 이곳 저곳을 정리하는 소리를 들었다. 차라리 나가주면 편하게 울 것 같은데 내 곁을 떠나지 않는 박지민 때문에 울 수도 없었다. 박지민이 나가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있다.
어느새 잠이든 나는 배를 긁는 묵직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이 시기즈음 미리 챙겨 먹어야 했지만 까맣게 잊고있던 생리통 약을 떠올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속을 칼로 갈기갈기 찢는 고통에 배를 붙잡고 소파에서 굴러 떨어졌다. 언제 덮어줬는 지 알 수 없는 묵직한 이불이 딸려 내려왔지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약은 만약을 대비해 항상 침대 옆에 뒀는데 거기까지 갈 수 없다. 손을 더듬어 폰을 찾아봤지만 빨래를 널기 전 방에 두고온게 떠올랐다.
" 지민..아... 지민아... "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박지민의 이름을 불렀지만 집은 어둡고 조용했다. 몸을 뒤틀며 카펫을 긁고 이불을 쥐어 뜯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소리도 안 나온다. 몇 년간 잘 챙겨먹던 약을 잊고 있었다. 요즘 스트레스를 받아서 날짜까지 앞당겨진 것 같다. 밑이 빠져버릴 것 같은 아픔에 정신을 놓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을 느꼈다. 순간 들었던 생각은 그거였다. 이렇게 아픈데, 이대로 기절하면 죽지 않을까? 너무 무서워져서 이를 악물고 바닥을 기었다. 눈물이 터져 나와서 앞을 전혀 볼 수가 없다. 한참을 정신없이 기었는데 손 끝에 닿은 것은 차가운 타일 바닥이다. 욕실이구나.
" 흐... "
마지막 힘으로 몸을 틀었다. 어두운 욕실 천장을 올려다 봤다. 순간 물이 쏟아진다. 따뜻한 물이라서 다행이다. 찬 물이면 더 빨리 죽지않을까.
잠이 들었다 깬건지 꿈인지 모르겠다. 찰박찰박 물소리만 들리는데 뿌옇게 흐린 눈 앞에 지민이가 있다. 축늘어진 나를 일으켜 앉혔다. 교복 마이를 벗어 내 몸 위에 덮어주는데 순간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박지민의 교복 가슴께에 달려있는 플라스틱 명찰의 귀퉁이가 부서진게 눈에 들어왔다. 아까 본 거다. 어제까진 멀쩡했거든. 좋아서 베시시 웃음이 나왔다.
몸을 한번 감싸오는 지민이 팔이 따뜻하다고 느끼며 가까워진 얼굴의 턱선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눈에 담았다. 지민아. 내 허리와 다리를 안아 들려던 손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눈이 나를 향했다. 쌍꺼풀 없이 단정하게 뻗은 눈이 예쁘다. 박지민 얼굴은 눈이 다해먹어. 좀 더 가까이 보고싶어져서 두 팔을 뻗어 지민이 목을 끌어당겼다. 지민이의 속눈썹에도 그 밑을 따라 내려가 볼에도 또 입술에도 물이 맺혀있다. 박지민 입술. 꼭 한번 눌러보고 싶었던 입술이라 손가락 끝으로 건드렸다. 내 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차가워서 눈을 한번 느리게 깜빡였다.
꿈으로착각하는척
키스하고싶다
정신이 몽롱해진 나는 가감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박지민 얼굴 중 눈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입술을 물끄럼 바라봤다. 할까말까. 따뜻한 손이 내 볼을 감싸오기에 눈을 마주하는데 지민이의 눈이 나를 가득 담다가 내 입술로 내려왔고 그 다음엔 입에 입을 맞춰온다. 느리게 감기는 박지민의 눈을따라 나도 눈을 감았다. 우리는 물기가 가득해서 미끌거렸다. 내 손바닥 안에 박지민의 머리칼이 들어왔다. 박지민이 절대 이럴리가 없어서 꿈인 것 같기도했다. 몸에 열이 잔뜩 오르고 심장이 쿵쿵거린다. 꿈이 이렇게 디테일한가. 곰곰이 생각해보려는데 머리가 무거워지고 그 순간 다시 아득하게 뒤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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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을 달리는 진도 빼기!!! 2 위험한 남자 윤기등장 빠밤 3 어떤 독자분이 눈치 빠른 남주라 좋다하셨는데...... 실망시켜서 미앙해요...... 그치만 난 키스로 보답했다(?) 4 제 친구가 저렇게 생리통을 겪는답니다8ㅁ8 다들 아프지 마세요 내 허락없인 아무도 아플수없써 |
| 암호닉 '3'♥ |
0103 귀찌 낫띵라잌방탄 내손종 달달한비 동상이몽 드라이기 라온하제 멜랑꼴리 맴매때찌 메로나 모카 미스터 민윤기 민윤기다리털 배고프다 뱁새☆ 복동 빨강 뿌링클 뿡뿡99 소진 시레 연이 오월 아조트 일요일 정꾸기냥 주지스님 지금당장콜라가먹고싶다 지니 지민아좋아해 지민이똥개 천하태태평 청보리청 침침럽 쿠키앤크림 하얀레몬 황토색 |
정말 감사해요우ㅠㅠ 글이 안써질땐 변태처럼 독자님들 댓글을 보고보고또봐요. 독방에 추천해주셨던 분도 고마워요. 다들 사랑해요;ㅁ;
그리고 피켓팅이 드디어 내일이네요 다들 선예매 성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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