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깝긴 한데...
"그거 진짜 못 들고 와?"
-물어보니깐 들고 가봤자 공항에서 압수 조치 당한대
지금 정국이는 쇼트트랙 월드컵 1차 대회를 중국에 가있다. 오늘도 자신의 주 종목에서 좋은 성적을 내서 메달도 받고 꽃다발도 받았다고 사진을 찍어 보냈다. 작년에는 흰색 꽃이었는데 이번에 강렬한 빨간색 꽃다발인 게 되게 인상 깊었다. 여자인지라 그 꽃다발을 버리고 와야 한다는 말에 내 것도 아닌 데 내가 괜스레 아까웠다. 그래도 2차 대회는 서울에서 개최되니깐 한 번쯤 직접 볼 수 있는 날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근데 지민이 오빠는 괜찮은 거야?"
-살짝 베인 거래
중국에서는 단거리 신예라고 거친 경기 플레이가 특징인 한 젊은 선수가 주목을 받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단거리가 주 종목인 지민이 오빠를 라이벌로 생각하는지 견제를 엄청 하는 데 오늘은 경기 도중에 무리하게 안으로 치고 나오다가 지민이 오빠의 손에 스케이트 날이 스쳐 지나갔다. 딱히 해설위원이 있는 게 아니라 경기 때는 이상함을 못 느끼다가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장갑을 벗더니 코치님에게 가는 모습을 보고 뭔가 문제가 있구나 싶었다.
"경기에는 지장 없는 거야?"
-그런 거 같아. 근데 내 걱정은 안 해?
"넌 걔랑 경기 할 일 없지 않아?"
-내일 계주 있잖아
왓? 이 무슨... 하마터면 욕을 할 뻔한 했다. 당연히 정국이는 주 종목이 단거리가 아니니깐 만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마음 놓고 있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 이제야 걱정돼?
"아... 아니...! 아, 걔는 왜 계주 나오고 그래...씨"
-잘하니깐 나오겠지
정국이의 대답을 듣고 나니 그 선수랑 접점은 피하기 글러먹은 듯싶었다. 경기 플레이를 더럽게 할 뿐이지 실력은 부정할 수 없이 좋으니깐. 아, 다치면 안 되는데. 경기를 하는 건 멋있는데 다치는 게 더 신경 쓰이고 걱정돼서 항상 경기를 볼 때면 조마조마하면서 보는 데 이번 계주는 진짜 심장 꽉 부여잡고 봐야 할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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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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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아, 엄마! 이것만 보고!"
남인지 딸인지 구분을 못 하겠다면서 이번 주말에는 꼭 집에 들르라는 엄마의 전화에 왜 하필 이번 주냐고 반박도 못한 채 조용히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경기 볼 때 딱 혼자서 화면 붙잡으면서 지랄발광하면서 봐야 하는데. 그보다 집에 가면 이것저것 시켜서 경기를 보는 날 방해할 게 뻔했다. 그리고 정말 그러고 있는 중이었다. 아, 진짜 오늘 계주는 집중해서 봐야 하는데. 갈팡질팡하다 결국은 엄마의 부름에 성의 없이 대답하고서는 다시 이어폰을 고쳐끼었다.
이번에도 두 번째이려나. 훈련할 때는 세 번째 주자도 해보고 첫 번째 주자도 해본다는 데 항상 계주경기만 뛰면 정국이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주자로 선발됐다. 만약 그렇게 되면 또 마지막은 정국이가 장식하겠네. 경기가 시작되고 역시나 한국은 지민이 오빠가 스타트를 끊었다. 그리고 뒤이어 자연스럽게 정국이가 나오고. 응? 미친, 쟤 뭐야. 정국이와 같이 트랙을 도는 선수들은 누군가 싶어 보자 제발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그 중국 선수가 트랙을 돌고 있었다.
"집에 와가지고 방에만 박혀있고!! 응? 좀 거실에 나가ㅅ"
아까까지만 해도 여유롭던 마음이 그 중국 선수를 보자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바심이 나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엄마의 잔소리는 가볍게 스킵하고 이제는 두 손을 모은 채 열심히 속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아무런 일 없게 해주세요, 제발. 다행히 아직 경기 초반이라 무난하게 정국이의 순서가 넘어가고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올리자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뭐 보냐?"
"쇼트트랙 경기..."
"니가 그런 걸 언제부터 챙겨봤다고... 어어어!!"
엄마는 날 이상하게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눈이 커져서 내 등짝을 찰싹 때렸다. 어떡해, 2등으로 밀렸어! 분명 내게 잔소리를 하고 있던 엄마의 시선이 치고 올라온 다른 나라 선수 덕분에 화면으로 옮겨져 어느새 나보다 더 열심히 경기를 관람 중이었다. 마지막에서 대부분 경기가 판가름 나니 차분히 경기를 보는 데 자꾸만 엄마가 옆에서 격하게 반응을 하는 탓에 나 또한 신경을 곤두세웠다. 슬슬 경기가 막바지로 다다르면서 내 손에는 홍수가 나기 시작했고 엄마는 화면에 빨려갈 듯싶었다. 드디어, 정국이로 순서가 넘어가고 이제는 정국이가 경기의 승패를 쥐고있었다.
"근데 얘 너랑 같은 고등학교더라"
"응...응..."
엄마가 무슨 말을 거는지도 모르겠고 내 신경은 온통 화면 속 정국이에게 쏠려있었다. 경기가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라서 빙질도 별로 안 좋을 텐데 뒤에 바짝 따라오는 중국 선수도 신경 쓰일 텐데... 거리가 확실히 벌어진 게 아니라 마음 졸이면서 보는데 옆에서 자꾸만 짧게 반응을 해오는 엄마 때문에 더 미칠 뻔했다. 그래도 장거리가 주 종목인 정국이가 체력적으로 우세했는지 아무 탈 없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아씨... 이제야 살 거 같네...
"역시! 마지막 주자인 이유가 다 있다니깐~"
"완전 잘했다..."
마치 내가 경기라도 한 듯 진이 빠진 채 힘 없이 의자 등에 기대자 엄마가 누가 보면 내가 정국인 줄 알겠다며 별꼴이라 했다.
"아니, 쟤 너랑 같은 고등학교 다닌다는 데 알고는 있어?"
"당연히 알지"
"싸인 같은 건 받아놨어?"
"아니? 그런 걸 왜 받아?"
요즘은 엄마보다 자주 보는 게 정국이인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을 하고서 고개를 돌리자 엄마는 날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학교니깐 싸인 받을 기회도 있었을 거 아니야? 너 또 귀찮다고 애들 다 받을 때 안 받았지?"
"그게 어떤 기회인데 좀 꼬셔나 보지!"
어린데 능력 있지 거기다가 얼굴도 반반해, 너 그렇게 맨날 뒹굴거리니깐 황금기회 놓친 거야~ 엄마가 내게 움직이라며 타박을 하더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엄마가 닫고 나간 문을 한참 쳐다보며 엄마가 나가면서 흘린 말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웃음이 터졌다. 맞다, 엄마는 모르지. 아, 왜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어머니, 제가 그 황금기회를 놓치지 않고 학교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열렬한 전정국 짝사랑으로 지금은 쌍방통행 중입니다! 아마 엄마는 그 꼬셔보라는 정국이와 이미 연애한지 2년이 다 되어 간다는 소리를 들으면 뒷목을 잡을 듯싶었다.
"우리 엄마한테 그런 소리도 다 듣고"
"정국이 엄청 사랑받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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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한국에서의 경기 날이 다가왔다. 중국에서 돌아온 후에 바로 다음 주에 잡힌 경기 일정이라 정국이는 짧은 시간 동안 또 준비를 한다고 만나지도 못하고 통화 또한 단절이었다. 그래서 이번 경기를 보러 간다고 말을 못 했는데 그전에 내게 묻지 않은 것을 보니 정국이도 내가 온다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있는 듯싶었다. 손에 둥글게 입장권 팔찌를 하고서 경기장에 들어가 선수들 대기장소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아, 추워라. 이놈의 빙상장을 몇 번을 와도 이 찬기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가방 속에서 담요를 꺼내 덮었다. 그리고 밑에서 언제 나왔는지 모를 정국이가 서있었다.
"안녕"
아마 소리는 냈지만 들리지도 않을 거다. 정국이는 입모양을 보고 알아내려는지 눈을 찡그리는 데 못 알아들은 듯 웃기만 했다. 이 많은 인파에서 날 찾아낸 것만으로도 기특해서 수줍게 담요에서 손을 꺼내 손하트를 만들자 그건 용케 알아봤는지 실실 웃고서는 크게 입모양으로 답장을 보냈다.
'나도'
그리고서는 흘려내린 담요를 제대로 덮으라며 제스쳐를 보내왔다. 담요를 다시 제대로 덮은 후 정국이를 보자 뒤이어 들어온 한국 선수들과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봤으니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보고 싶고 눈도 마주치고 싶으나 오늘은 경기 날이니 최대한 경기에만 집중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선수들이 한 명씩 웜업을 시작하고 경기일정을 살펴봤다. 500m 준결승, 결승전 그리고 시상식. 정빙을 하고 1500m 준결승, 결승전 그리고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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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m는 원래 정국이의 종목이 아니니 쉬엄쉬엄 봤고 1500m는 주 종목이니 당장이라도 링크장에 올라갈 기세로 관람했다. 가장 큰 적수였던 외국선수가 준결승전에서 어이없게 넘어지는 바람에 결승전에 올라오지 못해 그나마 덜 긴장한 상태에서 봤던 것 같았다. 월드컵은 한 종목당 경기가 끝난 후 바로 시상식을 하는 데 정국이의시상식을 지켜보는 데 웃음이 나 죽는 줄 알았다. 외국 선수들 사이에 껴서 얼굴에 티 나게 나 어색해요를 쓰고서 대기를 하는 데 그 모습이 지금은 보기 힘든 옛날 모습이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지막까지 기다리다가 정국이의 이름이 호명되고 메달도 받고 꽃다발을 받아 인사를 꾸벅하는 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박수를 치면서 호응을 했다. 자랑스러워 죽겠네. 빙판장 한가운데에 서있는 정국이는 내 쪽 관객석을 보며 두리번거렸다. 이 수많은 관객들 중에 하나인 나는 나한테 시선을 보내는 건가 아니면 그냥 오늘 응원해준 관객들한테 감사하다고 하는 건가 아리송했다.
"대체 어딜 보는 거야..."
나랑 눈이 마주친 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커져 고개를 돌리자 전광판에는 정국이가 잡혀있었다. 전광판은 정국이의 웃는 모습을 열심히 담고 있었다. 그래, 잘생긴 얼굴은 크게 크게 봐야지.
'누나'
누나? 입모양이 누나라고 한 것 같아 정국이를 보며 슬며시 내 검지로 날 가리키자 정국이는 한 번 다시 웃고서는 자신이 받은 꽃다발을 공중에 내밀었다. 비록 닿을 수 없는 거리였지만 정확히 날 향한 것 같아서 이미 꽃다발을 받은 사람 마냥 베실베실 웃고 전광판을 다시 보자 전광판 속 정국이도 나처럼 웃고 있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뒤돌아서 돌아가는 정국이의 뒷모습을 보는 데 참 오늘처럼 우리 사이에 애틋한 날이 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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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경기가 끝난 후에 선발전처럼 대기실을 가려다가 이건 월드컵이니 다른 나라 선수들도 있을 테니 대기실을 가는 건 영 아닌 것 같아 선수들이 퇴근하는 게이트로 느긋느긋 걸어갔다. 포털사이트 스포츠란에는 오늘 경기에 대해서 몇 개 기사들이 떴는데 하나는 경기 결과에 관한 내용이었고 하나는 정국이의 세리머니에 관한 기사였다. 기사를 눌러 찬찬히 다 읽어보고 댓글을 보는 데 찔려 죽는 줄 알았다.
[축하드려요!!]
[누구한테 하는걸까ㅋㅋㅋㅋ]
[여자친구한테 하는 거 아닌가?ㅋㅋㅋ 금메달 축하드려요!]
난 전광판에 비친 정국이가 누나라고 하지 않으면 모를 뻔했는데 무서운 사람들... 몸을 부르르 떨고 게이트로 가자 벌써 몇몇 선수들 사진도 찍어주고 싸인을 해준다고 바빴다. 저기 인파 사이에 묻힌 지민이 오빠도 보였고 게이트에서 나오는 정국이에게 몰려가는 팬들도 있었다. 그래도 자기를 응원해주는 팬이라고 어색해하면서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면서 열심히 싸인도 해주고 사진도 찍어주는 데 그 모습이 훈훈해 멀찍이 바라보다가 인사를 꾸벅 꾸벅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오는 정국이와 눈이 마주쳤다.
"싸인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당연하죠"
딱히 싸인 받을 종이가 없어서 그냥 핸드폰 메모장을 켜서 내밀었다. 멀리서 망설임 없이 걸어오는 정국이가 싸인을 할 생각은 없는지 핸드폰을 받고서 날 빤히 내려다봤다. 오랜만에 본 건 이해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얼굴 구경을 하면 내가... 좀 많이 힘들다...
"피곤하세요? 근데 제가 부탁을 받아서..."
"아, 그럼 제 팬 아니세요?"
세상에, 전정국이 상황극을 받아치다니. 일부러 분위기를 바꾸려고 먼저 말을 꺼냈을 뿐이었는데.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뭐라고 대답해줄까 하다가 저번 주에 엄마가 정국이에게 싸인 하나 안 받았다고 잔소리를 한 게 생각이 나 정국이에게 여사님이라고 적어달라고 부탁하자 눈을 크게 뜨더니 날 바라봤다.
"아, 저희 엄마가 팬이세요!"
내 말 한 마디에 정국이의 눈에 동공 지진이 났다. 이런 흐름은 예상 못 했겠지.
"뭐야? 진짜야?"
"네? 뭐가요?"
"아- 누나-"
내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정국이에게 무너져내릴 듯 말듯 했다. 오랜만에 쩔절 매는 정국이의 모습에 나쁜 마음이 들어서 능청스럽게 진짜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정국이는 세상 무너진 사람처럼 반응을 보였다. 정국이는 자신이 한 싸인 마음에 들지 않은지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아예 내게 꽃다발을 넘기고 핸드폰을 잡고서 싸인을 하는 데 집중했다. 장난 하나에 이런 반응이라니. 아, 진짜 널 어떡하냐.
"그냥 대충해~"
"아, 이거 종이가 아니라서 잘 안 써진다."
"오늘 완전 잘했어-"
아직도 핸드폰을 잡고 씨름하는 정국이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해주자 그 와중에 고개를 들어 살며시 웃었다. 항상 해주는 말인데 오늘도 정국이는 한결같이 웃으며 좋아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되면 포기할 줄 알았는데 내가 간과했던 사실이 있었다. 반드시 하고자 하는 일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정국이의 성격. 결국 그놈의 싸인에 집착을 하길래 내가 먼저 핸드폰을 뺏어가버렸다. 멀어지는 핸드폰을 아련하게 보는 정국이는 진짜 드릴 거냐며 재차 물어왔다. 좀 더 놀려볼까 하다가 경기까지 하고 온 애한테 너무 했나 싶어 아니라고 하자 그제야 정국이는 한시름 놓은 듯싶었다.
"회색 옷이길래 작년처럼 흰색 꽃이었으면 했는데"
"잘 어울리네."
핸드폰을 주섬주섬 주머니에 넣다가 들리는 정국이의 말에 손에 들린 빨간 꽃다발을 내려봤다. 나처럼 회색 후드집업을 입고 있는 정국이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맞네, 잘 어울리네.
"나 말고 누나"
정국이가 내 손을 잡아 다시 꽃다발을 내 쪽을 밀었다. 정국이의 시선을 감당하기 힘들어 꽃다발에 시선을 옮겼다. 그럼, 이거 내꺼다! 5살 남자아이가 장난감을 소유하듯 개구지게 소리치고 괜스레 쑥스러워져서 꽃다발을 품에 안아버렸다. 항상 정국이가 보내주던 사진으로만 봤던 시상식 꽃다발을 직접 받아보니 사진보다 더 예뻤다. 항상 쓰레기통에 들어갈 생각만 하면 마음 아팠는데 내 품으로 오다니!
"한국에서 경기하니깐 진짜 좋다- 역시 경기는 직관이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