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민석은 한숨을 푸욱 쉬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떳다. 눈을 뜨자 보이는건 탁트인 시야가 아닌 눈 앞에 흘러내린 치렁치렁한 붙임머리였다. 민석은 깊은 곳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시끄러운 분위기도, 자신만 빼고 웃고 있는 화려한 사람들도, 우스운 꼴을 하고 있는 자신도, 모든게 다 짜증이 났다.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려 손을 뻗자 누군가에 의해 제제 당해 버렸다.
"머리 헝클어져."
그리고선 그 누구보다 다정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다. 그의 손 끝은 마치 섬세한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러웠고 나즈막히 내려보는 눈빛은 부드러웠다. 그 누가 보기에도 민석은 루한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듯.
루한의 손길을 가만히 느꼈다. 루한의 다정한 표정은 드물지 않게 봤지만 민석은 집요하게 루한의 얼굴을 관찰했다. 루한의 얼굴을 빤히 보던 민석은 한 쪽 입꼬리를 말아 올려 조소를 지었다. 어느새 멍했던 민석의 눈빛은 야생 고양이처럼 사나워졌다. 민석의 표정에 냉기가 서린 것 같기도 했다. 루한의 손이 허공에 잠시 멈추었다. 민석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곤 루한의 손을 탁 쳐냈다. 그에 따라 루한의 손은 힘없이 내려갔다.
"지금 나랑 소꿉놀이 하자는 거냐. "
"......"
"유치하게."
민석은 비리게 웃었고 루한의 눈빛은 싸늘히 변했다. 그래. 이래야 루한이지. 명백한 민석의 비웃음이였다. 루한의 딱딱한 표정을 본 민석은 싱긋 웃곤 루한의 팔에 팔짱을 꼈다. 얼굴 위에 두껍게 가식을 쓰곤 루한의 귀에 속삭였다.
"그래. 하자. 소꿉놀이."
들 개 2 w.달홍
루한의 손에 이끌려 따라 온 곳은 대기업 정도 되보이는 어느 기업의 연회장이였다. 사람들의 말을 대충 들어보니 취임식 정도 되는 듯 했다. 태생부터 화려 했다는듯 그들의 몸짓과 행동은 여유로웠고 우아했다. 민석은 그들과 자신 사이에 벽을 느꼈다. 아주 딱딱하고 두꺼운 벽이 저들과 자신 사이에 세워진 것만 같다. 천천히 시선을 따라가자 그 중에서도 단연 제일 화려하고 근사한 루한이 보였다.
각잡힌 수트를 입은 루한은 입가를 살짝 당겨 올려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대화여서 아직 중국어에 서툰 민석이 알아듣기란 힘들었다. 와인잔에 담겨 있는 물을 마시며 민석은 루한을 꿰뚫듯 응시했다. 루한이 사람들과 소탈스런 얘기를 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민석을 봤다. 제일 끝자락 테이블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한듯하지만 집요하게 루한을 응시했다. 굳게 닫혀 붉은 립스틱이 매트하게 발린 민석의 입술이 유독 눈에 띄었다. 긴 시간 눈을 맞춰, 결국 눈을 먼저 피한건 루한이였다.
기계처럼 웃고 떠드는 연회는 지루했다. 그 속에서 모두 처음 보는 이방인인 민석을 흘끗흘끗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경계와 호기심 그 사이의 오묘한 시선이였다. 묵묵히 불편한 시선을 받아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무릎 위에 올려진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꽉 말아쥔 주먹이 조금씩 떨리기까지 했다.
민석은 머리가 아파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루한은 자길 여기에 왜 데리고 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머리를 짚은 채 일어나니 어느 새 다가온 루한이 민석의 팔목을 잡았다. 그의 반동에 민석의 몸이 살짝 휘청였다.
"어디 가는데."
"여기 공기 탁해. 머리 아파."
루한의 물음에 민석이 고개를 들어 루한을 똑바로 올려봤다. 밖에 나가서 공기 쐬고 싶어. 다녀오게 해주라. 민석은 볼은 발갛게 상기 되어 있었다. 루한은 민석의 뺨을 보곤 잡은 팔목을 천천히 놔주었다.
"다녀와."
고개를 끄덕인 민석은 연회장 밖을 나갔다. 루한은 민석이 연회장을 나갈 때까지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거대한 입실문은 천천히 열렸다 닫혔다. 그 모습을 본 루한의 입에선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뭐 때문에 한숨을 쉬고 있는지 구체적인 이유도 모르겠다. 확실한건 이유의 주인공은 민석이라는 점이다.
*
시기는 이미 가을의 끝자락을 달리고 있었다. 시원했던 여름의 밤공기와 다르게 늦가을의 밤공기는 무시 못할 정도로 쌀쌀했다. 민석이 모르는새 시간은 훌쩍 지나와 있었다. 연회장에서 달궈진 몸의 체온이 높아져 후끈후끈 했다. 찬바람이 불어와 민석의 상기 된 뺨을 식혔다. 북적북적하고 화려한 연회장과 대조된 조용하고 초라한 연회장 뒷편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와 민석은 그 자리에서 벽에 기대 스르륵 주저 앉았다. 온 몸의 기가 빨린듯 했다. 여전히 민석은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민석은 옅게 한숨을 쉬곤 눈을 감았다.
그 때 였다. 민석은 누군가의 기척에 눈을 번쩍 떳다. 눈을 뜨니 보이는건 검은 인영이였다. 한 눈에 봐도 말랐지만 단단해 보이는 남자의 체구였다. 민석이 두 눈이 훅 불어났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그 전에 남자의 손이 더 빨라 민석의 입을 막았다. 그와중에도 이상하리만큼 손길은 부드러웠다. 쉬잇 남자가 민석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민석이형."
어딘지 억양이 묘한 미성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듣은 민석의 눈은 심하게 떨려왔다. 남자의 목소리는 지극히 낯익었고 익숙했다.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꽤나 오래 전 일이 되어버렸으나 민석은 이 목소릴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민석의 입에서 천천히 손을 떼내었다. 달칵, 남자는 휴대폰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였다.
"나야. 레이."
희미한 휴대폰 빛에 비춰진 레이의 웃음은 마지막으로 본 웃음과 다름이 없었다. 여전히 새하얀 웃음이였다. 항상 진심만을 얘기하는 서툰 한국어까지. 민석은 천천히 손을 뻗어 레이의 뺨에 가져다 댔다. 살풋 눈이 유려하게 휘어져 희미하게 웃었다. 이는 정말 레이였다. 민석의 숨이 가빠져 왔다.
"니...니가...여기 어떻게 왔어...? 응...?"
목이 막혀 왔다. 어절이 끊어져 버려 제대로 전달하기가 어렵지만 레이는 모든 걸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민석의 머리를 천천히 끌어 당겨 자신의 품에 기대게 했다. 민석은 팔을 뻗어 레이의 목을 끌어 안았다.
"나 보고 싶었어?"
민석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는 민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석의 머리칼이 아닌 붙임머리의 딱딱한 촉감이였지만 민석의 온기는 느껴졌다. 말없이 쓰다듬는 레이의 손길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 질 것 같아 민석은 눈을 꽉 감았다. 민석이 레이의 목에 감은 팔을 스르륵 풀었다. 민석과 레이는 마주봤다. 어둠이 짙게 드리운 공간, 서로의 실루엣 뿐이 보이지 않았지만 서로의 눈이 서로를 마주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까부터 봤어. 형 연회장에 있을 때부터. "
"......"
"... 형 안절부절 하는 거까지 사실 다 보고 있었어. 데리고 나와서 나랑 얘기하고 싶었는데 루한 때문에 못했어. 미안해. "
내가 힘이 없어. 레이가 쓰게 웃었다. 민석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레이는 조용히 자신의 자켓을 벗었다. 민석의 다리 위로 레이의 온기가 묻은 자켓이 덮여졌다.
"형 사촌동생은 계속 알아보는 중이야. 여러 곳곳의 대사관을 둘러보고 있어. 아직 탈북 했는지도 모르겠어. 형 루한에게 잡혀 있을 때도 나 계속 알아보고 있어."
"응. 고마워. 레이, 정말 고마워."
"오늘... 이렇게라도 만나서 너무 기뻐."
"......"
"... 조금만 참아줘. 곧 루한에게서 빼낼거야."
레이의 말에 민석은 쓰게 웃곤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의 말대로 정말 레이가 자신을 빼내줬으면 했다. 조금만 참자. 민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
민석이 연회장을 다시 돌아왔다. 루한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 쪽으로 향해 있었다. 바람 쐬겠다고 해서 나간지 벌써 한시간이 지나 자신이 나갈 볼차에 민석이 타이밍 좋게 돌아왔다. 루한의 얼굴은 미약하게 찌뿌려져 있었다. 성큼성큼 보폭이 큰 걸음으로 민석에게 다가갔다. 민석에게 다가가자 민석이 바깥에서 묻혀온 찬공기가 훅 끼쳤다. 분명 나갈 때 붉게 상기 된 뺨이 창백하게 질려 돌아왔다. 사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으름장을 놓을 생각이던 루한은 민석의 묘한 표정을 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민석이 루한을 올려다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민석의 눈은 촉촉하게 젖은 느낌이였다. 루한, 민석이 나즈막히 루한을 불렀다.
"...집에 가면 안되?"
"......"
"여기 있기 싫어..."
집에 가자, 응? 사그라들듯한 목소리로 말하곤 고개를 푹 숙였다. 긴 머리가 스르륵 민석의 어깨를 타고 내린다. 루한은 잠시 그 모습을 보곤 자신의 자켓을 벗어 민석의 어깨에 얹었다.
"그래, 가자."
이리와. 루한은 민석의 허리를 한 팔로 감쌌다. 민석 역시 순순히 루한에게 기대었다. 그 둘은 그렇게 연회장을 빠져 나갔다.
두 사람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레이는 눈은 어딘지 날카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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