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 국가대표 연하남과 연애중
16 : 심쿵
w. 스노우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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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워진 밤공기는 정국이의 시즌이 찾아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만큼 자주 볼 수 없었고 또한 함부로 그 점에 대해서 속상해할 수 없었다. 3번째니 익숙해질만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전보다 더 조용해진 핸드폰에 시선을 뗄 수 없었고 아무렇지 않게 눌렀던 번호는 누르기 전에 꼭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고 누르곤 했다. 밤 10시. 정류장에 서서 핸드폰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걸 해, 말아. 불어오는 바람에 후드 모자를 뒤집어썼다. 금방 온다면서어어...
"어후..영화 보기 전에 죽겠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부르르 떠는 데 갑자기 몸에 실려오는 무게감에 몸의 떨림이 멈쳐버렸다. 등에서 느껴지는 따듯함에 한 번, 익숙한 체취에 두 번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날 안아온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가 놀라서 몸에 줬던 힘을 풀었다.
"예매했어?"
"아니, 아직"
그보다 얼굴 좀 봅시다. 감겨있던 팔을 풀어 뒤돌아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민망한지 정국이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고작 일주일 안 봤는데 저번에 봤을 때 보다 핼쑥해진 것 같아 두 손으로 볼을 감쌌다. 아니, 선수촌 밥이 그렇게 맛있다고 소문이 났는데 그 밥 먹으면서 이 상태면 이번에는 얼마나 훈련을 하는 거야. 물론 정국이가 좋아서 하는 운동이지만 이럴 때면 속상해져 그냥 내 자취방에 꽁꽁 숨겨버리고 싶었다.
"현장 예매하려고?"
"그 졸린 눈을 하고 잘도 보겠다"
어젯밤에도 평소처럼 전화를 하는 데 대뜸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길래 경기 다 끝나고 여유가 되며 가자는 말인 줄 알고 흔쾌히 가자고 했는데 그게 바로 그다음 날인 오늘인 줄 상상도 못 했다. 아침에 끝나고 집 앞으로 찾아온다는 카톡을 보고 급하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침 훈련 덕분에 정국이를 말려보지도 못한 채 둘 중 그나마 여유로운 내가 선수촌 근처 정류장에서 기다리겠다고 답장을 보냈었다. 확인은 했을까 조마조마했는데 바쁜 틈을 타 용케 잘 확인했네.
"어차피 그 영화 볼 거잖아"
아... 아! 어쩐지 영화 제목을 콕 집어서 말하더라...
아니, 내가 그렇게 이제 팬 아니라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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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친... 배우님 얼굴 오늘도 열일하시네"
어떻게 사람 얼굴이 이렇게 존엄 할 수가. 한참 대한민국에는 나의 사랑이었던 배우님이 나오는 사극 드라마열풍이 불었다. 반에서 그 드라마를 보지 않은 아이는 조금의 과장을 보태 아예 문명과 인연을 끊거나 절에 살다 온 게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을 받을 정도였다. 월요일은 드디어 오늘 방영한다며 친구와 발작을 일으켰고 그 다음날 아침은 어제 방영한 드라마로 수다를 시작해 야자의 끝도 별다를 거 없이 배우님의 외모찬양으로 마무리하였다. 요즘 유명한 대사를 인용해보면... 그러니깐 그때 고3들에게 그 드라마와 배우님은 나의 인생을 망치러 온 내 구원자같은 존재였다.
"피떡칠을 해도 잘생기고 난리야ㅠㅠㅠㅠ"
자신은 이제 고3이니 정신을 차리겠다며 폴더폰으로 바꾼 친구는 내 핸드폰 갤러리에 들어가 저장되어있는 무수한 배우님의 사진과 드라마 짤들을 보며 오열 중이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여 블루투스로 사진을 옮겨갔다. 이럴 거면 왜 폴더폰으로 바꾼 건지... 한심하게 쳐다보며 쯧쯧하고 혀를 차자 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친구는 나를 붙잡으며 자기가 미쳤었다고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나보다 열심히 자기 자신을 욕했다. 역시 난 덕질을 하기 위해 태어난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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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에어컨도 안 틀어주고- 쪄죽을 거 같아"
-난 빙상장에 있어서 안 더운데
-많이 덥구나
하계훈련을 받기 위해 정국이가 입촌을 한 덕분에 야자가 끝난 하굣길은 혼자 걸어야 했지만 그 대신 정국이는 이렇게 긴 전화통화로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들려줘야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졸리는 목소리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웅얼거리다 얼른 자라고 하면 미안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선수들에게 취침시간도 정해져 있는데 고3인 내가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그 취침시간을 한참 넘긴 시간이니 피곤하긴 엄청 피곤했겠지.
"나 현관 도착했어"
-그래요?
그래요? 오늘은 왜 잔소리가 아니지. 맨날 갈수록 늦게 들어간다고 잔소리를 늘어놓거나 어서 소리나 들려주라고 재촉하는데 웬일로 여유로운 반응이었다. 뭐, 사람이 맨날 잔소리를 할 수 있나싶어 대수롭지 않게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잘 들리게 하기 위해 핸드폰을 귀에서 떼 비밀번호 키패드에 가져다 댔다.
일-
일-
육-
육-
비밀번호를 누르는 데 자꾸만 어디선가 이중으로 소리가 울렸다. 뒤를 돌아볼까 했으나 무서워져 다급하게 나머지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또 다른 소리가 이중으로 들려왔다.
누나-
누나-
"응?"
뒤를 돌아보자 정국이가 핸드폰을 들고서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내가 둔한 건지 아니면 정국이가 인기척을 잘 숨기는 건지 소리를 지를 뻔한 입을 겨우 손으로 막았다. 그런 내 반응이 웃긴지 코를 찡긋거리며 웃고 있었다. 고요한 아파트 단지에 소리는 못 지르고 안면근육을 최대한 사용하며 엄청 놀랐다는 것을 어필하며 다가가자 정국이도 계단을 한 칸씩 올라왔다.
"뭐야?! 하계훈련 끝난 거야?"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날 끌어당기는 정국이에게 힘 없이 끌려가 안겼다. 아까 덥다고 엄청 궁시렁거렸는데 지금 느껴지는 더움은 어떻게든 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껴안고 부둥부둥하다가 울리는 핸드폰에 놀라 화면을 보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그래도 딸이라고 평소보다 늦은 시간까지 올라오지 않은 게 걱정이 되긴 했나 보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며 말하자 정국이는 놀라 떨어지더니 나보다 더 당황해 발을 둥둥 굴렀다. 직접 보는 일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쓰러지겠네.
"현관 앞이야, 지금 올라가요"
전화를 끊고 홀더키를 누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 하자 정국이가 갑자기 내 팔목을 잡아와 핸드폰을 뺏어갔다. 뭐..뭐야.. 우리 엄마한테 전화하려고...? 꽤 심각한 표정인 걸 보니 진짜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뭐 따님을 이 시간까지 묶어둬서 죄송하다고 전화할 것만 같아 황급히 입을 열려 하자 정국이는 익숙하게 내 핸드폰 비밀번호를 푼 뒤 미간을 찌푸리고서는 핸드폰 화면을 내게 내밀었다.
"누구예요?"
그러게, 이게 누구실까. 왜 여기 계실까...
나와 눈이 마주친 배경화면에 자리 잡고 계신 내 배우님의 존엄한 얼굴....
"그..그게..."
아니 그보다 내가 설정도 해놓은 적 없는 사진이었다. 아..망할... 분명 아까 내 갤러리를 열심히 구경하던 친구가 바꿔놓은 게 틀림없었다.
그보다 정국이가 물어올 때까지 눈치 채지못했던 나의 둔함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연예인!!! 그 요즘 많이 보는 드라마 있잖아! 거기 나오는 남자주인공인데... 그냥 요즘 다 그냥 어..호감배우!"
"드라마요?"
하긴 하계 훈련하느라 바쁜 정국이가 그 드라마를 알리가 있나... 내 말이 독인 된 듯 배경화면을 뚫어져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핸드폰을 가져가려고 손을 뻗자 내 손목을 붙잡고서는 뭘 누르는 듯싶었다. 방금 전 정국이와 통화 외에 마지막으로 내 핸드폰을 만진 사람이 열심히 배우님덕질하는 친구인 덕분에 불안해져서 똥개처럼 안절부절하며 정국이의 표정을 확인하기 바빴다.
"얼마나 좋으면 갤러리 상태가 이래요?"
하트로 가득찬 폴더명에 밑에 적혀있는 사진 개수를 보고 망연자실했다. 폴더명은 언제 바꾼 거고 도대체 숫자 100의 언저리를 돌던 사진 개수가 400장이 넘어가 있는거죠?
눈앞에 있는 정국이도 그렇고 내 데이터도 그렇고... 망할... 내일 가면 한 번 머리채를 잡고 싸우던가 해야지.
"그게... 친구가 팬인데- 걔가 스마트폰이 아니라서, 내 걸로 구경해가지고..."
애절한 눈빛으로 정국이를 바라보다 먼저 눈알을 굴려 시선을 회피하자 정국이는 이내 내 핸드폰을 내게 돌려줬다. 아직 내 말을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아 힐끔힐끔 쳐다봤다. 정국이는 뭔가 말하려는지 입을 열려다 이내 망설이더니 꾹 닫아버렸다. 그리고 한숨을 푹 쉬더니 어깨를 축 느려트렸다. 아... 죄책감 장난 아니네... 아니지, 잘못은 했으니깐 마땅한 거지...
"팬인 건 이해하는데"
"배경 화면은..."
"싫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정국이는 입을 꼭 다문 채 뒷통수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내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내 등을 밀어 아파트 안으로 집어넣었다. 닫힌 유리문 너머 서 있는 정국이를 빤히 쳐다보자 정국이는 내게 얼른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난 바로 그 자리에서 망설임 없이 배우님의 사진을 몽땅 다 삭제해버렸다. 내가 잠시 미쳤지, 감히 정국이를 놔두고 스크린 너머 배우님을... 그 다짐을 마음에 새기며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고서 칫솔을 물고 정국이에게 온 카톡을 확인하는 데 놀라 칫솔을 떨어뜨릴뻔했다. 아무런 말없이 달랑 와있는 정국이의 사진. 그러니깐 셀카. 그날 이후로 내 배경화면에는 그 존엄한 배우님의 얼굴이 아닌 사랑하는 남자친구님의 얼굴이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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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깐 나랑 봐"
자연스럽게 잡아오는 정국이의 손길에 끌려 결국 영화관에 도착했다. 끝까지 진짜 볼 거냐고 내가 징글징글하게 묻자 답답했는지 본인이 직접 티켓까지 예매해왔다. 팝콘 하나, 콜라 하나 들고 영화관에 들어가는 데 아까부터 하품을 하는 정국이가 자꾸만 눈에 밞혔다. 영화관은 역시 평일 심야 타임인지라 아주 깔끔하게 텅 비어있었다.
"근데 나 지인짜아 이제 팬 아니야!"
"괜찮으니깐 집중해서 봐"
정국이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팝콘통을 내밀었다. 괜찮고 안 괜찮고를 떠나서 이제는 안 좋아하다니깐....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었다. 능력 없는 남자를 무자비하게 차버린 여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남자가 휘황찬란하게 변신해 여자에게 한 방을 먹이려다 결국은 알콩달콩 하는 그런 뻔한 스토리. 그래도 한때는 팬이었던 배우님의 얼굴을 보니 반갑긴 했다. 뭐... 요즘 제2의 리즈시절을 맞이하셨다는데. 여자 관객들의 심쿵을 유발하는 장면이라는 제목으로 포털사이트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났던 것이 생각났다. 아 그 장면이 이거라 했었나. 스크린에는 딱 배우님이 거울에 젖은 머리를 살짝씩 쓸어넘기는 모습이 비쳐줬다.
툭-
"누나도 심쿵했어?"
정국이가 귓속말을 해왔다. 뭐..조금 퇴보없이 꾸준한 잘생김에 좀 놀라기는 했지.
"다들 저 장면 보고 심쿵한다던데"
그런 건 어디서 들었나 싶어 고개를 살짝 빼 정국이를 보자 내게 대답을 원하는 듯 눈을 맞춰왔다. 심쿵했나?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조용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정국이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까 괜찮다고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은근히 신경을 안 쓰는 척하면서 신경 쓸 건 다 쓰고 있구나 싶어 속으로만 웃고 스크린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 영화에 집중하려 하자 정국이와 잡고 있던 손이 당겨졌다. 이왕 돈 낸 거 영화 좀 보자, 쫌. 이번에는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고개를 핵 돌리자 정국이는 아까 스크린 속 배우님처럼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심쿵해.
진짜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감정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단어는 유치하지만 심쿵밖에 없었다. 정국이의 손을 따라 살짝씩 이마가 보이는데 앳된 소년에서 남자로 보이는 게 오랜만에 잘생김으로부터 설렘이 느껴졌다. 실감 못 했는데 진짜 남자 다 됐네. 심쿵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어 빤히 쳐다보자 정국이는 민망했는지 후드 모자를 푹 눌러썼다.
아마 정국이가 지금처럼 남자친구가 아니었다면 분명 난 배우님으로 끊긴 줄 알았던 내 덕질을 정국이로 불 지피고 있었을 거다. 물론 외모뿐 아니라 그 실력에 더 빠져버렸겠지. 이제는 내가 아까의 정국이처럼 보라는 영화는 안 보고 정국이를 구경 중이었다. 나 좀 보지. 이렇게 보고 있으면 시선이 느껴져 다시 날 볼 줄 알았는데 계속 스크린에만 고정되어 있는 시선을 뺏기 위해 정국이의 볼에 몰래 방문을 갈려 했는데 정작 도착한 곳은 턱이었다.
드디어 그렇게 바라던 정국이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리고 도망가지 못한 채 눈치를 보고 있는 내게 다가와 또 간지럽게 귓속말을 해왔다.
"누나 심쿵시켜주려고 온 건데"
"나한테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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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정국이2 (데이터조심'ㅅ') |
"어때?" "어우" "아니, 진짜 요즘 왜 그래요?" 요새 지민이 형이 틈만 나면 머리를 쓸어넘기기 시작했다. "야, 이거 요즘 유명한 장면이잖아. 그것도 모르냐?" "어디서 나오는 건데요?" "이거 기사 봐봐" "어?" "어어..? 어! 이 사람! 누나 배경화면에서 봤는데" "작년에 완전 난리났던 배우잖아. 제수씨도 팬이였나 보네?" "그렇게 인기 많아요?" "장난하나- 작년에 여자애들 드라마 봐야한다고 심야훈련 다 뺐잖아." "아... 그랬나" "이번에는 개봉한 영화 꼭 봐야한다고 코치님 찾아간다고 하던데" "누나도 보러가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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