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칼을 품고 산다.
'살인'이라는 것은 그것을 품에서 꺼내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
물론, 우리는 한 켠에 품은 채 삶을 살아간다.
우당탕탕!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일곱 명의 무한지구대 이야기
<응답하라112>
- 미스터몽룡
*
"아까 점심쯤에 국과수에서 연락이 왔는데 피해자의 사망 원인은 '추락에 의한 다발성 손상'이었어. 사실 추락사는 자살이나 사고사일 때가 많지만, 타살인 경우도 적지 않아서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사건이야.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하자면, 추락으로 병원 응급실에 들어온 환자 중 20%는 범죄와 관련돼 있다는 거야."
포크를 입에 문 채 얌전히 경청하고 있던 성규는 문득 자신의 귓가에 들려오는 적지 않은 수치에 화들짝 놀라, 구부정하던 허리를 꼿꼿하게 쭉 폈다. 그러고는 입에 물고 있던 포크를 접시 위에 재빨리 내려놓았다. 앙증맞은 사이즈의 포크가 하얀 사각접시 위로 얹어지면서 딸그락,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뭐? 20%라고?"
나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너 방금 20%라고 한 거지? 미적지근할 줄 알았는데 그의 반응이 예상외로 뜨겁자 어깨가 으쓱해진 만회는, 팔짱을 끼더니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표정은 마치 능청스레 빙글빙글 놀리면서 '부정하고 싶지?'라고 묻는 것 같다. 하지만 그와 달리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거짓말 같지? 진짜야."
조작된 사실이거나 만회가 잘못 말해주었길 간절히 바라던 성규는 그 말을 듣고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혀를 내둘렀다. 제발 아니길 바라던 마음에 탕, 탕, 탕, 확인 사살을 여러 번 하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온몸을 구석구석 감돌던 쌩쌩한 기운이 스르륵 빠져버렸다.
20%…. 결코 적지 않은 수치이다. 추락사한 100명 중 20명 혹은 10명 중 2명꼴로 범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추락사로 위장된 '살인의 피해자들'이란 뜻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은, 온몸에 소름이 쫘르르 돋을 만큼 정말 무서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 대체 왜 우리는 두 눈에 비친 그대로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일까. 도대체 왜? 그저 단순한 사고사일 수도 있는데, '왜' 의심을 품은 채 혹시 모를 타살의 가능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봐야 하는 걸까.
그건 바로 세상이 흉흉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세상…. 모든 사물들의 뒤에는 늘 그림자가 져있듯이, 눈길이 닿지 않는 '그림자'에 초점을 두고 이리저리 파헤쳐 새로이 결론을 내는 세상이다.
생각을 마친 성규는 스스로 충격을 받아 얼굴이 다 구겨졌다.
"그래서 혹시 모를 '타살의 흔적'을 찾아봐야 하는 이유지. 오직 20%를 위해."
팔짱을 푼 만회가 집게손으로 빨대를 잡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휘저으니 달그락 달그락거리며 얼음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특유의 시끄러운 소리는 고스란히 성규의 귀에 파고들어 청각을 자극했다. 반복되는 소음이 듣기 싫어서 인상을 팍 찡그리는데, 문득 머릿속을 스쳐가는 '카라멜 프라푸치노 우유 그란데 사이즈'라는 다섯 어절의 묘한 조화…. 게다가 가격은 6100원이라는 것까지 기억 한 켠에서 또렷하게 떠오른다.
뭐…뭐야…. 지금 이게 왜 뜬금없이 떠오르는 거지? 당황스러워서 도리도리질을 하여 정신을 가다듬은 뒤 맞은편에 앉아있는 만회를 바라보았다. 그는 빨대를 문 채 커피를 쪽쪽 빨아대며 심각한 표정으로 태블릿을 만지고 있었다. 바로 앞에 앉아있는 자신은 뒤로 제쳐둔 채, 온 신경을 태블릿에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저거 하나 장만하더니 아주 그냥 손에 쥐고 사는구만….
그런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성규의 시야가 갑자기 예고도 없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어? 눈에 뭐가 꼈나? 두 손으로 눈을 비비적거리고 나서 앞을 바라보니 마치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시야가 다시 선명해졌다.
근데 어디서 솟았는지, 만회가 있었던 자리에는 이상하게도 남우현이 꿰차고 앉아서 심각한 표정으로 태블릿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얼굴만 남우현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표정과 행동, 의상 모두 다 영락없는 만회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성규는 의아함에 그저 두 눈을 깜빡였다. 대체 남우현이 왜 여기있는거지? 잠시 멍해 있다가 순간적으로 이상함을 느끼고는 다시 눈을 비비적거리는 성규였다.
미쳤나봐!!!! 남우현이 여기 앉아있을 리가 없잖아!!!
한참동안 눈을 비비다가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바라보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회가 앉아있었다. 그는 여전히 태블릿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드디어 실성한 건가? 아찔함을 느낀 성규는 입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
잠시라도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누워있으면 조각난 퍼즐을 끼워 맞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 장면, 한 장면,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그날의 기억들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그날의 기억들은 잘게 잘게 으깨어진 수많은 유리 파편들이 되어 동우의 심장을 향해 마구 날아왔다. 생채기가 생겨서 따끔거리는 부분은 어떻게든 이를 악 물고 참아낼 수 있었지만, '장동우 오빠'라고 부른 뒤 집으로 발걸음을 향하던 소녀의 마지막 뒷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그 장면은 아주 날카로운 유리 파편으로 형상화 되어,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너무나도 쓰라리게끔 깊숙이 꽂혀버리는 식이었다. 아니, 함부로 빼낼 수도 없게끔 정확히 심장 한 가운데를 길쭉이 관통한다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소녀의 마지막 모습은, 동우의 가슴을 몹시 저미게 했다. 더 나아가 백아혼이란 이름 세 글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 구석이 찌릿찌릿 해오며 반사적으로 눈시울이 붉어져왔다.
"나도…, 살인자야…."
나도 살인자라고….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중얼거리는 동우의 시야가 희뿌옇게 변했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아서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송곳니로 꾹 깨물어 보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죄책감 때문에 시야가 한 겹 더 희뿌옇게 변했다. 게다가 매캐한 것을 맡은 것 마냥 코끝이 찡해져 옴과 동시에 피가 쏠리는 게 느껴졌다. 손으로 직접 만지지 않아도 코끝이 뜨거워졌음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불안한 모습으로 모바일 메신저를 하고 있던 소녀에게, 뭐하냐고 물으며 핸드폰을 장난스레 뺏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이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멀쩡히 살아있겠지….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분주히 학교를 가고, 수업을 받고, 그리고 방과 후에 간간히 지구대에 들려서 인사라도 잠깐 하다가고 그랬을 것이다. 지겨워하면서도 누구나 한 번씩 거쳤던 10대의 지극한 일상들을 말이다. 아니면, 정말 그것도 아니면, 소녀에게 '신변 보호 요청할래?'라는 제안을 했었더라면….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가슴이 미어져오기 시작하면서 또 한 번 시야가 뿌옇게 변하는 것도 잠시, 이내 밝아졌다. 참을성 없이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 탓이었다. 그렇게 일직선으로 흐른 눈물은 그의 옆머리를 거쳐 고스란히 베개를 적셨다.
눈물을 떨어뜨리고 나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두 눈을 꾸욱 감더니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는 경찰도 아니야!!!!"
동우는 몸을 뒤집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열하는 그의 주변으로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어 어수선하기만 한 호원의 방…. 호원이가 이른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면서 식탁에 차려놓았지만, 끝내 먹지 않아서 차갑게 식어버린 밥과 국…. 그리고 한쪽 귀퉁이에는 밥 먹고 꼭 챙겨먹으라며 호원이가 올려놓고 간 감기 몸살약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
같은 시각, 태블릿을 성규 앞으로 내미는 만회였다.
"이건 국과수에서 찍은 시신 사진이야. 이렇게 전체적으로 보면, 시신은 떨어질 때의 충격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걸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어. 추락하는 과정에서 소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튼 듯해."
만회는 특정 사진을 틀어놓고 전체적인 설명을 하다가, 소녀의 추락 과정을 재연하기 위해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성규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 뜯었다. 자신 같았으면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심장마비부터 걸렸을 텐데, 친구들에게 떠밀린 소녀는 맨 정신으로 떨어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몇 초 후에 자신을 덮쳐올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크나큰 공포를 느꼈겠지. 그 기분을 잠깐 떠올리기만 해도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아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지구대에 찾아와 뺑소니를 자수했던 것이 죽음으로 내몰릴 만큼 그렇게 잘못한 일이었던 걸까? 대체 그 애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랬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를 일이었다. 비록 아름다움으로 가득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넓디넓은 세상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소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애잔하게 들끓었다. 나쁜 년들 같으니라고…. 입술을 뜯다가 멈춘 성규는 턱에 힘을 주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꼭 잡고야 만다.
"지금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지?"
딴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규의 주의를 끌기 위해 확인차 질문을 던지는 만회였다. 후다닥 황급히 생각을 접은 성규가 응, 하며 짧게 대답하자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만회는 안심이 되었는지 안도의 미소를 흘렸다. 말하다가 느낌이 뭔가 이상해서 쳐다보니까 엄청나게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너 아닌 줄 알고 깜짝 놀랬잖냐….
그 말을 듣고 난 성규는 싱겁게 웃어 보이더니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만회는 태블릿 화면에 틀어져 있는 사진의 특정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차근차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 봐봐. 상처 부위가 모두 오른쪽으로 집중된 거 보이지? 오른쪽 팔과 옆구리, 허벅지 등에 멍든 자국이 아주 또렷하잖아. 그리고 온몸 곳곳에서 골절도 나타났어. 그 중에서 가장 심한 상처가 있었는데 머리뼈 바닥에 가해진 충격 때문에 생긴 거였어. 이게 바로 피해자를 사망으로 이끈 직접적인 사인이야. 이걸 법의학적 용어로는 '두개저 골절'이라 불러. 높은 곳에서 추락하거나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또는 심하게 넘어져 머리를 부딪쳤을 때 전형적으로 나타나."
말을 마친 만회는 포크를 잡더니 허니브레드 밑으로 집어넣어 자신의 머리 높이만큼 한 조각을 들어올렸다. 뭐하는 거냐는 성규의 물음을 뒤로한 채 손목을 옆으로 반쯤 꺾어 접시 위로 허니브레드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생크림이 얹어져 있어서 흐물흐물해진 윗면이 뒤집어지면서 접시 표면과 맞닿아 질척한 소리가 났다.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찔거린 성규는 한쪽 눈을 가늘게 뜨며 인상을 찡그렸다. 으….
"이게 바로 두개저 골절이야."
두개저 골절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기 위해 만회가 한 행동이었지만, 마치 소녀의 머리가 땅에 닿는 순간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대단한 사고라도 난 것 마냥 접시 주변부에 생크림이 너저분하게 튀어있는 모습 또한 이상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생크림이 하얀색이라서 다행이었지, 만약에 빨간색이었다면 영락없는 혈흔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자꾸 헛것이 보이거나 사건 현장과 겹쳐 보이는 걸까.
때마침 그의 반응을 살피며 이해가 가냐고 묻는 만회에게 '이해했으니까 그만하자.'라고 단호하게 못을 박은 성규는 얼굴을 계속 찡그린 채 쟁반 위에 놓여있는 냅킨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사건 현장의 혈흔을 지우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생크림이 묻어있는 테이블 표면을 박박 닦아냈다.
"너 혹시 무슨 강박증 있냐?"
만회의 농담어린 말이 들려왔지만 잘 귀담아듣고 보란 듯이 맞받아칠 만큼, 그리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박박 닦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생크림을 마무리하며 끝이 났다. 성규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쥐고 있던 냅킨을 한 손으로 아무렇게나 구기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쟁반에다가 휙 던졌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쭉 지켜보고 있던 만회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주 조심스레 물었다. 너…. 이중인격은 아니지?
"미친놈…."
참으로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을 치며 말하는 성규였다. 이러는 거 보니까 김성규 맞네, 라고 조그맣게 읊조린 만회는 성규가 생크림을 닦는답시고 한 켠으로 밀어낸 자신의 소중한 태블릿을 테이블 한 가운데에 끌어다 놓았다. 그러고는 검지와 중지를 이용하여 화면을 확대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피해자는 오른쪽 갈비뼈와 양쪽 어깨뼈, 오른쪽 엉덩뼈까지 온통 성한 데가 없어…. 추락사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시신이 많이 훼손됐지만, 떨어지는 과정에서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기 때문에 지면에 제일 먼저 닿은 머리 다음으로 오른쪽 위주로 충격이 많이 갔어."
"그럼…, 왼쪽은?"
"왼쪽으로 충격이 아예 안간 건 아니고, 머리랑 오른쪽에 비해 그나마 조금 성할 뿐이야. 지면에 부딪히면서 충격을 받은 뇌와 기도, 폐 등에는 피가 고여 있었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사진을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던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굳게 다물어버렸다. 이게 어딜 봐서 오른쪽 갈비뼈고 양쪽어깨뼈란 말인가…. 의학적 지식이 없긴 하지만 심하게 으스러져 있어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겹다거나 징그럽다는 생각은 전혀 눈꼽만큼도 들지 않았다. 사진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는 것 자체가 왠지 모르게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여 주는 것만이 최고이자 마지막 예우인 것 같았다.
가만히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 한편으로는 장경장이 지구대장이 아니라서 다행으로 여기는 성규였다. 만회가 보여주는 이런 사진들을 만약 장경장이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됐다면 밀려드는 죄책감에 그 자리에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는 모습은 비록 본 적이 없지만, 평소에 워낙 천사같이 순하고 정이 많은 성격이라 그런지 눈물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기 냄새를 풀풀 풍길 것만 같은 유약한 느낌이 나는 장경장이니까 말이다. 어제 폭풍같이 쏟아지듯 내린 그 많은 비를 혼자서 쫄딱 맞고 감기몸살로 몸져누워 병가를 낸 장경장을 생각하니 측은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그나마 눈물이 많지 않은 자신이 이 자리에 있으니까 참 다행인 것 같다.
그나저나 국과수의 감식 결과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피해자의 부모님을 떠올리니, 어떡하나 싶어서 가슴이 먹먹해 오기 시작했다. 열 달 동안 소중하게 뱃속에 품고 있다가 낳아서 애지중지 키운 외동딸이 이런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부모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장이 무너질까…. 본인 같았으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렇게 된 상황에서 장경장 못지않게 소녀의 부모도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고 계시겠지….
가해자들을 향한 엄청난 분노와 함께 말이다.
*
"높은 곳에서 떨어져 훼손이 심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피해자의 몸에 난 두 줄의 상처는 무엇 때문에 생긴 것입니까?"
손을 들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질문을 하는 여기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회견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은 기자들이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쁘게 셔터를 눌러대며 여기저기서 플래시를 터뜨렸다. 아주 잠시였지만, 찰칵찰칵 거리는 셔터소리와 번쩍번쩍 거리는 플래시만이 감식 결과 발표를 위한 회견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속에서 말할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는, 많아봤자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담당 검시관은 두 팔을 적당히 벌려, 회견을 위해 마련된 단상의 양끝을 힘주어 붙잡았다. 결단력 있어 보이는 제스처였다. 그런 그의 등 뒤로 'NFS'라고 적혀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파랑색 원형 로고가 돋보였다. 양옆에는 태극기와 국과수 깃발이 믿음직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셔터소리가 잠잠해질 때 쯤 검시관은 '어…. 음….'하고 말문을 떼더니 단상에 고정시켜 놓은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하였다.
"저희는 피해자의 몸속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허리와 엉덩이에 남은 멍자국을 발견하고는 그 부분에 주목했습니다. 전문용어로는 '중선출혈(重線出血)'이라고 합니다. 다들 한 번쯤은 어렸을 때 맞아봐서 아시겠지만 우리 몸은 회초리, 지팡이, 벨트, 알루미늄 파이프 같이 폭이 좁고 가벼운 물체로 맞으면 해당 부위의 가장자리에 두 줄로 출혈 자국이 생깁니다. 영어로는 '두 줄 출혈(Double line hemorrhage)'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추락 도중에 엉덩이나 허리 부분이 나무에 걸렸다면 충분히 멍자국이 생길 수 있습니다만 피해자의 경우, 단순히 나무에 걸려서 생긴 상처로 보기엔 멍이 발생한 부위가 너무나 광범위 했습니다. 게다가 몸 안쪽의 흔적은 더욱 선명했습니다. 둔탁한 힘으로 피부는 파열되지 않았지만, 모세혈관과 정맥 등은 파열돼 출혈이 나타났습니다. 한마디로 피해자가 사망하기 직전, 누군가로부터 구타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검시관이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하자마자 잠시 사그라졌던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번쩍번쩍 터지기 시작했고, 회견장에 앉아있던 기자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질문을 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 손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타닥타닥 거리며 다급하게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도 들렸다.
이로써 사건은 명백하게 타살로 밝혀졌다.
*
이제, 범인을 잡는 일만 남았다.
이런 글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