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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같은 배신자는 죽어 마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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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한 마지막 외침을 뒤로한 채, 소녀는 바닥에서 흥건히 피어오르는 한 송이의 빨간 꽃이 되었다.
우당탕탕!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일곱 명의 무한지구대 이야기
<응답하라112>
- 미스터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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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MBS 아침 7시 뉴스입니다. 첫 소식입니다. 어제 오후,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 10대 소녀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경찰은 자살이 아닌 타살의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김다영 기자가 보도합니다."
[서울 울림구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 백모양이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울림경찰서는 어제 오후 6시 10분쯤, 아파트 화단 앞 보도에서 숨진 백양을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최초 발견자는 아파트 경비원이었습니다.]
- 순찰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명 소리가 나더니 바로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급히 여기로 뛰어왔는데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저쪽에 쓰러져 있었어요.
[발견 당시 백양의 유서는 그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찰은 백양이 숨지기 이틀 전, 오토바이 뺑소니를 자수하기 위해 인근 파출소에 들렸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보복성 살인으로 보고 수사의 방향을 틀었습니다. 한편 경찰은 백양의 시신을 정밀하게 감식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옮겨 감식에 들어갔습니다. 감식 결과는 오늘 오후에 밝히기로 했습니다. MBS 뉴스, 김다영입니다.]
"이어서 다음 소식입니다. 박혜근 새천년당 대선후보가 의경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경찰 증원과 검경(검찰과 경찰) 수사권 조정 등을 내용으로 한 '경찰 공약'을 내세워 큰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강준희 기자가 보도합니다."
뜻하지 않게 접하게 된 아침 뉴스에 덜컥 겁이 났다. 침대에 일자로 누워 있던 동우는 오른손으로 그 근처를 더듬더듬 거렸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무서운 영화라도 본 것처럼 심장 뛰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내가 왜 이러지? 안되겠다 싶었는지 스킨을 바르고 있는 호원에게 말을 건넨다.
"호원아, 리모컨으로 저것 좀 꺼주라…."
팔을 쭉 뻗어 TV를 가리키자,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들기고 있던 호원이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나 아직 다 안 발랐는데…. 하지만 그 말도 잠시, 손바닥에 촉촉하게 남아있는 스킨을 손등에 대충 펴 바르더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을 들춰내가며 리모컨을 찾기 시작하는 호원이었다.
"왜 안보이지? 아까 분명 이쯤에다가 던져놓은 것 같은데…."
낑낑거리며 리모컨과 숨바꼭질을 하는 그의 모습을 두 눈으로 한참 쫓다가, 머리맡에 있는 베개를 덥석 잡고는 곰 인형처럼 품 안에 꼭 껴안는 동우였다. 이렇게 하면 살짝이라도 불안감이 가실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MBS 뉴스, 강준희 기자입ㄴ-]
그 순간, TV가 소리 없이 뚝 꺼지면서 화면이 새카맣게 변했다. 먼지가 자잘하게 달라붙어있는 맨질맨질한 유리 화면은 리모컨을 들고 있는 호원과 침대에 누워있는 동우를 또렷하게 품고 있었다.
"요즘 기자들은 외모 보고 뽑나?"
아까 강준흰가 김준흰가 하는 그 기자 잘생겼네…. 호원이 리모컨을 공중에다가 붕 던지면서 무심코 말하자, 동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한껏 지어보였다. 그의 질투심을 유발할 수 있는, 흔치않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 그럼 다시 안틀고 뭐해~ 빨리 틀어줘!"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던 리모컨은 정확히 호원의 손 위로 떨어졌고, 이와 동시에 그는 아귀에 힘을 주어 리모컨을 꽉 잡았다. 착, 하고 리모컨이 손에 감기는 시원시원한 소리가 났다. 그러고 나서 동우에게 내뱉은 말은,
"안.돼."
단호하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하고는 은근슬쩍 바지 뒷주머니에 리모컨을 꽂는다. 덕분에 한쪽 엉덩이가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이렇게 질투 아닌 질투를 하는 그의 귀여운 모습을 보니,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 동우였다. 왠지 모르게 살살 밀려오는 소소한 행복감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옷장에서 보라색 후드티를 꺼내 입는 호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껴안고 있던 베개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켜니 그가 쓰는 샴푸향이 은은하게 났다. 두 눈을 감고 계속 맡고 있자니 자상한 그의 성격과 참 잘 어울리는 향기인 것 같다. 그렇게 은은한 향기에 아롱아롱 취해 있는데, 이마에 손이 얹어지는 게 느껴졌다. 눈을 뜨니, 반대편 손으로 자신의 이마에 손을 짚고 있는 호원이 보였다.
"열은 많이 내린 것 같네. 으슬으슬한 건 괜찮고?"
동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폭풍같이 여러 번 끄덕이고 싶었지만 뇌가 흔들리는 이상한 느낌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뭐랄까…. 반쯤 채운 유리컵을 좌우로 흔들면, 반박자로 찰랑이는 물과 같은 느낌이었다. 으아, 어지러워라….
그 모습을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짓더니 이불을 끌어당겨 동우의 목 부근까지 덮어주는 호원이었다. 꼼짝없이 누워있는 동우는 눈두덩이랑 아랫입술이 퉁퉁 부어있는 몹쓸 몰골이었다. 워낙 눈물이 많은 편이라 한 번 울면 정말 심하게 울었다. 루돌프 마냥 코끝이 빨개져가지고 코까지 킁킁 들이키며 엉엉 울거나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훌쩍 거리면서 엄청 오래 운다던가 둘 중 하나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젯밤에는 후자 쪽이었다. 아마도 혼자 울다 지쳐 잠이 들었을 것이다. 참 희한한 게, 태평양 바닷물을 한 데로 싹싹 끌어 모아 눈물샘에 꾹꾹 압축시켜놨는지,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눈물을 한없이 주륵주륵 쏟아냈다.
'또 울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지만, 호원은 동우가 우는 모습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우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실제로 보지 않은 사람을 모를 것이다.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거나 혀끝으로 할짝이면서 우는데, 정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그 모습을 보고 성 정체성이 흔들리다가 지금 이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아……. 정말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언젠가 한 번은 동우를 울려보고 싶다는 못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런 불순한 생각을 한 내가 나쁜 놈이다!)
그만큼 호원의 눈에 비친 동우는, 우는 게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누구 애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퉁퉁 부어도 참 예쁘네.
"이불은 덮으라고 있는 거니까 걷어차지 말고 푹 덮고 있어. 안 그러면 빨리 안 낫는 거 알지?"
감기 몸살이 의외로 오래 간다? 그러면서 침대 가장자리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동우가 덮고 있는 이불을 여기저기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접힌 부분은 똑바로 펴주고, 침대 바깥으로 삐져나온 부분은 매트리스 위로 올려주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본 호원은 콧바람까지 내가며 피식 웃었다.
"장동우, 덜 아픈가 보네? 이게 뭐야…. 발도 덮어야 돼."
이불을 덮어주려 하자, 반항하는 것 마냥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 거린다.
"안 돼! 발바닥 뜨겁단 말이야…."
툴툴 투정부리는 아이처럼 아랫입술을 삐죽이며 말한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면서 꾸중을 했지만, 사실 포도알 10개가 꼬물꼬물 거리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물론 발가락 마디에 털이 달려있어서 좀 징그럽긴 하지만…. 음…, 뭐…. 참고 봐줄 만은 했다.
"집에 모기 돌아다니던데, 발바닥 한 가운데에 모기 물려봐야 정신 차리지."
그러니까 얌전히 덮고 있어. 살기 위해 마구 꼼지락거리는 털 달린 포도알 10개를 가볍게 무시하고, 이불을 싸악 덮어주었다.
*
한적하기만 했던 무한지구대는 어제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게 되었다. 조그맣던 자살 사건이 하룻밤 만에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이웃에 '이'자도 관심 없던 이 무심한 사람들은, 이렇게 불미스럽고 아주 자극적인 일에만 너도 나도 관심을 보인다. 그냥 '보이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쏟아 붓는' 것 같다. 나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지독하게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건 현장 근처를 둥글게, 아주 빼곡히 에워싼 아파트 입주민들의 모습을 말이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우산까지 들고 나오는 적극적인 모습에 그만 크나큰 감동을 먹고야 말았다. '저기요, 지금 무슨 일 일어난 거래요?'라면서 처음 마주하는 이웃에게 서슴없이 말을 거는 아이러니한 모습…. '아니 글쎄, 본인 성적을 비관해서 자살했다네요?' 사건을 파악 중인 경찰이 감히 내리지도 못한 결론을, 마치 밝혀진 사실인 것 마냥 여기저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바퀴벌레 같은 모습…. '맞아요, 그렇다더라고요.' 옆에서 맞장구를 치며 유언비어를 거드는 추악한 모습….
덕분에 죽은 여학생은 하룻밤 만에 '성적 비관'으로 '자살'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이토록 이웃에게 관심이 많았던 것일까.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관심이 많았길래 이러는 걸까. 참 이기적인 모습이 아닌가 싶다.
폴리스 라인을 쳐놓고 수사를 하다가 타살의 흔적이 발견 되었는지 울림경찰서에서는, 어제 급히 귀국한 사망자의 어머니에게 동의를 얻어 곧바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시체 부검을 의뢰했다. 이렇게 자살이 아닌 타살로 점차 수사 방향이 흘러가는 가운데, 우리는 사건이 일어난 어제 저녁부터 순찰 횟수를 대폭 늘려 밤낮 구분 없이 순찰을 돌아야했다. 바빠진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무한지구대에서 군복무 중인 의경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구대 곳곳에 설치된 전화기는 오늘 오전 내내 불이 나도록 따르릉 따르릉 울려댔다. 타살이라는 말이 그새 퍼졌는지, 잔뜩 예민해져서 불안감에 떠는 주민들과 사건에 협조해 달라는 울림경찰서, 자세한 취재를 원하는 언론사 기자들, 용의자 선상에 올라가 있는 학생들의 해당 학교 관계자들 등으로 말이다. 이러면 안 되지만, 오죽 바빴으면 몇몇 전화는 의경들에게 받아달라고 부탁까지 했겠는가. 따르릉 거리는 전화 벨소리만 들어도 아주 그냥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지겹다, 지겨워….
[아니, 대체 무슨 근거로 우리 학교 학생을 함부로 용의 선상에 올려가지고 교내 학습 분위기를 저해합니까? 예? 이게 말이 되냐고요!!!]
어디서 개가 짖나. 이 사람이야 말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김경위의 경찰대 동기인, 구경위가 이끄는 수사팀이 밤을 꼴딱 지새우며 조사한 결과, 어떤 구린내를 맡았으니 용의자 중 하나로 지목한 게 아니겠는가. '당신 학교 학생이 범인입니다.'라고 그 한 명만 콕 집어서 말한 게 아니라, 리스트에 올라간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통보했을 뿐인데 저렇게 난리법석이다.
아휴, 시끄러워….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방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수화기에서 귀를 뗀 이성열 순경은 귀를 후볐다. 이 때, 말을 하다가 스스로 감정이 격해졌는지 전화 건너편에서 거세게 호통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바람에 심기가 불편해진 이순경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야 말았다.
아, 진짜…. 저 인간이 경찰을 우습게보나…. 바빠 죽겠는데 지랄일세.
참다못한 그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더니 학교 관계자에게 한 마디 하기 위해, 벼르는 것 마냥 제복 셔츠를 팔꿈치 위로 말아 올리고는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레 화를 조절해가며 한 마디, 한 마디, 천천히 읊조렸다.
"팡팡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만큼 결백하다면야, 이렇게 보란 듯이 용의자 선상에 오를 리 없죠. 그러니까 제 말은, 그쪽 학생 관리나 똑바로 하시라고요…. 그리고 지금 전화가 많이 밀려와서 계속 상대해 줄 시간이 없으니, 이만 먼저 끊겠습니다."
탁.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지만, 끓어오르는 감정이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는지 앞머리를 향해 후…, 하며 한숨을 부는 걸로 조금이나마 화를 삭이는 이순경이었다. 덕분에 이마를 가리고 있던 그의 앞머리가 위로 휘날리며 반쪽 밖에 없는 눈썹이 보였다.
"어? 으디긌어요?"
정수기에서 물을 떠마시던 김의경이 종이컵을 입에 문 채 곁으로 다가왔다.
뭘 어디가? 이순경이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정리하면서 묻자, 김의경은 물고 있던 종이컵을 그의 책상 위에 살포시 내려놓더니 손을 뻗어 그의 앞머리를 들췄다.
"이거 말이에요, 이거."
그러고는 이성열 순경의 생기다가 만 반쪽짜리 눈썹을 검지로 꾹꾹 눌러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헐…. 진짜 없어…. 모나리자 돋네요!
이건 또 뭐람…. 이른 아침부터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들러붙던 학교 관계자를 간신히 떼어놨더니 이번엔 이놈이다. 다시금 슬슬 끓어오르는 화를 참기 위해 이를 악 물고, 두 눈을 꾸욱 감았다 떠보는 성열이었다. 이 인간은 왜 이리도 자신을 가만 놔두지 않는 건가 싶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김의경에게는 이순경의 반쪽 눈썹이 꽤나 신기했던 건지 이번에는 손끝으로 살살 어루만져 본다. 헐…. 이 부분은 태초부터 눈썹이 없었나봐요?
그 말에 이순경의 눈썹이 꿈틀 접히며 미간이 좁아졌다.
"그래, 이 자식아! 내 별명이 '열나리자'다. 됐냐? 어쩔래."
주걱으로 밥을 퍼서 그릇에 꾹꾹 눌러 담듯이, 심기가 불편해진 감정을 가득 담아 대답해주고는 그만 만지라는 의미로 얼굴을 뒤로 빼면서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 그러자 아쉬운 듯 눈썹에서 손을 뗀 김의경이 항복한다는 듯 손바닥을 들어 올려 보이며 말했다.
"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안 만질게요."
그러고는 손을 뻗어 흐트러진 이순경의 앞머리를 보기 좋게 정리해주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김의경은 보면 볼수록 쓸데없이 눈치 하나는 참 빨랐다. 그래서 더 얄밉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어린놈이 군대 생활 좀 할 줄 아네. 그러다 문득 스치는 이상한 느낌에 위를 올려다보니, 이 상황이 퍽이나 재밌는지 김의경 입가에 미소가 두리둥실 걸려있다. 뭐야, 저놈이 그럼 그렇지…. 속으로 궁시렁대고 있는 그 때, 김의경의 등 뒤로 어디론가 허둥지둥 향하는 이호원 순경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어!!!!!!!!!!!!!!!!!!!!!!!!!!!!!!!!!
이성열 순경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꼴뚜기 같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하는 김의경이었다.
"이순경!!!!!"
목에 핏대를 세우며 쩌렁쩌렁 외치는 이순경의 모습을 보고 괜히 머쓱해진 김의경은 방어 자세를 풀더니 뒤통수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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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경, 장경장님 왜 안 오셔?"
대충 사태 파악을 끝낸 울림경찰서에서 긴급히 내려 보낸 협조 공문을 받으러 가던 참이었다. 담당 형사와 통화중이라 공문을 받지 못하는 김경위 대신 이를 받기 위해 팩스기로 뛰어가는 이호원 순경과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달려와 그의 팔을 붙잡은 뒤 휙 돌려세우며 묻는 이성열 순경이었다. 어찌나 박력 있게 돌려세우던지 반동으로 호원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덕분에 뚜벅뚜벅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던 그의 구두소리가 어긋나면서 반대편 구두코를 밟고 말았다. 으악! 호원의 입에서 외마디 외침이 튀어나왔다. 성열이 미안하다면서 잡고 있던 팔을 놔주었다. 어제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인데 이렇게 불러 세우다니…. 호원은 허리를 숙여 더러워진 구두코를 제 손으로 탁탁 털어냈다.
"야, 근데 장경장님 왜 안 오시냐니깐?"
"아, 미안…. 내가 지금 바빠서…."
그러고 나서 공문을 받기 위해 자리를 뜨려하는데 성열이 팔을 다시 붙잡고는 쉽사리 놔주려 하지 않았다. 호원은 자신이 도망갈세라 팔을 꽉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얗게 질린 손등 위로 여러 갈래 나뉘어져 있는 푸르스름한 핏줄이 보였다.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 이 한 마디면 되는데 그 한 마디도 말해주기 힘들만큼 그렇게 바쁘냐?"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성열의 말투에, 시선을 그에게 맞추는 호원이었다. 아마도 어제부터 정신없이 밀려드는 업무 때문에 잔뜩 예민해져서 이러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성열의 얼굴이 한없이 딱딱하게만 느껴진다.
"뭐야, 갑자기 왜 오버하고 그래…. 장경장님 일은 나도 몰라."
혹여나 싸움으로 번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말하는 호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착잡해졌다.
동우가 점심은 챙겨 먹었을까? 한 가지 생각이 피어오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약은 먹었으려나? 몸은 따뜻하게 하고 있으려나? 동우는 새벽녘부터 몸살이 스멀스멀 오기 시작하더니 결근을 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감기까지 오고…. 아침에는 그나마 좀 가라앉은 편이라서 한시름 놨을 뿐이다. 남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동우가 본인의 집에서 몸조리하고 있는 줄 알겠지만, 사실 호원의 집에서 누워있는 줄 어느 누가 예상이나 하겠는가. 하지만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기에 장경장의 일을 모르는 척 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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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 경위는 지금 당장 협조 공문과 함께 보낸 '인피니트팰리스 살인사건 정리 문서' 3페이지를 펴봅니다. 실시.]
"아, 잠깐만, 잠깐만! 아직 내 앞으로 배달이 안 왔-"
[뭔 배달이야, 배달은…. 단어 선택 그거 밖에 못하냐? 그리고 부하 시키지 말고 네가 직접 가져오는 게 더 빠르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
"넌 좀 가만히 닥치고 있어봐."
수화기에서 귀를 뗀 김경위는 의자를 빙글 돌려 팩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보았다. 좋지 않은 시력 탓에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너…너…!
"야!!!!!!!!!! 이성열!!!!!! 너 이호원 순경 붙잡고 뭐하는 거야!!!!!!!!!!! 이제 이런 식으로 나 골탕 먹이겠다 이거야?! 야!!!!! 얼른 떨어져!!!!!!!!"
썩 떨어져!!!!!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바락바락 소리치자 저 멀리서 움찔거리는 이성열 순경이 보였다. 으악, 미…미친놈이다!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 마냥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이순경이었다.
쯧쯧…. 도둑이 제 발 저리네. 그 모습을 계속 응시하고 있다가 이호원 순경의 팔을 놔주는 것을 기어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나서야 시선을 거두어 다시 귓가에 수화기를 대는 김경위였다. 여보세요? 라고 하자 숨이 넘어갈 듯이 캭캭대고 있는 구경위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얜 또 뭐야…. 김경위는 앞머리를 한가득 움켜쥐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재밌냐?
[어, 재밌다! 너 발령받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적이 생겼냐? 왜, 부하가 너 골탕 먹이시겠대?]
"좋은 말로 할 때 구만회라…."
한껏 신이 나서 캭캭대던 구경위는 김경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뚝 멈췄다. 너 진짜 치사하게시리 사람 이름 갖고 그러는 거 아니다, 김성규. 협박하는 어투로 으르렁 거리며 말하지만 이빨 빠진 호랑이 마냥 눈꼽만큼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에 질세라 쐐기를 박으려고 입을 여는데, 때마침 두툼한 문서가 책상 한 켠에 살포시 놓이는 게 주변시야로 들어왔다. 이러한 인기척에 김경위는 수화기를 잠시 책상 위에 내려놓더니, 팔을 쭉 뻗어 사건이 정리된 문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대충 어떤 내용인지 훑어보기 위해 팔랑팔랑 몇 장 넘겨보고는 이호원 순경을 올려다봤다.
"스테이플러로 찍어 오기까지 했네요? 수고했어요, 이순경."
시간 뺏어서 미안해요. 그럼 보던 일 마저 보세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잠시 내려놓았던 수화기를 들었다.
[수고했어요, 이순경~]
시끄러, 임마.
*
"밥은?"
[먹었어….]
"약은?"
[그것도 먹었어….]
"몸은?"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 말이 목구멍까지 꾹 올라왔지만 목에 힘을 주어 간신히 꿀꺽 삼켜내는 이호원 순경이었다. 혀끝을 조금 내밀어 마른 입술을 훔쳐본다. 진정이 되지 않는지 바닥에 이리저리 나뒹구는 담배꽁초를 구두 끝으로 몇 번 비비다가 저 멀리 차버렸다. 하지만 타들어가는 마음은 그리 쉽게 가실 리 없었다. 지금 당장 여기서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막상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심란함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던 그 때 마침 끼이익, 하고 뒷문이 열리는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라 통화를 급하게 마무리했다.
"어…. 몸조리 잘하고, 그럼 이만 끊을게."
엄지로 통화종료 버튼을 다다다다 연타하고 뒤를 휙 돌아보자, 그 시선 끝에는 팔짱을 낀 채 짝다리를 짚고 삐딱하게 서있는 이성열 순경이 있었다.
"누구야?"
엄마야, 엄마….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이야기하자, 수긍하듯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성열 순경이었다.
"계속 통화해도 되는데 왜 그리 급하게 끊고 그래…. 대충 듣자하니, 어머니 편찮으신 것 같은데…. 많이 편찮으셔?"
그러더니 팔짱을 풀고는 호원의 얼굴을 유심히 하나하나 뜯어보며 한 마디 툭 던진다.
"근데 어머니랑 통화한 거 맞아?"
응? 당황한 호원은 두 눈을 깜빡였다. 질문의 요지가 뭐지? 혹시 나를 의심하는건가? 이게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눈앞에 닥친 이 난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뇌 회전 속도를 최고로 풀가동하여 빠릿빠릿하게 이리저리 굴렸으나 이미 당황해버린 머릿속은 이렇다 할 뾰족한 묘안을 내놓지 못했다. 있으면 무엇하리, 이 상황에서는 무용지물인 것을…. 온갖 것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는 바람에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냈다. 그러고는 '에라, 모르겠다.'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성열이가 집요하게 추궁하기 시작하면 고향에 계신 엄마랑 통화한 거라고 끝까지 우길 심산이었다.
"근데 너 사투리 안 쓰던데…."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슬쩍 짓는 성열이었다.
*
"어차피 이렇게 만날 거면서 팩스는 왜 넣은 거냐? 귀가 따갑도록 전화로 사건 얘기는 왜 한 거냐?"
장난 하냐? 장난해? 장난 하냐고…. 만나서 줘도 됐을 거 아냐!!! 발을 버둥버둥, 신경질을 팅팅 부리며 손에 쥐고 있던 문서를 구경위 앞으로 거칠게 집어던졌다. 문서가 공중에서 부채처럼 촤라락 펼쳐지더니 팔락이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하강했다.
혹여나 바닥에 떨어질라 급히 받아든 구경위가 머리를 한 바퀴 돌려 목운동을 하더니, 좀 전에 김경위가 했던 대로 똑같이 그의 앞으로 집어던졌다. 아니, 내리꽂았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바깥에서 볼 줄 미리 알았으면 내가 팩스를 넣었겠냐? 네가 이해력이 딸릴 줄 미리 알았으면 내가 미쳤다고 전화로 구구절절 얘기했겠냐고!"
"야, 임마!!!!!!!!!!! 구만회!!!!!!!!"
테이블에 문서를 찰싹 내려치면서 버럭 소리 지르는 성규에게 뭐라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주위를 쓰윽 둘러보니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다 여기로 쏠려있어서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만회였다. 아, 창피하다, 창피해…. 경찰이라는 작자가 말싸움은 목소리 큰사람이 이기는 거라는 걸 쓸데없이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배울 만큼 배웠다는 놈이 보는 눈들이 많은 곳에서 쪽팔리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됐다, 됐어…. 말을 말자…. 그러다가 잠시 후 평정심을 되찾고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다시 한 번 자세하게 말해줄게. 이번 사건이 어떻게 된 거냐면-"
"됐어. 안 들어."
팔짱을 낀 채 도도하게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성규였다. 마치 '흥! 더 이상 당신의 말은 듣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는 지체 높으신 귀족 부인처럼 말이다. 만회는 성규를 보며 떫은 미소를 지었다.
"꼭 한 대 맞아야지 정신을 차릴 거냐?"
*
"사건이 발생한 날짜는 2012년 9월 4일 오후 6시 5분 경. 최초로 출동한 울림경찰서 소속 무한지구대 경찰들이 발견했을 당시 시각은 정확히 5분이 지난 6시 10분. 엥? 이거 뭐야…. 3분 안에 출동 안했네. 엄연한 늦장 대응인데?"
혹시나 잘못 읽은 건가 싶어, 사건 문서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다시 한 번 더듬더듬 읽어보는 만회였다. 여섯…시 십 분. 음…. 예정대로라면 8분에 도착해야 하는 건데? 그 모습을 보며 성규는 기가 차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이거 5분이 얼마나 빨리 출동한 건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사건 접수하고 후다닥 순찰차 시동 켜고, 신호 준수하면서 사건 현장 진입해서 그래."
"순찰차는 폼으로 타고 다니냐? 이러면 네 개인차로 출동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사이렌은 키라고 있는 거다."
알겠냐, 병신아.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말에 언짢았는지 불쾌한 표정이 성규의 얼굴을 스쳤다. 손을 들더니 하던 이야기나 마저 지껄여보란 식으로 손짓을 한다.
"피해자는 무한고에 다니는 백아혼. 나이는 19세. 피해자가 발견된 곳은 아파트 단지 화단 앞 보도. 최초 발견자는 아파트 경비원. 경비원의 진술에 따르면, 비명소리가 나더니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
여기까지 말을 마치자, 만회는 손에 쥐고 있던 문서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최신형 태블릿 PC. 화면을 검지로 밀어서 잠금 해제 하더니 특정 어플을 탭하여 실행시켰다. 동기화를 위해 잠시 로딩이 되는가 싶더니 곧 하얀 배경에 검은 글자가 빼곡한 게 떴다. 말 그대로 하얀 건 현대판 종이요, 검은 건 글씨이니라….
손가락을 계속 위로 올리자 특정 페이지들이 휙휙 올라왔다. 그러다가 찾던 걸 발견했는지 동작을 멈추고는 태블릿을 반대로 돌려 성규에게 쓰윽 내밀었다.
"우리가 도착하고 주변을 수사한 결과, 피해자 옆에 나뭇가지들이 이렇게 잘게 흩어져 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이점을 찾아내지 못했어. 아마 추락하는 과정에서 나무 가장자리에 부딪힌 거겠지. 그리고 옥상에서 피해자의 가방을 발견한 것 말고는 유서 한 장 나오지 않았어. 물론 집안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지. 음…. 그리고 등교한 흔적은 분명히 있는데 집에 돌아온 흔적은 아예 찾을 수 없었어. 혹시나 해서 엘리베이터에 설치되어 있는 폐쇄회로 TV를 돌려봤는데 하교 후 집에 들르지 않고 곧장 옥상으로 향하는 모습이 찍혔어."
나뭇가지들이 자잘하게 흩어져 있는 사진, 옥상에서 발견한 피해자의 가방 사진 등 여러 가지 사진들을 차례대로 보여주다가 이번에는 CCTV에 찍힌 피해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충동적인 자살이 아닌 건가 싶은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어. 근데 그게 따지고 보면 보통 쉬운 일이 아니거든."
"왜?"
"아무리 충동적이라고 해도 유서 없이 자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돼. 너 마포대교 생명의 다리 알지? 자살하기 위해 유서 한 장 없이 마포대교를 찾은 사람들도, 죽기 전에는 다리 난간에 짧게나마 마지막 유서를 쓰고 가. 예전에 거기 가면 유서들 때문에 다리 난간이 새카맸어. 엄마가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이야기, 사업 실패로 이렇게 떠나지만 엄마 말씀 잘 들으라는 이야기, 대학 입시의 문턱을 넘지 못한 삼수생의 마지막 이야기 등으로 말이지…. 한(恨)을 품었으니 이 세상을 등지는 건데, 너 같으면 마지막 할 말도 남기지 않고 그냥 무심히 떠날 거냐? 잠시나마 이 세상에 네가 존재했었다는 걸,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줄 거잖아. '난 이래서 이 세상을 떠나.'하고 말이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진 성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만회의 말에 공감해본다.
"무엇보다 타살이라는 것에 확신을 준 건 이거야."
성규의 얼굴을 슬쩍 본 만회는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엘리베이터에 여학생 두 명이 타고 있는 사진이 나왔다. 상의는 패딩 점퍼랑 후드 집업에 가려져 있어서 어느 학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교복 치마로 봐서는 피해자와 같은 학교임에 틀림없었다.
"얘네들이 용의자 선상에 오른 애들이야. 피해자가 옥상으로 향한지 10분도 채 안 되서 옥상으로 올라갔어. 어디 사는지 주소 떼 봤는데, 인피니트팰리스에 살기는 커녕, 여기 이 동네인 먹거리 골목에 사는 애들이더라. 한 명은 어머니가 학부모회에서 임원으로 있던데…. 어휴…, 입김이 장난 아닌가봐? 또 다른 한 명은 마냥 인생줄 놓고 사는 애인 것 같고…."
"아~ 그래서 우리 지구대에 계속 항의 전화를 했구나? 대체 무슨 근거로 이러는 거냐고…. 왜 교내 학습 분위기를 저해하냐고."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알게 되자, 손뼉을 한 번 짝, 치더니 드러눕다시피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대는 성규였다. 이거 완전 나쁜 사람들이네…. 죄다 한통속이구만?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혀를 쯧쯧 찼다. 그 모습을 보며 만회는 만족하는 미소를 가만히 지어보였다. 이제 이해가 가냐? 성규는 목에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짱을 꼈다.
"사건이 발생하던 날, 얘네들이 옥상으로 왜 올라갔을까?"
만회는 쩝쩝 입맛을 다시더니 그릇 한 켠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포크를 집어, 큼지막하게 9등분이 되어 있는 허니브레드 한 조각을 콕 찔렀다. 이를 지켜보던 성규도 먹고 싶었는지 팔짱을 풀고 똑바로 앉더니, 포크를 집어 허니브레드 한 조각 안으로 푹 찔러 넣었다.
"답은 하나지."
"그렇지!"
그러고는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 생크림이 가득 얹어있는 허니브레드를 꾸역꾸역 넣는 두 사람이었다. 함께 수사를 진행한 뒤로 처음으로 마음이 맞아서 흥이 났는지 남자아이들이 동네에서 칼싸움을 하는 것 마냥 챙챙챙 현란하게 포크로 싸우면서 유치하게 한바탕 놀기 시작했다.
*
"선배, 김성균 교수님 강의 괜찮아요?"
"글쎄. 정정 신청만 해놨지, 아직 들어보진 못했어. 그래도 지금 시간표에 있는 교수들 보단 훨씬 낫겠지…. 아니야, 반드시 그래야만 해."
그리고 미안한데, 이 팔짱 좀 풀어줄래? 굉장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 후배의 팔짱을 강제로 푸는 우현이었다.
"왜 미안해하고 그래요~ 전 괜찮은데…."
아니야,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이 말을 뱉고 나서 여자 후배를 힐끗 쳐다보니, 기분 나빠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표정을 본 우현의 눈이 사막 여우처럼 가늘어졌다. 참나, 대체 누가 기분 나빠해야 하는 건데…. 우현은 생각하기도 싫은지 고개를 저었다. 징그럽게 시리 팔짱 끼는 척하면서 가슴이나 비비적거리고 말이야…. 우현은 손으로 양팔을 감싸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먼저 카페에 들어가 있어. 곧 있으면 나머지 애들 올 거야."
여자 후배는 대답도 없이 찬바람을 쌩쌩 일으키며 카페로 들어갔다. 그 도도하고 같잖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현은 슬쩍 코웃음을 쳤다. 뭐야, 쟨?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아, 그나저나 첫 오리엔테이션에서부터 조별 과제를 내주다니…. 이건 대체 무슨 경우인가 싶다.
2학기 커리큘럼을 어디 한 번 빡세게 달려보겠다는 교수의 빛나는 패기인가? 되도록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데 피할 수 없어서 더 괴롭다. 이건 정말이지, 시간표를 잘못 짜도 아주 단단히 잘못 짠 것 같다. 한숨이 저절로 푹 나오면서 순간적으로 이게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현은 '에잇!'하며 두 눈을 꾹 감고는 자신의 양쪽 뺨을 번갈아 가면서 챡챡챡챡 때렸다. 2학기를 휴학하는 한이 있어도, 이 강의를 애초부터 신청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렇게 열심히 자학하고 나니 두 뺨이 얼얼했다. 손바닥을 뺨에 대고 가만히 있자니, 지금 이 상황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게 느껴졌다. 으갸갸갸갸갸갸갸!!!!!!!!!! 역시 2학기를 휴학하는 한이 있어도, 이 강의를 애초부터 신청하지 말았어야 했어!!!!!!!!!!!!!!!!! 챡! 챡!! 챡!!! 챡!!!!
"야!!!!!!!!!!! 야!!!!!!!!!!!!!!! 남우현!!!!!!!!!!!!!!!!!!!!!!!!!"
그 모습을 보고 헐레벌떡 뛰어온 거남이가 열심히 자학하고 있는 우현을 뜯어말렸다. 너 미쳤어? 길 한복판에서 대체 뭐하는 거냐? 그 말에 우현은 가녀린 여인네처럼 눈물을 글썽거리며 거남에게 매달리다시피 멱살을 붙잡으면서 (.......☞☜...) 애원했다.
"나…나…, 2학기 휴학하고 싶어…. 같이 휴학하자, 류거남…."
뭐래, 이 미친놈이…. 친구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아수라 백작처럼 얼굴빛을 싹 뒤바꾸는 우현이었다.
"에라이, 안 먹히네."
거남은 헛웃음을 치더니 '야이 십장생아, 귤까라 그래! 야이 시베리아야! 예라이, 썅화차야! 시베리아 벌판에서 귤이나 까먹어라!'라는 별 희한한 욕을 해대며 우현의 이마를 뒤로 꾸욱 밀었다. 으아악! 잔뜩 추한 표정으로 뒤로 밀려나면서 우현은 어영부영 뒷걸음을 쳤다. 행여 저러다 제 발에 걸려 뒤로 발랑 넘어질까 걱정이 된 거남은 그의 팔을 잡아주었다.
"야, 야…. 됐다, 그만하자. 잔말 말고 안으로 들어가기나 하자. 노트북은 챙겨왔지?"
"어, 혹시 밤샐까봐 충전기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툭툭. 안심하라는 듯 전쟁터에 나선 군인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백팩을 두드리며 말하는 우현이었다. 곧이어 잘했다고 엄지를 치켜세우고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며 어깨를 두들겨주는 거남의 뒤를 따라 카페에 들어가려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우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저…저…! 그 누구냐…! 그…그…!! 기…김성규!!!!!!!!!!!!!!!!!!!!!!!!!!! 김경위의 이름을 간신히 떠올려낸 우현은 카페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친구의 뒷덜미를 잽싸게 낚아챘다. 목이 졸리는 바람에 '켁!'하고 간신히 외마디 소리를 지른 거남이는 불쌍하리만큼 나무 계단에서 우당탕탕 굴러 떨어졌다.
"야! 딴 데 가서 과제하자!!!"
그르니끄 쁠리 일으느, 이 즈슥으…. 어디론가 샥샥 곁눈질을 해가며 빨리 일어나라고 친구를 툭툭 걷어차는 우현이었다. 계단에서 한바탕 구른 몸을 간신히 일으키면서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불만을 토로하는 거남의 등 뒤로, 카페의 전면 유리창에 비친 김경위는 해맑게 웃으면서 어떤 남자와 포크로 칼싸움을 하고 있었다.
큰일이다, 생각보다 훨씬 미친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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