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박변호사님
P로펌 비서실 소속 ― 사람들은 명함에 새겨진 단 몇 글자만으로 내 직업에 대해 로망을 가진다. 그 로망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내 직업을 허울 좋은 시다바리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 증거로 내 하루 일과는 대표실로 녹차를 대령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 때 대표님의 컨디션에 따라 차의 농도를 조절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후 아침 회의가 끝나면 요일별로 달라지는 영양제와 함께 물을 내어간다. 점심 식사 후에는 커피가 들어가는데 대표님이 어떤 메뉴를 드셨는가에 따라 커피 원두의 종류가 바뀐다. 또 오후 네시에는 티타임이 있는데 이 때가 가장 바쁘고 죽고 싶은 시간이다. 중요 업무 담당 변호사들이나 정계 출신의 고문들은 각자 선호하는 홍차의 종류가 달라서 나는 이제 비서보다는 홍차 전문가가 되어버린 기분이랄까. 그 외에도 끊임없이 로펌을 방문하는 고객들을 위한 매뉴얼이 있는데 그 매뉴얼이란 것 역시 커피나 녹차나 홍차에 관한 것이다.
비록 내 입으로 허울 좋은 시다바리라곤 했지만 내 업무에 크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물에 손이 데여서 자주 밴드를 발라야 한다거나, 고객과 고문을 응대하다 보니 무리해서라도 고가의 옷을 차려 입어야한다 등등의 단점 외에도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칼퇴근이라던가 칼퇴근이나 칼퇴근. 칼퇴근이 얼마나 중요한 지 직장을 다녀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내 직업 만족도를 높일 수 있었던 이유가 그나마 칼퇴근 때문이었는데 오늘은 그것마저도 글러먹은 것 같다.
“강 비서, 오늘 도련님 라운지 출입이야. 지인 두 분 동행.”
“......나?”
“응. 대표님께서 그 어리고 똑똑한 친구 붙여라던데. 너잖아.”
“왜 나야? 더 똑똑한 실장님도 계신데.”
“애들 노는 곳이니까 애를 보내라던데.”
호석 오빠가 책상 위의 서류를 챙기며 말했다. 앞서 말했듯 나는 대부분의 업무 시간을 물 끓이는 데에 쓰지, 도련님 씩이나 되는 손님을 안내한 경험이 없다. 그런 나에게 이런 일을 맡길 만큼 대표님이 나를 좋게 평가하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칼퇴근을 못 하는 건 기쁜 일이 아니다. 거기다 이 로펌 도련님은... 내가 답이 없자 오빠가 고개를 들었다.
“도련님 보통 스타일 아니야. 알지?”
“...알지.”
“읊어봐.”
“아홉 살 때 미국으로 가서 돌아가신 큰 사모님 손에 자라셨어. 법대까지 잘 다니다가 돌연 다 접고 한국으로 오셨는데 그 때 사모님 쓰러지시고 대표님께선 강제로 비행기에 태우려고 하셨음.”
“또.”
“이번에 연수원 졸업 후 이 로펌 안 오겠다 버티다가 사모님 링거 꽂으니까 반강제로 입사 계약서 씀.”
“맞아. 도련님은 혈기 왕성하고 또 본인 고집이 있으셔.”
이름 박지민.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사법고시 출신의 수재이자 금수저도 아닌 다이아 수저. 사법고시를 패스했으니 망정이지 다들 못 가서 안달인 미국 대학 잘 다니다가 때려 친 부분은 참 의문스럽다. 뭐 내가 도련님을 이해하려 드는 건 애초에 무리지만 몇 년 전 집이 쫄딱 망해서 공부도 마치지 못 하고 쫓기듯 돌아온 내 처지와 굉장히 비교가 돼서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내가 우주먼지 같이 느껴진달까.
“예의 따지는 분 아니고 재밌는 대화를 좋아하셔. 잘 받아쳐.”
“그래. 내가 도련님의 기쁨조가 돼보도록 할게.”
호석 오빠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꼬였냐며 나를 보고 웃었다. 저들끼리 노는 것까지 돌봐야 하는지가 의문이었는데 호석 오빠는 그런 내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듯 '무려 대표님 아들이잖아.' 중얼거리며 내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무려 대표님 아들이지. 나는 수긍했다. 그것만큼 명료한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
“비서님이 생각보다 어리시네요.”
“비서실 막내입니다.”
나는 영업용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사실 나는 세 명의 손님 중 누가 내게 말을 걸었는지 분간도 안 될 만큼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라운지의 묵직한 원목 문을 밀며 앞장섰다. 그들에게 등을 보이자마자 썩어가는 내 표정을 누군가 봤더라면 전쟁터라도 나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중간에 선 남자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인상착의가 미리 전달 받았던 이 로펌의 도련님과 일치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나와 달갑지 않은 인연을 맺었던 그 남자라는 것을. 조막한 얼굴에 웬만한 여자 뺨치는 갸름한 턱선 그리고 곧은 눈매며 입술선은 쉽게 잊을 수 없는 매력적인 외모이자 아우라였다. 거기에 잊을 수 없는 4년 전의 기억까지 더해져 혹시나 닮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희망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나 남준이 형한테 기사 막아달라고 무릎 꿇었잖아.”
“태형이 형 또 무슨 짓 했는데요?”
“짓이라니. 형아는 그저 알콜 때문에 약간의-”
“약간의 병신 짓이겠지.”
“역시 박변. 다음에 나 변호해 줄 거지?”
“제발 변호가 필요한 짓은 하지 말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다. 사람이 거친 풍파를 겪다보면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거다. 아 내 인생은 원래 이렇구나. 잘나가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할 확률. 그것도 모두가 부러워했던 미국 법대에 입학하자마자 망할 확률. 그래서 비행기 티켓 값 구하느라 딱 한 번 대리 시험 쳤다가 잡힐 확률. 그런데 나를 잡았던 그 남자가 이 로펌 도련님일 확률. 내가 그 모든 확률에 걸렸다고 생각하니 로또가 당첨 된다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물론 로또가 당첨 될 일은 없다. 그런 행운을 손에 쥐어 본 적은 없으니까. 나는 호석 오빠에게서 전달 받은 특이 사항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딱 한 가지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박지민 미국 법대 박지민 미국 법대... 아 저 유리창 깨고 도망가고 싶다...
나는 화려한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쪽 카우치 소파로 그들을 안내했다. 내가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허무할 정도로 박지민이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 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그는 내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고 와인을 고르는 것에 집중했다. 그래. 나는 저 남자에게 지나가던 거지1이었을 거야. 그런 자학적인 농담도 지금의 내겐 위로였다. 얼른 구석탱이로 찌그러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들이 골랐던 와인을 오픈한 뒤 코르크의 상태를 확인하는데 김태형이 나를 향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나머지 둘의 시선도 이쪽으로 향했다.
“비서님도 와인 맛보실래요?”
“저는 괜찮습니다.”
“에헤이 거짓말. 맛보고 싶다고 얼굴에 써있어요.”
배우 및 모델 전문 T기획사 대표의 아들이자 요즘 가장 핫한 모델인 김태형이 천진한 얼굴로 웃으며 내 앞에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이런 식으로 도련님들이 마치 내 속을 꿰뚫은 것처럼 말 할 때는 그에 장단을 맞추어야만 한다. 실은 정말 내 얼굴에 써있을 지도 모른다. 이런 비싼 와인을 언제 마셔보겠냔 말야. 가격이 무려 보통 사람의 월급을 가뿐히 뛰어 넘는데. 옆에서 박지민이 나를 빤히 보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럼 조금만 맛볼까요?”
“안 빼는 거 봐. 비서 잘 뽑았네.”
화보나 시에프에선 세상 그렇게 섹시하고 분위기가 묵직할 수가 없었던 김태형이 해맑게 감탄하며 레드 와인을 따랐다. 올라오는 향이 너무 끝내줘서 입에 콸콸 들이붓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언제 입사했어요? 말 너무 높이지 말고.”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키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박지민의 목소리에 하마터면 입 안에 있는 걸 그대로 뿜을 뻔했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와인 잔을 살짝 돌리며 나를 바라봤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진정...
“입사한 지 1년이에요.”
“여기 아저씨들 성격 장난 아니죠?”
박지민의 말에 나는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만...
“저도 장난 아니라서 괜찮아요.”
김태형이 오오오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박지민도 피식 웃었는데 자연스럽게 눈을 맞춰야 하는 게 예의지만 켕기는 게 있어서 그러기가 힘들었다. 그 후 신임 변호사 전정국이 주식 얘기를 꺼냈고 나는 자연스럽게 바 근처로 도망 가 그들을 살폈다. 확실히 여태 봐온 여타 도련님들이 노는 방법과 다르다. 여타 도련님들이 노는 방법이라 함은 술에 떡이 된다든가 약에 찌든다든가 기타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들. 물론 자기 아버지 회사의 라운지에서 그런 식으로 놀 아들은 없겠지만 유흥 장소로 여기를 고른 것 자체가 평소 적정선을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
그들은 와인 병을 빠르게 비우며 체스 판을 깔았다. 잠시 후 순식간에 누군가의 말이 체크메이트 직전까지 가게 되는 것을 지켜보는데 그 때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던 박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누가 봐도 어색하고 수상하게 그의 눈을 피했다. ...나 진짜 연기 수업이라도 받을까... 박지민은 취기가 올라오는지 약간 휘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발 이쪽으론 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는 마치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내가 서있는 바 의자에 와서 털썩 앉았다...
“필요한 거 있으세요?”
“진토닉.”
나는 그가 얼른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에 바텐더에게 건네 받은 잔을 후다닥 내밀었지만, 그는 돌아 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박지민은 나른한 표정으로 한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보며 진토닉을 머금었다.
“강 비서님은.”
“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박지민도 그렇고 얘 친구들도 그렇고 돈 많은 것들은 좋은 음식 좋은 물 먹고 자라서 그런가 왜 잘생기기까지 했지. 신은 상도덕이 없어. 하긴 언제는 상도덕이 있었나. 나는 이미 깨끗한 와인 잔을 괜히 닦았다.
“왜 법조인이 안 됐어?”
“......”
“다른 사람 시험은 잘 쳐주면서, 본인 시험은 못 치나 봐.”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는 여전히 내게 시선을 둔 채 다시 진토닉 한 모금을 들이켰다. 아마 지금의 나는 이 로펌에 입사한 이래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다. 박지민의 눈과 입꼬리가 재밌다는 듯 휘어졌다.
“어떻게 알아봤냐고? 목걸이 보고. 그 때랑 똑같은 거네.”
나는 와인 잔을 닦던 천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스킨색 반창고로 덮인 내 손으로 내려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상황에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있을 수가 없다. 미래의 나에게 다달이 월급 줄 로펌 대표의 아들인줄도 모르고 그런 패기 넘치는 말들을 했으니 지나가는 똥개라도 잡고 너 같음 무슨 말을 하겠냐 묻고 싶은 심정이다. 더 이상의 정적은 불손해 보일 테니 아무 말이나 하자...
“기억력이 참 좋으시네요.”
“목걸이가 우리 할머니꺼랑 비슷하거든.”
“돌아가신 큰 사모님께서 감각이 젊으셨나 봐요.”
“강 비서 감각이 할머니 스타일이라곤 생각 안 해?”
......이거 뭐지? 나는 빠르게 박지민을 스캔했다. 그의 눈이 아이처럼 반짝이며 내 목 언저리를 훑었다. 그는 빈정대는 것이 아니라 내 반응을 진심으로 궁금해 한다. 그래. 재밌는 거 좋아하시는 도련님이라고 했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기한 게, 정확히 맞췄어.”
“?”
“무고한 사람 길거리 나앉게 만드는 게 취미인 P로펌. 완전 정확하잖아. 그래서 그런 로펌 비서가 된 기분은 어때?”
“묵비권을 행사해도 될까요?”
“될 것 같아?”
“안 될 것 같네요, 도련님.”
“아 그 도련님 소리 좀 치우자.”
바의 조명 때문인지 내가 고급 와인 한 모금에 취기가 오른 건지, 박지민의 가지런한 눈썹 사이가 좁아지는 모양새가 무척 섹시해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 같았는데 순식간에 온도가 달라졌다.
“박 변호사님이라고 해봐.”
“박 변호사님.”
“응. 아까 내 질문에 대답해. 기분이 어때?”
“죄송했어요.”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일은 상대가 박지민이 아니라도 분명 내 잘못이니 자존심 상할 것도 없다. 보통의 도련님 같았다면 벌써 테이블을 엎거나 나를 해고시켰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내가 자존심이 상하는 이유는 그 당시의 내가 인생에서 가장 바닥을 치는 중이었기 때문이며 박지민은 그 때의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이 앉아있던 테이블로 향했다. 김태형과 전정국은 여전히 체스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죄송한 만큼 마셔 봐.”
그는 아까의 와인보다 훨씬 값나가는 보드카와 잔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바틀을 쥐었다.
“설마 병째로 마시게? 토닉 섞어도 봐줄게.”
그가 라임 슬라이스를 집어 들며 말했다. 나는 말없이 병째로 입에 가져다댔다. 필요 없거든? 스트레이트로 꿀꺽꿀꺽 넘기는데 독한 알콜향 때문에 목구멍이 다 아파왔다. 그래도 비싼 술이라 그나마 목 넘김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절하고 싶진 않아서 삼분의 일 정도를 남기고 병을 내려놨다. 인상을 잔뜩 구기며 손으로 입을 닦는 나를 보며 박지민이 입을 벌리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겐 그와 같이 놀아줄 의무가 있기도 했지만 이건 내 자존심의 문제기도 했다. 그는 분명 내가 찔찔 울거나 못 마실 줄 알았겠지. 박지민은 이내 몸도 가누지 못 하고 한참을 끅끅대며 웃었다.
“나 강 비서랑 보드카 마시고 싶어서 농담한 건데. 너 진짜 재밌다.”
“재밌으셔서 다행이네요.”
“좀 있다 훅 가도 난 책임 안 져.”
“죄송한 만큼 마셔라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럼 서로 퉁친 거니까 다음 일은 책임 져야죠.”
“퉁?”
박지민은 내 말을 따라하며 낮게 웃더니 보드카 병을 잡았다. 그는 그것을 잔에 따르려다가 나를 한 번 보고는 바틀을 잡고 그대로 들이켰다.
+글
멤버 전원 출연 예정이애오 모두에게 수트를 입힐 거라는 의지...
전작에서 봤던 분들 다시 보니 반갑고 싸랑해요 저 다 기억함다!! 울먹...
새로 보는 분들도 싸랑하구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암호닉
3화까지 받고 4화부터 리스트 올리겠습니다:)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방탄소년단/박지민] 그들이 사는 세상 2 - 박 변호사님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6/06/23/21/3cbc4d42b7052123af91f326e20df185.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