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열은 오랜만에 찾아온 준면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준면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찬열이 내온 커피를 마시며 안부를 물었다.
"벌써 10년이나 지났어. 이제 청승 그만 떨고 뉴욕으로 오지 그래." "안 돌아가. 뉴욕은 지긋지긋해."
찬열은 준면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벽난로 위의 사진 액자를 만지작 거렸다. 준면은 그런 찬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밝은 그를 이렇게 어둠으로 몰아넣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준면은 테이블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찬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고한 준면의 저 태도가 짜증나고 가증스러웠다.
"너는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왜 안 찾아왔어?" "굳이 찾아가야 할 이유도 없었잖아?"
준면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찬열을 쏘아붙였다. 찬열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굳었다. 준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수가 너 걱정 많이 하더라. 이제 뉴욕으로 와. 여기서 이렇게 혼자 살 바엔 우리랑 같이 지내는 게 낫지 않아?" "됐어, 도경수나 너나 10년 전에 정 떨어진 지 오래야."
찬열은 쿵쿵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준면은 한숨을 쉬곤 찬열의 집을 나왔다. 뒤를 돌아 찬열의 낡은 집을 바라보았다. 좁은 마당이며 낡은 통나무 집이며 뭐하나 준면의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찬열은 준면의 차가 저 멀리 점이 될 때까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10년 전 뉴욕, 찬열에게는 꿈이자 절망이었다.
*
경수는 찬열의 동갑내기 사촌이었다. 찬열보다 먼저 미국땅을 밟았다. 경성에 있을 적에도 종종 경수의 편지를 받았었다. 열 다섯 무렵의 찬열이 받았던 경수의 편지는 충격 그 자체였다.
'나 남자를 좋아해. 뉴욕에선 문제 될 것이 없대. 만약 내가 경성사내였다면 남자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너가 이 편지를 읽는다면 큰 충격일 게 뻔하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인 너에게 말하고 싶었어.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남자여서가 아니야.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됐는데 그 사람이 남자였을 뿐이야. 추신 : 뉴욕에선 동성애자를 Gay라 불러. 게이. 밝다는 뜻이래. 동성애자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뜻이래.'
찬열은 머리를 둔기로 맞은 것 마냥 띵해졌다. 어렸을 적 교회에서 들었던 동성애는 죄악이라는 목사의 말이 떠올랐다. 찬열은 편지를 두꺼운 책 속에 숨겼다. 경수가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찬열은 그 편지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서부로 이민을 갔다. 그 곳에서 출판사업을 하시기로 결정하신 아버지는 아메리카 드림을 쫓아 제물포의 커다란 서양 배에 몸을 실었다. 한 달 넘게 태평양을 건너 도착한 미국은 또다른 세상이었다. 가장 밑바닥의 동양인과 흑인들, 그 곳에서 군림하는 백인들. 경수가 말했던 뉴욕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찬열은 그 곳에서 10년을 버텼다. 언젠가 뉴욕에 가리라-하는 오기와 깡으로 버텼다. 백인들은 동양에서 건너온 원숭이라며 찬열을 조롱했다. 처음에는 매일 밤 서러워 울었다만 시간이 지날 수록 찬열은 무뎌졌다. 아니, 단단해졌다. 찬열은 꿈꿨다. 백인들을 군림하고 싶다고, 찬열은 그렇게 또다른 아메리카 드림을 찾아 뉴욕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1922년 뉴욕, 그 곳은 세계의 중심지였다. 붐비는 월스트리트, 술과 마약에 미친 사람들, 매일 끊이지 않는 파티들. 기차에서 내린 찬열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그렇게 쫓아 달려온 뉴욕이었다. 무릎이 살짝살짝 보이는 스커트를 입은 여자들과 잔뜩 멋을 부린 남자들, 길거리마다 흘러나오는 재즈음악. 경수의 편지 속에서 상상하던 그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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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열은 경수의 도움으로 웨스트에그에 작은 집을 얻었다. 이스트에그에 사는 경수의 대저택만큼은 아니지만 혼자 지내는 찬열에게는 꽤나 넓고 아늑한 집이었다. 한창 이사짐을 나르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경수였다.
"집 좋다."
경수는 흰색수트를 입곤 활짝 웃으며 말했다. 찬열은 오랜만에 보는 경수에게 아이처럼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경수는 집 안으로 들어와 중절모를 소파에 올려놓았다.
"한창 짐정리 중이었어. 거기 먼지 있으니까 조심해라." "뉴욕엔 언제 도착한 거야? 어제 이모부 전화 왔었어. 너 뉴욕으로 떠났다고." "그저께 도착했어. 집은 어제 급하게 구한거고."
경수는 여전했다. 하얀 피부에 검은 머리. 큰 눈동자, 고고한 듯한 손짓들까지. 더 자란 키와 조금 남자다워진 얼굴을 빼면 어릴 적과 똑같았다. 찬열은 부엌에서 급하게 물 한잔을 따라왔다. 경수는 더운지 수트 자켓을 벗었다.
"뉴욕, 너무 덥지?" "뭐, 로스앤젤레스보단 괜찮아." "일자리는 구했고?"
찬열은 '출판회사에서 일하게 됐어-'하곤 대답했다. 경수는 고개를 끄덕이곤 찬열이 건넨 냉수를 마셨다.
"저녁은 우리 집으로 와서 먹어. 우리 집 여기서 별로 안 머니까." "그래, 혼자 살아서 저녁 해 먹기 귀찮았는데." 경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켓과 중절모를 챙겨들었다.
"너한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많아. 아마 너도 좋아할 사람들이야."
찬열은 경수를 대문까지 바래다 주었다. 마당 앞에는 경수의 검은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다. 뒷자석에 탄 경수는 기사에게 시동을 걸라며 신호를 주었다.
"이따 7시, 이스트에그 16번지로 와." "알았어. 늦지 않게 갈게."
경수의 자동차가 출발했다. 매끄럽게 달리는 자동차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찬열은 내리쬐는 태양빛에 땀을 쏟고 나서야 집 안으로 들어왔다.
*
이스트에그는 찬열의 웨스트에그와는 차원이 달랐다. 웨스트에그에도 대저택들이 많았지만 이스트에그의 대저택들에 비할 것이 못 되었다. 찬열은 어딘지 모르게 떨렸다. 넓디넓은 경수의 집 정원을 가로질러 집을 향하는데도 왠지 모르게 위축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거실로 들어선 찬열은 낯선 인물에 조금 놀랐다. 소파에 앉아있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찬열에게 인사했다.
"김준면이라고 합니다. 경수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박찬열입니다. 반갑습니다."
준면과 찬열은 인사했다. 찬열은 준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꽤나 잘생기고 곱상한 얼굴이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창백하리만큼 하얀 피부는 준면이 입고 있는 검은 수트와 대비되어 더 하얗게 보이는 것 같았다. 준면은 자신이 경수와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라고 소개했다. 찬열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순식간에 준면과 반말을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한창 둘이 이야기 꽃을 필 찰나 경수가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뭐야, 벌써 둘이 친해진거야?"
경수의 옆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큰 키, 조금 이국적으로 생긴 남자였다. 남자의 얼굴엔 여유가 흘렀다. 경수는 찬열의 옆에 앉았다.
"이 쪽은 종인 씨야, 김종인. 미국에서 태어나서 줄곧 뉴욕에서 살았어. 종인 씨, 이 사람 박찬열. 내가 맨날 말하던 그 사촌이야." "아, 찬열 씨! 경수가 매일 같이 얘기하신 분. 반가워요. 생각보다 잘 생기셨네요." 종인과 찬열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 찬열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남자가 경수의 연인이구나-하는 것을. 경수는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종인도 경수를 넘치는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찬열아, 내가 옛날에 보냈던 편지, 기억나? 너 경성에 있을 적에 마지막으로 받았던 편지." "당연히 기억나지. 그 편지를 어떻게 잊어."
찬열은 경수가 제게 동성애자라고 말했던 그 편지를 떠올렸다. 경수는 종인의 손을 잡았다.
"있지, 나 이 사람을 사랑해. 4년 전부터 만났어." "대충 눈치채고 있었어. 너 다 티나."
경수는 종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곤 해맑게 웃었다. 그렇게 티가 많이 나냐며 준면에게도 물었다. 찬열은 그런 경수의 모습을 보니 미소가 흘러나왔다. 찬열은 지금 이 순간이 매우 행복하게 느껴졌다.
*
경수가 대접한 식사는 꽤나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는데 준면이 시계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수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도경수, 난 이제 가 봐야겠다." "벌써? 조금 더 있다가 가지 그래."
종인이 아쉬워하는 경수를 보며 말했다. 준면은 고개를 설레설레 짓곤 단호하게 안 된다고 답했다. 준면은 넥타이를 고쳐메곤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오늘 그 집에서 파티하잖아. 변백현. 그 사람 집. 뉴욕의 온갖 미녀들은 다 모일거라고." 경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준면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떨려보였다.
"변백현?" "너 그 사람 몰라? 얼마 전 신문에도 난 사람이야. 뉴욕에서 떠오르는 재벌. 그 사람이 매주 금요일, 토요일마다 집에서 파티를 열어. 뉴욕의 젊은이들은 다 모이는 자리라고. 벌써 9시잖아. 나 먼저 간다. 찬열 씨도 나중에 나랑 같이 가자."
준면은 인사를 하곤 허겁지겁 경수의 집을 나섰다. 찬열은 경수의 눈치를 살폈다. 어딘가 멍해 보였다. 종인도 그런 경수를 눈치챘는지 피곤하냐며 경수의 등을 쓸어내렸다. 경수는 한참을 멍해있다 찬열과 종인이 자신을 걱정하는 시선을 눈치 챘는지 괜찮다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찬열은 의외로 눈치가 빨랐다. 서부에서 백인들의 무시를 받으며 키웠던게 바로 눈치였다. 경수는 지금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찬열은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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