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ghton Meester - Blue Afternoon
그들이 사는 세상
#밀회
「어제 새벽, 정부의 댐 건설로 수몰을 앞둔 은광 마을 철거민들이 농성을 벌였습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학교에 폐교를 통보했어요.」
「400년 된 마을과 91년 된 학교가 물에 잠기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이에 출동한 경찰이 철거 시설물과 주민들을 강제 퇴거…」
「충돌…」
「이 과정에서 마을 주민 3명이 중상…」
나는 한숨을 쉬며 헤드셋을 뺐다. 기껏해야 인터넷의 작은 미디어 뉴스에나 나왔던 지난 새벽의 철거 농성은, 아이러니하게도 P로펌의 주류층을 뒤집어 놓았다. 중상자 발생으로 인해 사건이 커지면서 박지민이 비밀리에 철거민들의 소송 절차를 도왔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종종 스케줄 표에 없는 외출을 하고 돌아온 박지민의 수트며 구두코가 먼지 투성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여론 때문에 이 케이스에 뛰어드는 것을 고심하던 대표님은 이에 격분해 중립 입장을 때려치우고, 되려 Y건설사와 수자원 공사의 법적 대리인을 맡게 될 것이란 말이 나돌았다. 그리고 이틀 째, 박지민은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았다.
자료실을 한바탕 뒤집어엎고 나오는 길이었다. 며칠 전 차 안에서 울던 나를 달래고 나를 걱정했다며 박지민의 목소리와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비서로서 한번 즈음 연락하는 것이 도리인데도 그러지를 못했다.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박지민이 처리하다가 끊긴 업무에 관련한 자료 파일들을 모아 겹겹이 쌓아 올려 복도를 걸어가던 중이었다.
“-!!!”
“강 비서님.”
누군가의 손에 의해 순식간에 끌려들어간 곳은 어두운 비품실이었다. 파일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를 끌었던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 전정국이었다. 그가 미안하다고 중얼거리고는 살짝 웃으며 흩어진 파일을 정리했고 나는 이유를 물을 힘도 없어서 한숨을 푹 쉬며 쪼그려 앉았다.
“지민이 형은요?”
“...모르겠어요.”
“비서님이 이럴 때 도와줘야죠.”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있을텐데.”
내가 손을 멈추자 전정국이 자신의 무릎 위로 팔을 얹고 눈을 반짝였다. 사모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전정국이 철거민의 일에 관심이 많다던 말. 박지민과 전정국은 확실히 닮았다. 말투나 행동부터 가치관까지. 둘이 같이 자랐다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납득이 가는 정도였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알고 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검은색 파일의 라벨을 내려다봤다.
“저를 끌어들이지 마세요. 전 변호사님들과 달리 언제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월급쟁이라구요.”
“비서님 진짜 똑똑하네요. 난 별 말도 안 했는데 벌써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
“사모님께서 전 변호사님 얘기를 했다면 믿으실래요?”
“네. 그 분은 그럴 만도 하죠.”
전정국이 비식 웃었다. 그 얼굴에 씁쓸함이 찰나에 스치는 것은 내 기분 탓일 것이다. 그가 몸을 일으켜 수납장에 기대며 입을 열었다.
“비서님도 이제 알죠? 지민이 형은 이 일을 맡고 싶어 해요. 하지만 상대가 P로펌이죠. 가족이잖아요. 형은 그렇게까지 모질지는 못하거든요. 그래서 선뜻 나설 수도 없고 망설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형은 결국 이 일을 외면하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지민이 형이 스스로 굳게 마음을 먹었을 때까지 우리가 모든 준비를 마쳐놓는다면 좋겠어요.”
깔끔하고도 막힘없는 그의 주장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전정국은 내가 자신을 돕길 원한다. 정부와 수자원공사, P로펌, Y건설사가 떡 버티고 있는 이 일에 뛰어들길 원한다. 어제 철거 농성 현장에서 중상을 입었다는 철거민들은 정말로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평생을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도시로 가 살 수 있을리 만무했다. 생계를 위해 농성을 하다가 농성 구조물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4년 전 내가 박지민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너희가 하는 일이 부당한 건 맞지만, 그 것도 다 능력 아니겠냐는. 법 배우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야말로 부당했다. 만약 내가 전정국을 돕는다면 그걸로 내 멍청했던 발언을 만회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질문 하나 해도 돼요?”
“하세요.”
“박 변호사님은 이 일에 왜 그렇게 집착하죠? 사실 모르는 척 살아갈 수 있는 위치잖아요. 태어나보니 그렇더라. 니들이 뭐 어쩔 거야. 그런 게 상류층의 특권 아닌가요?”
밑바닥으로부터 피어오르는 의문이었다. 이러한 일에 관심을 갖고 흔들리기에는 박지민은 애초에 너무나도 남다른 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자기가 뭐 천사 그런 거라도 되나?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죽였다.
“미국에 있을 때 지민이 형이 그랬어요. 어떤 여자가 자기한테 그러더래요.”
“......”
“당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부당하다고. 그런데 넌 그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지 않냐고.”
세상에. 나는 전정국 모르게 손을 터질듯 말아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도 몰랐다.
“그 날 이후로 형은 잠도 안 자고 매일 고민을 했어요. 법을 배우면서 쌓아온 형의 모든 가치관이 무너졌고, 본인의 현실에 대해 머리 터지게 갈등했죠. 그러다 뭐라도 바꿔보겠다고 한국으로 무작정 온 거예요.”
“......”
“보통의 부잣집 자제들이라면 그냥 흘려들었겠지만 지민이 형은 남다른 게 있긴 하죠. 그 여자는 알까요? 형이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
어, 그 여자가 난데 전혀 몰랐어. 내가 박지민에게 그리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입이 다 바싹 말라왔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현실, 외면, 도피로 갈팡질팡하던 내게 책임감이란 것이 주어진 것이다. 박지민이 나를 한 눈에 알아봤던 이유가 있었던 거다. 마음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기울었다. 나는 이 일에 대해 내 몫의 역할을 해내야만 한다. 하지만 한 가지가 남았다. 전정국의 생각을 알아야만 한다. 그가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는 지도 전혀 모른다. 박지민과 닮았다는 이유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전 변호사님은 왜 이 일에 관심을 갖는 건데요?”
“지민이 형을 돕는 것도 돕는 거지만, 제 신념이 그래요. 난 7살 때부터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어요.”
“죄책감.”
“그래서 책임을 지고 싶은 거예요.”
“......”
“자세한 건 다음에 술 한 잔 하면서 얘기할게요. 나 좀 많이 불쌍하니까 손수건 꼭 준비하고. 우선 지민이 형 오피스텔로 출동해요. 형 잡아와야지.”
***
나는 박지민이 산다는 청담동의 주상복합 오피스텔에 들어섰다. 입주민을 제외하고는 사전에 예약을 한 경우에만 출입을 할 수 있지만 전정국이 미리 손을 써둔 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순간 싸늘한 사모님의 얼굴이 스쳤지만 이내 떨쳐버렸다. 내가 겁이 없는 것에 감사한 순간이었다. 나는 박지민의 집 현관 앞에 서서 벨에 손을 가져다댔다 떼었다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 꾸욱 눌렀고 한참 반응이 없기에 연달아 눌렀다. 곧 현관문이 열리며 하얀 면티를 입은 부스스한 머리의 박지민이 나왔다.
“...뭐야?”
“되게 유치하세요.”
“뭐?”
“애도 아니고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업무 다 때려 친 거 너무 유치해요. 본인도 알죠?”
난데없는 내 디스에 박지민이 팔짱을 끼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현관문에 기대었다. 그러다 그가 푸흡, 웃었다.
“나 아픈 건데.”
“뻥치지 마세요.”
“말버릇 봐라. 일단 누가 보면 안 되니까 들어와.”
박지민은 나를 현관에 밀어 넣더니 복도로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다가 현관문을 쾅 닫았다. 도어락 잠기는 소리가 조용한 집을 울렸다. 뭐지? 나 들어올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당황한 내가 포장해 온 죽 봉투를 박지민 품에 밀어 넣으며 안녕히 계세요, 현관문 손잡이를 잡자 그가 막아섰다.
“오늘 자택 근무야.”
“근무 환경이 너무 불편한데요.”
“멋대로 찾아와서 자다 일어난 꼴 보인 나만큼 불편하겠어? 너도 좀 불편해봐.”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슬리퍼를 끌며 긴 복도를 걸어가는 박지민에 할 수 없이 나도 구두를 벗고 아이보리 톤의 대리석 위에 발을 디뎠다. 어디선가 들리는 물소리에 고개를 틀자 복도 끝에 펼쳐진 작은 연못 같은 수 공간이 있었다.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무슨 집에 연못이 다 있냐. 하긴, 처음부터 느낀 건데 집이라기 보단 갤러리 쪽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박지민이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쫄래쫄래 따라 들어갔다. 잘못하면 집에서 길 잃을 것 같달까. 나는 그가 일회용 죽 용기를 대충 쟁반에 올리는 것을 밀어내고 그릇을 꺼내어 죽을 부었다.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박지민이 입을 열었다.
“아픈 거 뻥이라면서, 죽은 왜 사왔어?”
“애기 도련님 어르고 달래려면, 꾀병에 장단 맞춰야죠.”
“너무 깐죽대면 나 화낸다?”
“......”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는 박지민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나 너무 깝치는 것 같지? 곧장 들리는 그의 웃음소리는 무시했다. 뭐야. 전자레인지가 어딨지? 죽을 데우기 위해 전자레인지를 찾는데 아일랜드 위에 설치 된 세 네개는 족히 넘는 기기 때문에 당황하자, 박지민이 검은 손잡이를 잡고 열었다. 타이머를 조절을 하는 면 티 입은 박지민을 보는데 문득 그가 대학생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미국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떤 여자가 자기한테 그러더래요.’ ‘그 여자는 알까요? 형이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
“......”
“표정이 왜 그래? 죽을상이야.”
“...집이 좀 덥네요.”
“에어컨 틀어놨는데. 온도 더 내려?”
“됐어요.”
나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말이 신경 쓰여 죽겠다. 그 거지 같은 기억 속에서 박지민만 반짝거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이 남자는 지금도 편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박지민이 나를 빤히 보며 내 얼굴 옆에서 손을 팔랑대며 부채질을 하기 시작하자 내가 이 곳에 온 목적이 떠올랐다. 멍청하게 까먹고 있었네.
“박 변호사님 내일부터 출근하세요. 밀린 업무랑 보고서 저 더 이상 감당 못해요.”
“장단 더 맞춰줘야 출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틀 안 본 사이 정말로 애기가 되셨네요.”
“강 비서가 연락 한 번 없어서 그래. 진짜 섭섭하네.”
“멋대로 결근하셔놓고 누가 누구보고 섭섭하대요?”
“아 그런가? 미안.”
하여간 사과는 빨라요. 내가 죽 그릇과 수저를 내려놓은 쟁반을 건네자 그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가 다시금 내려놓았다. 그는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며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러자. 내가 미안한 만큼 마실게.”
“뭘요?”
“술. 저번에 강 비서가 그랬던 것처럼.”
“...그 정도로 미안해 할 필욘 없는데요.”
“아니야. 연락 한 번 없이 업무 떠민 거랑 저번 일도 되게 되게 미안한데.”
박지민은 지난번 차 안에서의 일을 떠올리는 것인지 미간을 약간 좁혔다. 사람이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천진하다고 해야 할지.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다. 대표님과 사모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신기하다. 할머니 손에 자랐기 때문일까.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프다면서 무슨 술이에요.”
“꾀병이잖아.”
“컨셉 하나만 잡죠? 장단 맞추는데 되게 헷갈리거든요.”
내 말에 찬장을 열던 박지민이 웃었다. 그래, 확실히 꾀병인 걸로. 그가 와인 잔 두 개를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렸다. 그러곤 동그란 의자에 걸터앉아 한 팔로 턱을 괴었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여전히 서있는 나와 눈을 맞췄다.
“자택 근무 업무 내용 전달할게.”
“......”
“오늘 강 비서 업무는 두가지야. 나랑 술 마셔주기, 내 얘기 들어주기.”
“......”
“시간 외 수당 쳐야할 지도 몰라. 얘기가 길거든.”
+
오랜만이에요! 오늘은 두 번의 밀회가 있었네요. 밀회라니까 본의 아니게 섹시한 느낌인데 안 섹시해서 미안해요(?
암호닉 정리하는데 정말... 너무 많네욬ㅋㅋㅋ 지금 2화 중간까지 밖에 정리 못했어요. 오열...
같이 달려주시는 독자 분들 정말 항상 감사해요! 암호닉 정리하면서 느낀 건데, 정말 예에에전부터 봐오던 분들 계시고 댓에서 볼 때마다 항상 반갑고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ㅠㅠ 그 분들 보면서 아 내 손이 그래도 고자는 아니구나. 아니면 혹시 내 손이 고자인데 이분들이 천사라서...? 뭐, 둘 다 좋아요!!
물론 뒤늦게 봤다며 아쉬워하시며 재밌다고 해주시는 분들, 새로 봐주시는 분들께도 항상 감사하고 반갑고 암호닉을 기억하려 애쓰고 있어요! 때론 독자님들 자신의 얘기나 생각 말해주시는 댓도 꼼꼼히 읽으며 고개 끄덕이기도 하구요. 언제나 고마워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이 사는 세상은 제게 아주 많이 겁나 부담스러운 글이에요. 워낙 가벼운 소재 쓰는 것을 좋아해서 저한테는 부담스러운 소재에요. 그래서 글 쓰는 게 마냥 즐겁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써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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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 수트 아 잘생겼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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