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나랑은 그런 사이니까 08
얘는 여기저기 다 알바하나 왜 여기도 있담. 인상을 쓰던 백현이 돈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TOP 두병을 집어들었다. 안삽니다. 제자리에 가져다 두려는 듯 진열대로 향하는 백현을 알바생이 붙잡았다. 20원은 그냥 제가 내드릴게요. 저번부터 묘하게 인심쓴다는 듯 거만한 태도가 거슬리다. 백현은 슬쩍 눈을 돌려 알바생의 가슴께에 걸린 명찰을 보았다. ' 김종인 ' 퍽 이름과 어울린다고 생각한 백현이 이천오백원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20원은 다음에 줄게. 어느새 말을 놓은 백현의 목소리에 종인은 웃음끼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세요. 과장된 뉘앙스가 저를 놀리려는 것 같아 기분이 상한 백현이 편의점을 나서려 할때였다.
" 종인아. "
나가려는 문을 붙잡고 들어온 여자의 목소리가 백현의 발을 붙잡았다. 망할, 이 편의점 알바생 더 안구하나? 도경아도 여기서 알바한단 말이야?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뒤를 돌아보니 종인과 다정히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는 경아가 보였다. 쳐다보는 백현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연신 종인만을 바라보는 경아의 뒷모습에 백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백현과 경아를 번갈아보던 종인이 경아를 향해 한없이 다정한 얼굴과 목소리로 경아를 뒤돌려세웠다. 누나 친구아니에요?
" 어..? "
얼빠진 목소리와 동그랗게 뜨인 눈동자가 귀엽긴 하지만 지금은 별로 보고싶지않다. 특히나 저 뒤에서 이겼다는 듯이 웃음을 참고있는 얼굴을 보면 더더욱! 정말 젠장스럽게도 친하다는 종인의 말은 거짓이 아니였나보다. 어색하게 안녕. 인사한 백현이 편의점을 나섰다. 뭐야 변백현 도망치는것도 아니고 .. 자신은 그저 기다리고 있을 찬열에게 커피를 전해주려는 거라고 백현은 계속해서 자기합리화를 시도했지만 여전히 다정히 대화를 나누던 두사람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에라이! 괜한 커피를 꽉 쥐던 백현은 몇걸음 안가 힘없이 손을 내렸다. 도망치듯 편의점을 나왔다는 것보다 더 싫은건,
인정하기 싫게도 두사람은 정말 잘어울렸다,정말.
*
다음날 12시가 다 되서야 느지막히 일어난 백현은 아무도 없는 집안을 둘러보며 어리둥절했다. 어라, 왜 아무도 없지 엄마? 누나 야, 변백희! 집안 곳곳을 향해 소리쳤지만 평소 야 소리에 쏜살같이 달려올 백희도 안보이는 것이 정말 아무도 없나보다.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던 백현은 부엌에서 포스트잇 하나와 랩으로 감싸진 샌드위치 몇개를 발견했다. 다짜고짜 자신을 제외한 세사람이 모두 여행이라니. 것도 산악? 웬일이지 변백희가 따라가다니. 세상에서 움직이는걸 제일 싫어하는게 나무늘보 보다 변백희라 할만큼 자신의 누나인 백희는 움직이는 걸 싫어했다. 그럼에도 따라가다니.. 등산회에 남자라도 있나보지? 그리 생각한 백현은 느긋히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대충 씻고 도서관이나 가야겠다. 곧 있으면 시험이니까 박찬열은 뭐.. 자고있겠지. 손을 쪽쪽 빨며 빵가루 부스러기까지 다 훑어먹은 백현이 나갈채비를 했다. 샤워기를 틀자 얼굴로 쏟아지는 물살. 꽤나 시원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어젯밤 이후로 머리속이 복잡했기 때문이였다. 눈을 감은채 물살을 느끼던 백현의 머리속으로 또다시 두사람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망할, 얼른 씻고 도서관이나 가야지. 평소 눈길도 주지 않던 책들을 챙겨 가방에 쑤셔 넣었다. 젖은 머리를 털며 백현은 카톡을 켰다. 노란 화면 뒤 무수한 빨간 알림들이 떠올랐지만 아무도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백현의 답을 기다리는 대화창들을 무시하며 스크롤을 내리니 맨끝자락에 다다라 백현의 손가락이 멈췄다. 잘 자. 자신이 설레는 가슴을 주체못하고 보낸 두글자. 그럼에도 그때도,지금도 답이없다. 너는.
핸드폰을 침대로 던진 백현이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
사실 도서관으로 직행한 이유는 시험기간이기에 지금쯤 가면 독서실은 꽉 차 있을것 같았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칸막이 책상을 볼때마다 웬지 모르게 백현은 숨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동네 도서관은 그에 비해 사람도 적고 묘하게 습기 찬 책냄새가 안정을 주는 것 같아 백현은 도서관을 선호했다. 도서관의 오랜 수위아저씨께 인사하고는 도서관 구석자리로 백현은 들어갔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먼저 온 선객이 있었다. 정말 백현의 예상을 깬 인물이였다. 지금은 보기 싫었는데.이미 백현의 걸음소리를 듣고 먼저 온 경아가 뒤를 돌아봤다. 경아도 백현이 예상외라는 듯 눈을 잠시 동그랗게 뜨다 입을 오물조물거렸다. 저번에 교실에서는 인사해줬는데. 힘없이 웃으며 백현이 경아의 맞은편으로 앉았다.
" 너도 여기 알 줄은 몰랐는데. "
" ..어렸을때 자주와서. "
그래? 짧은 대화가 끝을보고 백현은 노트와 문제집을 폈다. 정말, 자신이 싫어하는 수학이지만 이젠 고3이니 열심히 해야지. 답지를 뒤적이며 열심히 풀던 백현의 위로 익숙한 분홍색 팬심이 글씨를 써내려갔다.
- 도와줄까?
그러고 보니 자신의 짝은 공부를 잘했다. 담임 선생님이 여러번 경아를 부르는 걸 봤기 때문이다. 백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경아가 일어나 쪼르르 백현의 옆자리로 다가왔다. 여,옆자리에서? 이건 생각도 못했는데. 잠시 당황한 백현은 이내 진지하게 앉아 설명하는 경아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이건 이렇게 하는게 아니라..
아무도 없는 도서실에서 단 둘이서, 그것도 꼭 붙어 공부하는 모습이 언젠가 자신이 꿈꿨던 도서관 데이트 같다 생각한 백현이 경아몰래 가슴을 설레였다. 가까이 붙은 경아의 어깨나, 하얗고 작은 손이 백현을 긴장으로 온몸이 굳게 했다. 콩닥콩닥. 또 분수모르는 자신의 가슴이 뛰려나보다. 왜 자신의 신체는 다들 자주적인건지 한숨을 삼킨 백현이 경아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젯밤 그렇게 생각하고 생각했건만, 왜 이럴때 또 생각이 나는건지. 경아는 나름 호의를 배풀어 자신의 공부를 도와주려는 것인데 말이다. 물어보고 싶다. 너희 사겨?
" 왜? "
꿀꺽. 하마터면 물어볼뻔 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백현이 이상했는지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춰오는 경아의 얼굴에 백현이 시선을 피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바보 변백현, 멍청이 변백현, 존나 찌질해 진짜..
" 나 그냥 가볼게 "
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박찬열 집에서 공부나 하는건데. 오늘따라 이상한 백현의 모습에 어쩔줄 모르는건지 경아가 인상을 쓰며 주먹을 꼭 쥐었다.안그래도 자신이 세게 붙잡아 부었던 손목인데 손이라고 안여릴까, 당장 손을 잡아 주먹을 풀어주고싶지만 그게 만약, 도경아가 불편해하면? 아, 나 더럽게 도경아 좋아하네 진짜. 그러고보니 나 어쩌다 얘 좋아하게 됐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백현의 뒤를 따라붙었다. 필통마저 가방에 넣고 뒤돌아 서던 백현의 뒤로 줄줄이 달라붙던 태그가 당겨졌다.
" 종인이는. "
너한테.
" 동생이야, 친한. "
*
도경아는 왜 나한테 변명과도 같은 말을 했을까. 그전에 집에 어떻게 온지도 모르겠다. 멍하니 집에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고민한지 어언 몇시간,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고 곧있으면 시침은 8을 가리킬 터였다. 매일 8시마다 백현의 눈은 무언가에 쫓기듯 혹은 집착하듯이 시계를 쳐다봤다. 그게 누군가로 인해 비롯된 버릇인건 말하지 않아도 백현 자신이 제일 잘 알고있었다. 어릴적 모빌을 가지고 놀듯 원숭이 인형을 이리저리 쭉쭉 잡아당기던 백현은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답답함의 답은 원인 제공자가 알고있을거라 생각했다. 그건 변명이고 실은, 경아가 보고싶었다. 그래 그냥.
" 나 나갔다 올게 ! "
산악으로 지친 누나가 부엌식탁에 머리를 박고 손을 흔들었다. 대충 뻗친 머리는 스냅백으로 눌러쓰고서 어두워진 거리를 걷다 지난번 문제의 편의점이 눈에 띄었다. 여자애들은 딸기 우유 좋아하던데. 도경아도 좋아하겠지? 잠시 주머니의 짤짤이를 새보던 백현은 씨익 웃으며 편의점에서 딸기우유를 계산했다. 8시를 지나서인지 종인은 보이지않았다. 아마 이시간에는 카페에 있는것이겠지. 경아랑. ..... 웬지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백현은 룰루랄라 나섰다. 거스름돈으로 저번 굴욕의 20원도 되갚아주리라. 저번 놀이터에서 경아에게 불러줬던 노래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백현은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자신은 뛰어가고있었다. 왜 뛰는지는 자신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발은,마음은 걸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뛰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져버린 벚꽃이 발에 치였고 드문드문 남은 벚꽃잎이 백현의 뒤로 쏟아져내렸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리고 백현은 2층으로 성큼성큼 올라섰다. 구석진 자리에 조용히 자리를 잡으니 홀에서 기타를 조용히 연주하는 경아가 보였다. 드문드문 경아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조명에 비친 경아는 여느때든 예뻤지만 오늘은 더 고와보였다. 콩깍지가 더 단단해진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히 테이블에 엎드려 경아를 훔쳐보던 백현은 조용히 경아가 끝날때를 기다렸다. 그런 백현의 자리로 맘씨 좋으신 사장님이 백현을 기억하고는 음료수 한 잔을 올려두고 사라지셨다. 음료수가 있건말건 백현은 열심히 설레는 가슴을 다독였다. 그러고 보니까 왜 자신은 경아를 좋아하더라? 맨처음 자신은 경아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예뻐서? 자신이 얼빠였나.. 백현은 기억을 돌이켜봤지만 그건 아니였다. 아무리 찬열이 환장하는 소녀시대 누나들이 티비를 꽉꽉 매워도 백현은 눈길 하나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였다. 그럼 금사빠? 그것도 아니였다. 여태껏 자신의 주변에 예쁜 여자아이들이 스쳐갔지만 예쁘단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럼 왜지? 멍하니 기억을 돌이키는 백현의 앞으로 경아가 기타를 들고 다가왔다. 아까전부터 자신을 쭉 쳐다보더니 정신이 나갔나.
" 변백현? "
" .....? "
멍하니 허공을 보던 백현의 눈이 시야에 잡힌 경아를 향해 초점을 맞추었다. 어,어? 도경아? 어느 틈에!
" ....변백현? "
어제부터 이상했는데 혹시 아픈건가 경아가 백현의 이마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마치 백현이 하듯, 자신의 이마에도 손을 올리며. 이상하다,열은 없는데? 경아가 갸우뚱 거릴 즘, 백현은 얼굴이 벌게지는 것을 느꼈다. 으악, 지금 도경아가 자기 얼굴위로 손을! 이럴줄 알았으면 세수라도 하고 올걸! 바보같은 표정을 짓던 백현의 뒤로 불쑥 낮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형은 왜 온거에요?
" 아, 종인아. "
찌릿찌릿, 전기 맛좀 봐라 이자식! 눈길로 태울듯이 종인을 째려보던 백현은 종인을 다정히 부르는 경아의 모습과 의기양양하게 씨익 웃는 종인의 모습을 코웃음치며 무시했다. 흥, 동생이면서
" 도경아. "
큼큼,백현은 헛기침 뒤 작은 편의점 봉지를 경아에게 건냈다.어제 공부 도와준거 고마웠다. 얼떨떨한듯 자신이 내민 봉지를 받아 딸기우유를 멍하니 응시하는 경아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던 백현은 주머니에서 백원을 꺼내 종인에게 내밀었다. 뭐에요? 종인이 눈썹을 삐죽였지만 그러건말건 이 형의 마음이다 자식아.
" 커피값.형이 너무 마음쓰이더라. "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하고는 백현은 아직도 우유를 쳐다보고 있는 경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딸기우유 싫어해? 자신의 목소리에 그때까지 멍하니 딸기우유를 쳐다보던 경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아니.
" 그럼? "
" .... 따,딱히.. 싫어하진 않아. "
그러고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빨대를 꽂아 먹는 모양새가 .. 혹시 부끄러운건가? 딸기우유 좋아한다는게? 펑, 백현의 마음을 향해 딸기우유란 대형 핵폭탄이 쏘아졌다. 앞으로 도경아에게 딸기우유를 열심히 바치리라! 불끈 남몰래 다짐한 백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아는 딸기우유를 맛있게 먹었다. 아주 맛잇게,
*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이 한 분 더 늘었어요 매우 기쁩니다 삼바라도 추고싶은 기분이네요.
오늘 한번 대충 스토리를 완결까지 구성해봤는데 번외나 에필로그를 합친다면 25편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복숭아 님, 깜동이 님 감사해요 :-) 변변찮지만 제 사랑이라도 드세요. 거절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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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 뭐임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