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처음 만나던 날.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였다.
처음 본 순간... 그대를 雪花 라 일컬으니 너는 내게 스며들어와 하얀 '눈꽃' 이 되었다.
이마에 닿아오는 차가운 느낌에 미간을 찡그린 태환은 조금씩 열린 눈꺼풀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다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떠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낯선 노인.
주름진 얼굴에 가득한 걱정스러운 표정에 태환은 힘겹게 눈을 몇번 깜박이다가 번쩍 떠올렸다.
"이제 살았구만."
태환의 이마에 놓인 물수건을 매만지며 노인이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기가...어딥니까."
하얗게 말라 비틀어진 입술 사이로 거친 음색이 새어나왔다.
"저잣거리 근처 약방이오. 어젯밤에 비에 홀딱 젖어 피를 흘리고 왔지."
혀를 끌끌차며 안색을 살피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환은 다시금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낯선 사내의 공격을 받고 도망치다, 피를 많이 흘리고 쓰러져있었던 기억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거세게 내리던 빗속에 웅크리고 앉아 떨고 있던 자신을 붙잡던 따뜻했던 손.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깊은 눈동자.
비에 젖은 등자락에 자신을 업고 어두운 밤길을 내딛던 그의 숨소리가 마치 방금 일어난 일처럼 태환의 눈앞에 펼쳐진다.
"저를 이곳에 데리고 오신 분은....."
"어젯밤에 돌아갔소. 한참을 바라만보더니... 그냥 가더구만."
노인의 만류에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은 태환은 이마에 얹어져있던 수건을 바닥에 내려두고 이불을 걷었다.
"더 있다 가시오. 고뿔까지 걸려 지금가면 몸이 혹사당하오."
"죽지 않았으니...됐습니다. 약값은..."
"어제 자네를 데려온 사람이 모두 내고 갔소. 그냥 가도 되오."
더 쉬었다가 가면 좋으련만 끝까지 고집을 꺽지 않고 몸을 일으킨 그를 따라 노인도 약방의 입구까지 따라나왔다.
"당분간은 무리하면 안되오. 집에 가서 푹 쉬시오."
"감사합니다."
손을 흔드는 노인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태환은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추스리며 장터 길로 발을 내딛었다.
집까지 알려진 마당에 그곳으로 돌아갔다가는 다시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욱신거리는 팔을 붙들고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내딛는 그의 모습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끼니 때가 되었는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주막 근처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있던 태환은
자신을 발견한 금옥의 딸아이 인사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쁘게 일하는 자신의 어미를 부르며 오라버니가 왔다고 알리는 통에 태환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주막 안에 들어섰다.
"밥 먹으러 왔소?"
바쁜 와중에도 태환을 반기며 인사를 건네던 금옥은 수척해져 안색이 흙빛으로 변한 그의 얼굴에 화들짝 놀라버렸다.
어젯밤, 멀쩡히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그가 이런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터였다.
이리저리 찢기고 더러워진 옷차림과 팔 위에 동여맨 헝겊 위로 스미는 핏자국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금옥은 태환의 손을 끌어 방으로 들였다.
"이게..무슨 일이오..이게 어찌 된거요."
"뭐가 뭔지 나도 모르겠소. 집에서 낯선 자에게 공격을 받았소. 선월을 찾고 있는 자였소."
"선..월...? 혹, 김재호........"
사색이 된 얼굴로 그의 이름을 내뱉은 금옥은 땀이 베이는 두 손을 꼭 쥐었다가 치마자락에 문지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곳만 떠나면 그만인 줄 알았건만...질기기도 하오..... 이제 어쩌오. 집까지 알아냈으니..."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금옥은 다친 팔을 쥐고 신음하는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일단은 여기에서 지내시오."
"이곳까지...알아내면...금옥이 다칠거요."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고! 그 몸으로 어딜 갈거요? 집도 못가는데!"
"하지만..."
"고집부리지 마시오. 어찌보면 내 탓이지. 그런 형편없는 인간이 자네에게 집착하게 만든 건...내 탓도 있소."
"금옥 탓이 아니오..."
자신의 탓이라 가슴을 치는 여인의 손을 붙든 태환은 그러지말라 다독이다가 팔에 느껴지는 통증에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움직일때마다 스미는 핏자국에 헝겊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들어 있다.
"얼마나 다친거요..."
조심히 태환의 팔에 매여진 헝겊을 풀어내고 찢겨진 옷 사이로 상처를 들여다본 금옥은 참혹한 그 모습에 눈시울을 붉혔다.
곱디 고운 피부에 새겨진 끔찍한 상처... 여인은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눈을 감아버렸다.
반닫이를 열어 깨끗한 천을 꺼내든 금옥은 길게 쭉- 찢어 피가 흐르는 그의 팔을 다시 동여맸다.
꼼꼼하게 몇번을 돌려 감아 지혈을 하고서야 서서히 멈추는 피에 여인은 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불을 꺼내 바닥에 폈다.
따뜻한 아랫목에 잘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기력이 떨어져 힘없이 앉아있는 그의 손을 끌어다 눕혔다.
"일단 한숨 푹-자고 일어나시오. 지금은 무조건 쉬는게 약이오."
"고맙소..."
매마른 입술로 고맙다 인사를 건네는 태환의 가슴께까지 두터운 이불을 끌어다 덮어준 금옥은 그의 머리맡에
자리끼를 놓아두고 방을 나섰다.
이리 신세를 져도 되는걸까...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이며 한참을 천장만 바라보던 태환은 온몸에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밖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아
태환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곤히 눈을 감은 그는 어느새 깊은 잠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었다.
내내 칼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어쩐 일인지 따사로운 햇살이 창호지를 물들이고 들어와 방안에 온기를 더한다.
복잡한 생각들을 떨치려 서안 앞에 앉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서책만 바라보던 쑨양은 눈이 부시게 따사로운 빛에
눈가를 찡그렸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바람 한점 없는 날씨에 시린 겨울임을 잊은듯한 따스한 공기가 그의 입가에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마른 나뭇가지에 걸려 이리저리 부서지는 햇살 한조각을 바라보던 쑨양은 어제 세차게 내렸던 비가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분간이 가지 않았다.
깨끗하게 정리된 마당을 오가는 하인을 바라보다 햇살이 들지 않은 그늘에 고인 물웅덩이를 발견하고서야
어젯밤 그 비가 현실이었음을 느낄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방문을 열고 앉아 마당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나으리의 모습에 하인은 싸리빗자루를 벽에 기대어 세워 두고
천천히 그 곁으로 다가섰다.
자신이 다가온지도 모르는지 여전히 미동 없는 그의 시선에 하인은 살며시 주먹을 쥐어 작은 헛기침을 해보였다.
"흠..나으리~"
그제서야 나으리의 두 눈이 자신을 향한다.
"차라도 한잔 내올깝쇼?"
"아... 그래주면 고맙겠소."
하인의 선의에 쑨양은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금방 내오겠다며 나으리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인 하인은 잰걸음으로 아낙네들이 일하는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후, 둥근 소반에 다기와 접시를 올려 들고 온 하인은 하늘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으리의 앞에 살며시 내려두고
제 볼 일을 보러 뒷마당으로 향했다.
그 인기척에 시선을 옮긴 쑨양은 접시에 놓인 간식 하나를 발견하고 찻잔을 들려던 손을 멈추었다.
사기 접시에 가지런히 놓인 약과.
언젠가 설화에게 사다주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쑨양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오른다.
천천히 손을 뻗어 약과 하나를 집어든 그는 그날처럼 반을 갈라 접시에 다시 내려두고 손에 들린 약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달함과 함께 약과를 받아들고 환하게 웃던 여인의 모습이 생각나 쑨양은 곧, 미소를 지워버렸다.
"설화. 그대는 제게 무엇을 감추려 하는 겁니까."
한입 베어문 약과를 다시 접시에 내려둔 그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것을 바라보다 다시 천천히 입을 떼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은 아니겠지요..."
씁쓸해진 표정으로 두 눈을 지그시 감는 그의 눈앞에 어젯밤의 일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하염없이 울던 설화를 안아 달래던 그 날과 같았던 어젯밤의 기억.
아니라 부정하고 싶었으나 자신의 품에 안겨오던 그의 여린 몸이...그의 여린 어깨가... 진실을 부정하려는 그에게
아니라 답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생각이 뒤엉켜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싼 쑨양은 천천히 눈을 떠올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금옥의 주막에서 하루를 꼬박 잠만 잔 태환은 다음날 오전이 되어서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언제 준비해둔것인지 그의 곁에 깨끗한 새 옷이 곱게 개어 놓여있다.
그 정성과 마음씀씀이가 고마워 엷은 미소를 지어보인 태환은 금옥이 준비해둔 새옷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이제 일어났소? 몸은 좀 어떠오?"
"덕분에 많이 좋아졌소. 혹, 의심스러운 자는 보지 못했소?"
걱정스러운 그의 물음에 금옥은 고개를 가로 저어 보이고 활짝 웃었다.
"죽 끓여두었소. 몇술 뜨시오."
죽을 끓여두었다는 여인의 말에도 태환은 대답 없이 마루에 걸터 앉아 신을 챙겨 신고 몸을 일으켰다.
"그 몸으로 어딜가려고 그러오? 자네를 쫒는 자도 있는데..."
"요 앞 김씨네 비단가게에 좀 다녀오겠소. 금방이니 걱정 붙들어 매시오."
"에휴...그래도..."
"금방이오. 여기서 보이니 무슨 일 생기면 소리라도 지르겠소."
끝없는 여인의 걱정에 우스갯소리를 하며 답하자 그제서야 금옥도 살풋이 웃어보였다.
금방 다녀오겠다 주막을 나선 태환은 잰걸음으로 비단가게로 향했다.
비단을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가게안으로 들어선 태환은 자신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주인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혹, 제 앞으로 맡겨진 물건이 있소?"
"오! 있지~있지. 잠시만 기다리시오."
잠시 앉아서 기다리라며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는 비단 주인을 따라 시선을 옮긴 태환은 곧, 그의 손에 들린
노란 비단 보자기를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전에 옷을 지어준 사내 앞으로 맡기는거라 했소. 이게 맞는지 모르겠소?"
"맞소. 번거롭게 해 미안하오."
"에이~물건 하나 맡아주는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나저나 얼굴이 왜이리 상했소?"
"...아...요 며칠 잠을 좀 못자서... 아무튼 고맙소. 일거리 생기면 금옥에게 알려주시오."
밀려드는 손님에 급히 가게를 나선 태환은 자신을 마중나와 손을 흔드는 그에게 웃어보이고 다시 주막으로 향했다.
노란 비단 보자기를 하염없이 바라만보던 태환은 천천히 손을 뻗어 곱게 묶인 매듭을 풀어냈다.
잘 개어진 옷과 그 위에 놓인 편지, 그리고 처음 보는 비단 주머니 하나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없던 물건인데..."
보드라운 비단 주머니를 이리 저리 만지작거리다 그 안에 담긴 물건의 감촉에 천천히 꺼내들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값 비싸보이는 비녀.
꽃으로 장식된 고운 비녀를 바라보던 태환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였다가 곧 쓸쓸한 표정으로 바닥에 내려두었다.
꽃을 보면 설화가 생각난다는 그의 말이 떠올라 태환은 가슴 한켠이 따끔거려왔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비녀의 금빛 몸통에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져 비친다.
그 모습이 마치, 그를 속이고 있는 자신의 거짓된 모습인것 같아 태환은 마음이 아팠다.
"나으리께서는 여전히... 꽃을 보시면 설화가 생각나시는 겝니까... 어찌 이렇게도 한결같으실 수 있는겝니까..."
떨리는 손으로 비녀를 집어 비단 주머니에 고이 넣은 태환은 다시 옷 위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그런 분께... 저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보드라운 비단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는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려온다.
***
안녕하세요~흰둥이입니다.
어제 두편 폭풍연재로 멘붕이 와서 며칠 농땡이를 부려볼까..했는데......;;;
정신이 다시 돌아와 급히 19화 던지고 갑니다...
벌써 19화...목표는 20화까지였는데...
넘어가겠네요...헐 ㅠㅠㅠㅠㅠㅠ
잠이 오는 관계로...긴 이야기는 접어두고...
좋은 꿈 꾸세요~여러분!!
늘 재밌게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또..뵈요!! 굿밤!!
★ 오늘 메인 쑨양...왤케 섹시하죠? 아놔.....멋져부러 ★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쑨환] 雪花 (설화) 19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e/5/8/e584a817c88ffa4acd7f209d2b41326a.jpg)
조진웅 "제발 그만....."