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범권] 구원 02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8/3/e/83eb68eb20b1950e878803859e909bf9.png)
------02------
-작가님. 1판을 넉넉하게 인쇄했는데 판매완료된 서점에서 추가발주요청이 많이 오네요. 2판 변경없이 오늘오후에 찍을 예정입니다.
오전 11시 24분
♪♬♪♩
-수고가 많습니다. 이번 판 인쇄도 잘 부탁해요. 1판 오류사항이 있으면 메신저로 다시 연락주세요.
오전 11시 40분
입사한지 6개월. 베스트셀러작가 담당을 맡게 된 안재효. 이전에 맡았던 작가님과는 차원이 다른 깍듯함에 놀라고 말았다. 마감시간 역시 여지껏 한 번도 어긴적이 없으며 문체 하나하나 섬세한 표현에 그 흔한 오타조차 없다는 일명 천사작가 이민혁은 담당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판매권수의 꾸준한 상향곡선에도 겸손하고 착실함이 한결같아 탐내는 담당자며 출판사도 많다.
확실히 그는 이 정도 규모의 출판사와 계속 함께하기엔 아까운 감이 있는 인재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재효가 책상을 정리하다가 스케줄이 체크된 달력을 보았다. 2주에 한번, 그의 집을 방문하는 날이 내일이었다. 차를 몰고도 여기서 40분 정도는 더 가야 귀퉁이가 보이는 그의 집은 그와 꼭 닮아 있었다. 휴식기를 가지고 있는 그와 따뜻한 레몬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때면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는 느낌, 저보다 나이가 있음에도 함께 있으면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외모와 목소리, 특유의 차분함으로 그와 만나는날이 기다려진다. 근처 빵집에 들러서 바게트와 달달한 생크림을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여느때 처럼 한가로운 오후. 밤새 한가득 내린 눈들이 나무에 빛나는 꽃들을 그려냈다. 무릎베개를 하고 있는 유권이 지루한 듯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이번 작품도 꽤나 매출성적이 좋았다. 물론 매출을 위한 글은 아니었지만 그의 책은 벌써 세 권째 베스트셀러에 올라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었다.
기분을 말하자면 묘한 시원섭섭함.
고군분투했던 몇년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 문득이 부모님생각이 떠오른다. 낡은 휴대폰은 켜지 않은지 오래이고, 이곳으로 들어올 때에도 달랑 통보뿐이었으니 몇해간은 친구와 부모님의 숱한 설득에 시달려야만했다. 그 다음에는 쓸모없는 인간관계가 말끔하게 청산되었다. 약간의 외로움을 빼고는 이곳은 완벽한 나의 공간이었으니까. 내가 없으면 살수 없을것만 같은 유권만이 어느새 이곳에 들어와 살고 있을 뿐이었다.
나에게 조금 여유로워지고 나서야 밖으로 나갈 용기가 생긴다. 어느새 나이는 서른이 넘어가고 있었다. 십년 좀 넘은 시간동안 고집을 부렸으니 이제는 만나 뵐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자랑스러워하고 있을지도. 외부와의 소통은 출판담당자와의 만남이나 메신저뿐이니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뜨뜻미지근한 걱정과 기대가 한데 섞여 이도저도 아닌 감정이다. 그러다 결국은 낡은 차고 문을 열었다. 먼지가 쌓인 포드차, 젊었을적 빈티지한 느낌이 좋아서 산 차이지만 지금은 빈티지라기보다는 골동품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시린손을 호호불고 먼지를 털었다. 기름을 확인하고 삼십분에 걸쳐 찾은 차키를 꽂아돌렸지만 엔진은 돌아가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결국 차고문을 닫고 재효씨에게 양해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을 올려다 본다. 창가에 기대앉아 민혁을 바라보는 유권이 그가 손을 흔들자 훌쩍 현관으로 내려왔다. 차가워진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겨주니 추운지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린다. 슬쩍 웃은 그가 코트와 목도리를 벗고 유권을 품에 안았다. 코끝에 닿는 샴푸향이 좋다. 유권이 장난스럽게 드러난 목덜미를 물다가 느껴지는 그의 향수에 정신이 몽롱했던지 코를 킁킁거렸다.
*
“눈이 많이 오네요.”
열린 문으로 머리와 구두를 털며 재효가 말한다.
“올해 유난히 그렇네요. 휴식기엔 먼 곳까지 찾아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사무실에서 바로 오셔서 피곤하지 않아요?”
“괜찮아요, 따뜻한 차가 있어서...”
그가 사온 바게트를 썰어 온 민혁이 재효의 말에 생긋 웃었다. 그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그가 서른이 넘었다고는 상상도 못할 것 같다.
“밖으로 나가신다고 하신건 처음인데, 6개월 만인가요?”
“아뇨.. 사실은 십년도 더됐죠, 나가본지”
천천히 차를 마시던 재효가 콜록콜록..! 사래에 들려버렸다.
놀라셨어요?
미안한 듯 웃던 민혁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입을 닦다가 그 향기마저 매혹적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재효씨 저녁시간이 늦어지겠네요. 출발할까요?
하는 말에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둘렀다.
외투를 입고 나올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가 올라간 또 하나의 방에 낯을 가리는 고양이가 몰래 재효를 보고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전후상황 알고 나니까 이이경 AAA에서 한 수상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