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멍청하게도, 택시비를 계산하다가 아직 한번도 유권을 혼자둔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 하는건데, 눈밭을 걷는 걸음이 빨라진다. 혹여나 혼자있는동안 선잠을 자다 악몽을 꾸진 않았을까, 식기들을 떨어트려 다치진 않았을까 하는 갖가지 걱정이 갑작스레 밀려와 걸음이 거의 뜀박질이 되었을 때 비로소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관을 활짝열면,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있는 그가 있을 줄 알았으나 거실엔 그의 온기가 없었다.
"권아"
하는 부름이 무색하게 공중에 흩어져버렸다. 방울소리 마저 나지 않았다. 다 타버린 벽난로안의 나무와 미적지근해진 공기로 느낌이 좋지않다. 꺼진 주방불, 차려놓은 음식이 차게 식은걸 확인하고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부터, 차례차례 불을 켜고 문을 열었다.
"...너무 늦게왔구나. 널 조금 더 생각했어야하는데 정말 미안해."
-딸랑
하는 옅은 방울소리에 발걸음을 서재로 옮긴다. 문을 천천히 열자 마법같이 와락, 그가 안겨왔다.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본래 기분이 아주 좋을때가 아니면 먼저 안겨오는 법이 없는 유권이라서, 더 깊게 그를 품에 안았다.
"사과할게. 용서해줄래?"
경직되어있는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젖어드는 옷에 아, 하는 탄식소리가 나왔다. 아직까지도 너는 많이 여리구나. 조금 더 유리구슬처럼 대해줬어야 하는 것이었다. 눈물이 맺힌 얼굴을 보여주기 싫었는지 고개를 들지않아 피가고인 손끝을 잡아올려 느리게 입을 맞춘다.
이제 무서운 악몽에서 깨어날 시간이야.
천천히 드는 고개를 손바닥으로 감싸 눈물을 훔쳐 주었다. 그를 안아올려 침실로 향한다.
혼자 두지 않을게
*
다음날 아침까지도, 유권은 나에게서 2미터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다물어뜯어 반밖에 남지않은 손톱에 소독약을 발라줄때를 빼고는.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했으므로 사랑이 부족하다면 부족한 만큼의 사랑을 더 주기위해 신경썼다. 앞으로 일주일은 더 노력해야 그는 조금 호전될 것이다. 나는 좀 걱정이 되면서도, 평소에 안하던 행동을 보이는 네가 재미있기도 하다. 한창 딴짓을 하다가도 내가 카펫을 밟고 일어서는 소리가 들리면 부리나케 시선이 따라왔다. 그가 모르게 웃으며 평소보다 더 많이 움직이게 된다.
그러다 문득 묘안이 떠오르는 것이다.
사실 그를 데려오고 나서부터는 산책을 줄곧 하지 못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자는 말도 안돼는 생각이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함께 산책을 할 수 있을것만 같다. 눈이 가득쌓인 겨울의 이곳은 꽤나 절경이라서, 집안에만 있는 유권에게 바깥도 아름다울수 있다는것을 알려 주고싶은 맘이랄까
처음 입어보는 두꺼운 파카에 너는 눈만 데굴데굴 굴린다. 불편한지 자꾸만 벗으려해 나즈막히 주의를 줬다. 오랜만에 꺼내는 외투라서 괜히 마음이 들뜬다. 신발도, 미리수가 좀 다르긴 하지만 괜찮다. 사십분간의 실랑이 끝에 외출준비가 끝났다.
현관을 활짝열자 눈이 잔뜩 쌓인 길이 보인다. 재효가 다녀간 흔적도, 어젯밤 눈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멍하니 문앞에선 니가 새하얀눈을 밟을까 말까 고민하는것이 너무 눈에 잘보여서, 그만 웃고 말았다. 바닥을 보다가 고개를 든 그의앞에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열손가락에 밴드가 감긴 모습이지만 더할나위없이 어여쁜 손이다. 코끝으로 밀려들어오는 찬바람에 유권이 깊게 심호흡했다. 한 발짝, 두 발짝 걸을때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에서 맑은소리가 난다. 처음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신중하게 한발한발을 내딛다가 그가 우뚝 멈춰섰다.
"괜찮아. 계속 손잡고 있을 거니까."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발을 뗀다. 처음 널 만났던 곳에 가볼래? 하는말에 보일듯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덤불은 그리 보기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보다 울창해졌을거라 생각했는데, 추운날씨에 생기없이 말라비틀어져 버렸다. 그 모습이 기괴하고도 안쓰럽다. 유권이 알듯말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시덤불을 지나쳐 큰 나무가 있는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름철엔 무성한 나뭇잎과 불어오는 바람에 머릿속 요소들이 마구 엉킬때 앉아있으면 좋은 곳이다. 지금은 잎이 모두 떨어져버렸지만.
그곳에 한동안 앉아있었다. 줄곧 잡고있던 손을 스르륵 놓으니 네가 눈을 맞춰왔다.
"눈, 만져볼래?"
발치의 눈을 들어 코앞까지 가져다주니, 처음엔 냄새를 킁킁 맡다가 그 아기자기한 혓바닥을 낼름 내미는 것이다. 워낙 따뜻한것만 좋아해서 별로 안좋아할줄 알았더니.
이내 뺨을 가져다내고, 폭신한 그 느낌을 느끼려 눈을 감는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땐 뺨으로 주르륵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렸다.
이제가자
하는 말에 다시 손을 잡아달라고 떼를 쓴다. 못이기는 척 꼭 잡은 손이 서로의 온기로 더이상 시리지 않았다. 너와 처음하는 산책은 온통눈에 둘러싸여서, 끝이났다.
*
♩♪♬♩
울리는 메신저에 반사적으로 작가님에게 온것일까 하고 눈을 돌렸다.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어째서 어제 집에 잘 들어갔냐고 물어줄것을 기대했던 것일까.
모르는 여자이름이라서, 무심하게 대화창을 지워버렸다.
저급한 광고 겠거니, 했던 생각과는 다르게 연이어 알람이 울렸다.
'XX출반사 안재효씨죠?'
'아이디 찾느라 고생좀했네요'
'그쪽이 이민혁씨 출판 담당자라면서요?'
뭐야... 기분나쁜듯 미간을 구긴 재효가 키보트를 두드렸다.
'아이디는 어떻게 아셨어요?'
'그건 됐고, 부탁하나 할게요.'
'출판 관련사항이 아니라면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민혁씨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안재효님이 대화방을 나가셨습니다.'
주저없이 '나가기' 버튼을 눌렀다. 뭐야..이여자.
출판관련사항이 아니라면, 그 어떤 발언도 삼가해달라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다짜고짜 집을 묻다니, 악질 스토커나 지능형 안티일수도 있을까? 괜한 걱정이 빗발친다. 어디서 알아낸걸까? 생각하고 있을즈음에 다시 알람이 울린다.
'나 민혁씨 애인이거든요. 이야기 안해주면 내가 알아볼거에요.'
뭐...?
마우스를 잡은 손이 잠시 떨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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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입니다.
암호닉 주신 우동님, 맥심님, 권력님, 바게트님까지 좋은 덧글 달아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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